'밀란 쿤데라의 문학과 음악'
번역가 백선희 선생님과 풍월당 박종호 선생님과 함께 한 강연 후기!
어제 압구정 풍월당에서 '밀란 쿤데라의 문학과 음악'이란 주제로 쿤데라 전집 완간 기념 마지막 강연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강연인 만큼 이야기는 두 배로 풍성하게 마련되어 있었는데요.
1부는 『웃음과 망각의 책』, 『자크와 그의 주인』번역가인 백선희 선생님께서
2부는 풍월당의 주인이자 밀란 쿤데라의 문학과 음악을 사랑하시는 박종호 선생님께서 진행을 맡아 주셨습니다.
100석이 넘는 자리를 가득 메워주신 독자여러분들.
풍월당의 강연의 특성상 사진촬영이 여의치 않아 오늘은 보여드릴 사진이 많이 없습니다. ㅠ.ㅠ
대신 강의 내용을 풍성히 담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부>
1부 강연을 진행해주신 백선희 번역가이십니다.
선생님께서는 쿤데라와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요.
소설가 쿤데라
쿤데라는 그를 작가라고 불리기 보다 소설가로 불리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작가는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이 가능하지만 소설가는 오직 작품으로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쿤데라가 즐겨 인용하는 소설가의 정의는 "자기 작품 뒤로 사라기기를 바라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자기 고백 같은 소설은 되지 않아야 하며 서정적인 태도에 대해 쿤데라는 굉장히 경계를 한다고 하네요.
『소설의 기술』속에서 서정성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기도 했습니다.
"서정적인 것이란 자신을 고백하는 주체의 고백이고 서사적인 것은 세계의 객관성을 파악하려는 정열로부터 온다."
또한 서정시를 혁명과 연결지어 이렇게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서정시는 도취이고, 인간은 세상과 보다 쉽게 섞이기 위해 도취한다. 사람들이 갇힌 감옥벽은 시로 도배되었고, 그 벽 앞에서 사람들은 춤췄다."
이 문구는『삶은 다른 곳에』의 한 구절이기도 합니다.
쿤데라는 체코의 역사를 보면 공산주의 체제가 되었을 때, 서정적 맹목에 사로잡혀 같이 이데올로기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은 다 감옥에 가는 것을 눈으로 보고 그 당시 서정시 맹목에 쿤데라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쿤데라는 서정적인 태도를 피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이런 이야기도 했다고 하는데요.
"소설가는 자신의 서정세계의 폐허 위에서 태어난다."
반 서정주의로 개종하는 것은 소설가의 이력에 반드시 들어있어야 할 기본 항목이라고 쿤데라는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쿤데라에게 소설가가 된다는 것은 문학의 한 장르로 글을 쓴다는 것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합니다.
소설가가 된다는 것은 하나의 태도이고, 하나의 입장이고, 하나의 지혜다라고 말했다는데요.
그 태도는 바로 어떤 이념도, 종교도, 도덕도 그런 집단성에 동요되지 않겠다는 의지라고 합니다.
그럼 쿤데라가 말하는 소설이란 무엇일까요?
쿤데라는 『소설의 기술』에서 소설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소설은 작가가 실험적 자아를 통해 실존의 중요한 주제를 끝까지 탐사하는 위대한 산문 형식이다"
"소설만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하라, 그것민이 소설의 유일한 존재 이유다."
브로그가 한 이 말을 쿤데라는 즐겨쓴다고 합니다.
학문이 발달하면서 구체적인 개인의 삶을 망각하고 있는데 유럽에서 인간이 개인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상당부분 소설 덕분이라고 쿤데라는 이야기 합니다.
또 『커튼』에서는 이런 말이 나오는데요.
" 선(先)해석의 커튼을 찢는 예술"
이 세상은 이미 해석이 내려져 있는 세계라는 것이죠. 그것을 찢고 그 너머를 그리는 것이 위대한 소설이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소설은 본질적으로 아이러니의 예술이라고 쿤데라는 이야기 했는데요.
이데올로기, 종교라든지 옳고 그름이 분명하지만 소설은 그것이 분명하지 않아 불확실성, 모호성의 영역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까지는 쿤데라가 말하는 소설론이라고 하면 지금부터는 그의 작품속 세계에 대해 이야기 한 내용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이데올로기의 세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소설이란 함정으로 변해버린 세계 속에 개인의 삶을 탐색하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함정이란 바로 이데올로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데요.
초기에 나온 작품들, 다시 말해 프라하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 농담, 웃음과 망각의 책, 삶은 다른 곳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런 책들은 이데올로기의 세계라고 합니다.
『농담』은 농담이 통하지 않은 공산주의 국가 속에서 농담 한 마디로 개인이 파멸당하는 이야기 입니다.
『웃음과 망각의 책』은 체코의 체제 변화에 대한 망각의 역사 속 이데올로기를 그린 작품이기도 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쿤데라의 작품은 이데올로기와 싸우고 있습니다.
키치의 세계
쿤데라의 작품 속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키치의 세계입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사비나는 전체주의를 싫어하고 저항하는 인물입니다.
그 인물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나의 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키치!"
실재를 가리는 아름다운 가면, 바로 키치를 사비나는 견딜 수가 없어합니다.
키치 너머 실재가 드러날 때 굉장히 감동적이라고 쿤데라는 이야기합니다.
"언제나 눈부신 지성 뒤로, 겸손한 행동 뒤로, 적절한 화장 뒤로 몸을 완벽하게 감추었던 그녀...공포가 푸주한의 칼처럼 그녀의 배를 갈랐던 것.. 그녀의 이성과 두려움, 자부심과 수치심...그 모순들에 그녀의 본질이, 보물이, 금덩이가, 그녀 내면 깊이 묻힌 다이아몬드가 감춰져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순간이 바로 키치가 힘을 잃고 그 이후 감동이 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마골로기의 세계
이데올로기의 세계가 무너지고 이마골로기의 세계가 오는데요.
이 이마골로기라는 말은 불멸이라는 작품에서 처음 신조어로 쓰는 용어로, 이마골로기는 바로 이미지가 지배하는 세계를 일컫는 말입니다.
<불멸>에서는 이마골로기의 세계란 신의 눈을 카메라가 대체한 세상을 말합니다.
"우리 이미지란 겉모습일 뿐이고, 그 뒤에 세상 시선과는 무관한 우리 자아의 실체가 숨어 있을 거라고 믿는 건 천진한 환상. 포착하기도 쉽고 묘사하기도 쉬운 유일한 실체는 타인의 눈에 비친 우리 이미지...나의 이미지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개인의 개별성은 대체 어디에?
그렇다면 덫으로 변한 세상에서 개인의 개별성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쿤데라는 작품 속에서 던지고 있습니다.
『농담』의 주인공은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나의 모습과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과의 혼란을 느낍니다. 도대체 나는 누구였을까? 나는 내 이미지의 그림자이며 내가 그 이미지를 닮지 않은 것은 나의 잘못이 됩니다. 이 역할 저 역할 사이에서 우물쭈물하다 붙잡힌 꼴이 된 루드비크를 통해 개인의 자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도 테레자가 거울을 바라보면서 "내 코가 1mm씩 매일 자란다면 언제쯤 내가 아닌게 될까? 내 얼굴을 안 닮으면 그게 아직도 테레자일까?" 이런 질문을 합니다. 이런 질문들을 보면 쿤데라가 굉장히 철학적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삶은 다른 곳에』에서 야로밀이란 인물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야로밀은 언젠가 자기가 생각하고 느꼈던 것이 정말 자신에게 속하는 것인지 이제 전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마치 모든 생각들이 이 세상에 전부터 확실히 정해진 형태로 늘 있어 왔고 우리는 그저 공공 도서관에서 빌려 오듯 그걸 빌려올 뿐인 것처럼. 하지만 그렇다면 그 자신은 누구란 말인가? 그는 이 자아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연구했지만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며 연구하고 있는 그 자신의 이미지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데카르트는 인간이 이 세계의 주인이고 소유주라고 이야기했지만 쿤데라는 그의 작품을 통해 "인간은 자연의 주인도, 역사의 주인도, 자기 자신의 주인조차 아니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너무 가벼워서 붙들 수 없는 존재들로 개인을 생각했던 쿤데라는 그의 소설 전체의 테마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유머
쿤데라가 굉장히 중요시 했던 것이 바로 유머라고 하는데요.
"유머는 현대정신의 가장 위대한 발명이다 그리고 건드리는 모든 것을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신학자와 철학자들이 전날 짜놓은 양탄자를 밤새 푸는 것이 소설이며, 그것은 유머를 통해서 한다고 쿤데라는 생각했다고 합니다.
진정한 희극의 천재는 알려지지 않았던 희극의 영역을 발굴하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백선희 선생님은 쿤데라는 이 삶의 희극성을 아주 잘 찾아내는 능력을 가졌다고 하셨습니다. 그의 작품을 읽다보면 굉장히 심각한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암울한 세상에서도 유머를 찾아내고, 보통은 진지하게 이야기를 푸는 사랑에서도 찾아내고 있습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분야에서 쿤데라는 샅샅히 찾아서 작품 속에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쿤데라의 글 맛보기로 읊어주신 구절을 함께 해 봅니다.
"괴테 곁을 맴돌던 베티나는 느닷없이 베토벤을 방문했다. 이로써 그녀는 독일인들 가운데 가장 오래도록 멸하지 않을 두 존재, 잘생긴 시인 한 명(괴테)과 못생긴 작곡가(베토벤) 한 명을 알고 지냈으며, 그 둘에게 수작을 걸었다. 이 이중의 불멸에 그녀는 도취했다. 괴테는 이미 늙었고(..) 죽기에 딱 알맞을 만큼 무르익은 상태였다."
구성(소설 건축술)
쿤데라 작품을 보면 구성에 굉장히 신경을 쓴다고 합니다.
쿤데라는 소설의 건축술이 아름다움과 굉장히 연결된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지적으로 매우 까다로운 사색을 소설 속에 통합하는 것, 아름답고 음악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작품의 필수 요소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현대예술에서 소설가가 감행할 수 있는 가장 대담한 혁신 중 하나다."
쿤데라의 소설을 읽어보면 한쪽으로는 이야기가 진행되고 반드시 철학적 성찰이 이어지고 그걸 또 가벼운 유머를 섞어서 이야기 합니다.
또한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쿤데라는 작품 구성에 폴리포니와 변주라는 기법을 끌어들입니다.
항상 다양한 목소리(화자가 한 사람인 경우는 절대로 없고), 다양한 시각, 이질적인 것들의 만나게 해놓습니다.
템포 교대와 정서 배치에도 굉장히 신경을 쓰는데요. 어떤 건 빠르고 어떤 건 느리게 읽히는데 그건 쿤데라의 의도적 흐름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가장 세심하게 신경쓴 작품이 『웃음과 망각의 책』인데, 작가 스스로 이것은 변주 형식의 소설이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웃음과 망각이라는 두가지 테마가 어떻게 변주되는지 살펴보는 것도 쿤데라 작품을 읽는 또하나의 방식이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기 스파르페타라는 쿤데라 전문가는 쿤데라의 소설은 우리를 좀더 깨어있고 우리는 좀더 지적으로 만들어 준다고 이야기 했고, 루이 아라공은 우리가 빵 없이 못 살듯이 쿤데라는 소설 없이 못 산다는 것을 증명해준 소설가라고 말했으며, 쿤데라는 좋은 음악은 우리가 거듭해서 듣듯이 소설도 거듭해서 읽도록 만들어졌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백선희 선생님은 쿤데라 작품이 바로 그렇다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읽고 나도 또 읽고 싶고, 또 읽어도 또 읽어낼 게 있는 그런 작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1부 강연을 마무리 하셨구요.
2부에서는 박종호 선생님께서 쿤데라가 사랑하는 음악을 설명하고 들려주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2부>
지난해 가을 풍월당에서는 체코의 음악가 '야나체크' 특집을 4주 동안 강연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국내에는 그에 대한 책이 단 한권도 나와있는게 없었다고 하네요.
그런데 그 어떤 문헌보다도 쿤데라의 작품에서 야나체크에 대해 아주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고 매우 적확하게 하고 있다고 박종호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이유로 쿤데라에 의해서 야나체크를 소개할 수 밖에 없었던 일화로 강연을 시작해주셨습니다.
ⓒ1989 『프라하의 봄』/필립 카우프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영화화한 '프라하의 봄'은 결론적으로 쿤데라가 좋아하지 않는 영화가 되었지만 이 영화에 쓰인 모든 음악 작품은 쿤데라가 미리 선정한 곡이라고 합니다. 영화 속에 나오는 곡이 바로 야나체크의 '수풀 우거진 오솔길을 따라서' 를 감독에게 줬고 그걸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다고 하네요.
쿤데라의 작품 속에는 음악얘기가 너무 많이 나옵니다. 이 작가는 음악 얘기를 왜 이렇게 많이 할까 하는 독자들에게 박종호 선생님께서 궁금증을 해결해주셨는데요.
쿤데라의 아버지가 피아니스트이자 음악학자였다고 합니다. 게다가 아버지는 바로 야나체크의 제자였다네요.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항상 아버지가 야나체크를 들려주었고 쿤데라의 머릿속은 야나체크가 너무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야나체크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야나체크가 우리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는 변방의 작곡가이기 때문이라고 선생님은 설명하셨는데요. 쿤데라는 야나체크 뿐만 아니라 변방의 소설가 또는 작은 나라의 예술가들에게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쿤데라의 음악은 야나체크를 중심으로 움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전반적인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 좋게 써놓아 누가 이렇게 쓸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고 박종호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베토벤
23세까지 쿤데라는 음악가가 될거라고 생각했지 소설가가 될거라고 상상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쿤데라의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구조라는 것이 음악적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그가 베토벤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몇 군데에서 하고 있는데요. 『불멸』에서 베토벤이 황녀에게 인사하지 않은 이야기를 언급하는데요. 쿤데라는 그 이야기가 가짜든 진짜든 그건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감동만 주면 그 뿐이라는 거죠. 조악한 역사적 진실보다는 위대한 허구가 훨씬 더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 이야기가 재밌는 건 그 행위자가 바로 베토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베토벤은 자기의 음악에 소나타를 굉장히 중요시 했는데, 말년에는 변주에 심취해 있었다고 합니다.
쿤데라의 아버지가 베토벤의 소나타에 대한 논문을 썼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계속해서 아버지와 대화하면서 베토벤이 어떤 걸 했는가를 거의 다 알고 있다고 쿤데라는 자신있게 이야기한다는군요.
변주라는 것은 인간의 마음으로 가는 것이고 소나타는 외면으로 나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베토벤은 말년의 인생의 답을 변주에서 찾으려고 했다고 하네요. 변주는 그 시절 별 볼일 없는 것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변주라는 것은 기교적인 것에 가깝다고 설명합니다. 그런 기교는 누구나 부릴 수 있지만 그것에 영혼을 집어넣은 건 베토벤이라고 합니다. 베토벤의 말년의 변주는 변주가 거듭될 때마다 점점 원래의 테마를 잃어버린다고 하는데요. 이게 바로 베토벤의 특징이라고 합니다. 변주가 너무 많이 되면 원래의 특징을 잃어버리지만, 그것이 진짜 예술이라고 박종호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쿤데라의 수많은 책이 변주 형식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느림』이전의 작품들은 목차를 펼치면 7개의 챕터로 되어 있는게 많습니다. 그 7개는 거의다 변주 형식을 갖고 있거나 상당히 의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주제를 던지면 계속 변주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박종호 선생님께서 소나타와 변주곡을 함께 느껴볼 수 있는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 2악장을 들려주셨는데요.
같은 버전은 아니지만 여러분도 함께 감상해보세요~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가장 만년에 베토벤이 힘을 써서 만든 것이 디아벨리 변주곡이라고 합니다.
작은 테마가 나오고 이어서 33번의 변주가 나오는데 뒤에 가면 앞의 테마와 완전히 다른 곡이 되어 있다고 합니다. 원래의 형식을 잃어버리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라고 하는데요. 쿤데라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것을 잃어버린다." 우리의 삶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어린 시절의 추억도 잊고, 사랑하는 사람도 잊고..실체를 잃어버리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고 말입니다.
디아벨리라는 사람이 음반을 내고 싶어서 작은 테마를 만들어서 다른 작곡가 33명을 섭외하여 변주를 맡겼다고 합니다. 그 중 하나도 베토벤이었다고 하는데요. 베토벤은 33명에 속하고 싶지 않아서 혼자서 33개를 쓰고 다른 33명이 만든 변주곡도 있었다고 하지만 그 곡은 잊혀지고 베토벤의 변주곡만이 명곡으로 남았다고 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이 연주한 곡이지만 처음 테마와 끝 부분의 테마를 비교해서 들어보세요.
거의 원래 테마 흔적이 사라지고 없음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쇤베르크
쿤데라가 꽤 많이 할애하고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이 쇤베르크인데요.
박종호 선생님께서 쿤데라의 책에 나온 음악을 정리해보셨다는데요. 쇤베르크에 대한 이야기를 굉장히 자세하게 하고 있다고 합니다.
조성에 의한 선율은 멜로디가 고갈되는 시점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 때 어떤 사람이 나와서 혁명을 하게 됩니다. 12개의 조성이 똑같이 쓰게 하니 새로운 음악을 만들 수 있게 된거죠. 앞의 조성을 만든 사람이 바흐고, 무조 음악의 혁명을 일으킨 사람이 바로 쇤베르크라고 합니다.
조성의 왕국이라고 한 말은 쿤데라의 아버지가 한 말이고, 공화국이 혁명했다는 이야기는 쿤데라의 이야기 입니다. 본인이 쇤베르크를 설명할때 이런 비유를 썼다고 합니다.
이런 혁명도 그런데 오래 가지는 못 합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독일에서 쫓겨나기 때문인데요. 쇤베르크는 자신의 음악이 유럽 음악의 프롤로그가 될 것이라고 얘기했지만 15년 만에 그의 음악은 끝나면서 유럽음악의 에필로그로 유럽음악의 엔딩이 되어버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스트라빈스키
쿤데라가 스트라빈스키를 굉장히 높게 평가하고 있어서 그의 몇몇 책 중 챕터 하나가 스트라빈스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쿤데라는 스트라빈스키가 현대음악을 연 사람이라고 생각했던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스트라빈스키는 완전히 새로운 음악을 보여줬는데 그것은 이전의 방식을 고수하면서 썼다고 합니다. 쇤베르크는 예전의 방식을 모두 거부한데 반해 스트라빈스키는 모더니즘이라고 하나 재료는 이전에 썼던 바흐나 베토벤, 브람스가 썼던 조성을 그대로 가져다 쓰면서 표현을 달리 했다고 합니다.
그의 대표작 '봄의 제전'의 프랑스에서 초연이 될때는 아무도 그게 음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게 최고의 고전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음악을 듣고, 쿤데라를 읽는 이유는 내가 갖고 있는 것을 깨기 위한 것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을 깨서 더 좋은 것을 보려고 가는 것입니다. 새로운 해석이 있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바로 커튼을 찢어버리는 것이라고 선생님은 설명하셨습니다. 백선희 선생님께서 커튼을 찢고 나오는 것이 소설이라고 말씀하셨지만 그걸 그대로 음악, 모든 예술에 대입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이 바로 커튼을 찢고 새로운 것에 한 발자국 닿아있었던 것입니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함께 들어보세요.
민족음악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와 같은 힘 있고 큰 나라에는 국민음악이라는 말을 쓰지 않지만 체코와 폴란드, 덴마크 같은 변방인 나라의 음악을 얘기할 때는 국민음악이란 말을 쓰고 있고 쿤데라도 이 부분에 대해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고 합니다.
체코의 모든 사람이 국민음악 하면 스메타나를 생각한다고 합니다.
체코의 체제의 변화의 물결 속에서 소련이 쳐들어왔다가 물러가면서 '프라하의 봄'이라는 음악제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음악제의 날은 5월 12일 스메타나의 출생일, 시작하는 곡은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이라고 합니다. 자국민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도 체코하면 스메타나를 떠올릴 정도로 스메타나는 체코의 국민 음악가로서의 위엄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을 함께 들어보세요.
스메타나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했던 야나체크는 65세부터 음악가로 이름을 알렸다고 합니다. 시대적으로 맞지 않은(시대를 앞서간) 음악을 한 작곡가라 동 시대 동료들과도 교류를 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체코 사람들은 스메타나 외에 다른 위인을 몰랐다고 합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였다고 합니다. 스메타나를 추앙하고 야나체크를 욕하는 것. 스메타나는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보면 야나체크의 음악이 체코 오페라의 전부나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야마체크의 음악에 대한 어떠한 연구서 하나가 없고 야나체크 음악을 집대성한 CD 판 하나가 없고 야나체크의 연구서를 모아놓은 전집 하나가 없다고 합니다. 또한 야나체크를 어떻게 알리까 하는 정부의 정책 조차도 아직도 없다고 합니다. 야나체크 알리는 건 정말 쿤데라 혼자서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게 쿤데라가 사랑했고 체코 전체에 가장 위대한 작곡가 야나체크의 <예누파>를 함께 감상해보세요.
음악을 통해서 문학을 접하고, 문학을 통해서 음악에 대해 많이 알게 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는 박종호 선생님의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강연은 마무리 되었습니다.
쿤데라의 작품 세계에 대해 재미나게 알려주신 백선희 선생님과 쿤데라 작품 속 음악에 대해 함께 들려주고 설명해주신 박종호 선생님 두분 모두 너무 수고 많으셨고, 경청해주신 독자여러분께도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 드립니다.
이상으로 '밀란 쿤데라의 문학과 음악' 강연 후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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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작품에 대하여 _ 06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24. 작품에 대하여 _ 07 불멸
25. 작품에 대하여 _ 08 느림
26. 작품에 대하여 _ 09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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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드로에서 쿤데라로, 쿤데라에서 디드로로
백선희(번역가, 덕성여대 강사)
이 작품은 드니 디드로의 소설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에 바치는 오마주이자 변주다. 이 희곡을 쓰게 된 상황과 디드로의 작품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작가가 직접 자세히 밝히고 있다.(작품 서두의 「변주 서설」 참조) 쿤데라가 디드로에게 바치는 경의는 그의 글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그는 디드로를, 특히 소설가 디드로를 좋아한다고 거듭 말하고, 디드로를 “소설 예술 전반기를 구현한 소설가”로 생각한다. 그리고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을 “소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 중 하나”로 꼽고, “지성과 유머와 환상의 향연”이라 칭송하며, 이 작품이 빠진다면 “소설의 역사는 이해될 수 없고 불완전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소설의 규칙이 완전히 무시되고 자유와 즉흥이 검열 없이 한껏 발휘된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을 “세계 문학에서 결코 축약할 수 없는, 다시 쓰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한 소설 두 권 중 하나”(나머지 한 권으로는 『트리스트램 샌디』를 꼽는다.)로 꼽으면서 작가는 이 “천재적인 무질서”를 3막짜리 짧은 희곡으로 압축해 냈다. 그리고 훗날 덧붙인 「변주 서설」에서, 원작을 축약하는 온갖 종류의 ‘다시 쓰기’를 향한 적개심을 드러내며 자신의 작품이 결코 “각색”도 “다시 쓰기”도 아니라고 힘주어 말한다. 이 당당함의 근거는 어디에 있고, 이 작품에 디드로의 무엇이 남고, 쿤데라의 무엇이 담겼는지 궁금해진다.
디드로의 작품에서 작가가 가져온 건 자크와 주인의 여행이라는 토대와 세 가지 사랑(자크의 사랑, 주인의 사랑, 포므레 부인의 사랑) 이야기다. 작가가 이 사랑 이야기들을 어떻게 엮고 어떤 성찰을 담아 변주해 내는지 따라가 보자.
디드로 소설의 도발적인 도입부보다 “더 매혹적인 소설의 시작을 알지 못한다.”라고 쿤데라는 말한다. 배경 없는 인물을 등장시키는 데다 작가가 개입해 독자에게 시비 걸듯 말하는 이 도입부는 디드로 소설의 정수로, 이 작품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막이 오르면 “어디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고,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 속에 있으며 아무런 경계도 없는”(11, 18쪽) 길 위에 선 배경 없는 두 인물이 등장해 ‘우리는 우리가 어디를 가는지 아는가?’라는 철학적 물음을 던진다. 다만 디드로의 작품처럼 작가가 직접 개입해 독자를 도발하고 조롱하는 대신 작가는 희곡 장르에 맞게 관객을 끌어들여 두 주인공이 관객을 도발하는 것으로 변주한다.
작품 내내 작가는 디드로의 작품에서 반복되는 핵심적인 말(“저 높은 곳에 씌어 있다” 등)을 후렴구처럼 반복하고, 작가를 찾아온 시인 일화와 ‘칼과 칼집’ 우화를 차용해 디드로의 유희를 이어받으면서 이 이야기가 디드로 작품에 대한 변주임을 환기한다. 그러나 이야기의 구성을 완전히 새롭게 짜고 인물들의 대사에 자신만의 성찰을 담아낸다.
작가를 찾아온 시인 일화에 실린 두 작가의 생각은 확연하게 다르다. 디드로의 소설에서는 시인을 만난 작가가 시인에게 가난한지 묻고는 먼저 돈을 벌고 나서 시를 쓰라고 조언하는 반면, 쿤데라의 희곡에서는 오히려 “형편없는” 시인이 작가에게 일장연설을 토해 낸다. 대중이 “형편없는 시인들의 집합”이고, “인류가 형편없는 시를 미친 듯이 좋아하기 때문에” 형편없는 시인인 자신이야말로 언젠가는 인정받는 위대한 시인이될 거라고 말하는 것이다.
칼과 칼집 우화를 끌어들이는 부분에서는 기발한 구성이 돋보인다. 디드로의 작품에서는 끼어든 여담에 불과한 이 우화를 작가는 아르시 후작이 신앙심 깊은 두 숙녀의 환심을 사려고 얘기하는 시메옹 성자 얘기와 대비한다.(2막 7장) 부도덕한 우화를 얘기하는 자크와 성스러운 성자 얘기를 하는 후작의 상반된 대사가 번갈아 배치되면서 두 이야기는 일화 차원을 넘어서고 디드로의 작품에 없는 희극적 효과를 창출한다.
구성의 독창성이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네 인물의 교차대화에서다. 1막 5장에서 쥐스틴과 아들 비그르, 생투앙과 주인이 각자 나누는 대화 장면에서 작가는 대화 상대를 어긋나게 교차해 구성한다. 엇갈린 대사가 엇갈린 채로 이해되게 만든 구성의 유희가 작품에 재미를 부여하고, 주인과 아들 비그르의 어리숙함이 닮고 쥐스틴과 생투앙의 교활함이 닮았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인물들의 이중 연출도 쿤데라가 고안해 낸 독특한 구성이다. 쿤데라의 작품에서는 포므레 후작 부인 얘기를 들려주는 여인숙 여주인이 포므레 부인의 역할을 겸하고, 자크가 아르시 후작 역할을 떠맡기도 한다. 무대를 앞쪽과 뒤쪽으로 나누어 앞쪽(현재)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물(여주인)이 무대 뒤쪽(과거)으로 이동해 자기 이야기 속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다. 이 독특한 연출은 인물들의 사랑 이야기가 결국엔 같은 이야기의 변주임을 말해 준다.
인물들도 닮고 인물들의 사랑 이야기도 모두 닮았으며, 인간사가 결국 반복의 역사라는 생각을 작가는 거듭 부각한다. 포므레 부인은 생투앙의 모사품에 지나지 않고, 주인은 아들 비그르의 다른 버전에 불과하고, 비그르는 잘 속아 넘어가는 후작과 비슷한 인간이고, 쥐스틴과 아가트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며, 이 생각은 반복과 다시쓰기에 대한 반감과 맞물린다.
주인 너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잖느냐!
자크 제가요? 반복을 해요? 나리, 자기 말을 반복한다는 말보다 더한 모욕은 없습니다.(15, 110쪽)
변주 서설에서 작가가 “언젠가는 과거의 문화 전체가 완전히 다시 쓰일 테고, 그 다시 쓰기 뒤로 완전히 잊히고 말리라”는 말로써 이 시대의 ‘리더스 다이제스트’ 경향에 대해 표명하는 우려와 반감은 이 작품의 주된 메시지이기도 하다.(“이미 씌어 있는 것을 감히 다시 쓰는 자는 모조리 꺼져 버릴지다! 꼬챙이에 꿰어져 불태워져 버릴지다! 거세당하고 귀가 잘려 버릴지다!”(15, 106~107쪽)) 두 주인공이 그들 이야기를 다시 쓴 사람(쿤데라)까지 들먹이며 세상에 만연한 다시 쓰기에 대한 반감을 거듭 드러내게 만든 것도 쿤데라의 유머요 성찰이다.
자크 나리, 글을 다시 쓰는 사람들은 절대 불태워지지 않고, 모두가 그들을 믿습니다.
주인 우리 이야기를 다시 쓴 사람을 사람들이 믿는다고 생각하느냐?
우리가 진짜 어떤 사람인지 보려고 원래 ‘텍스트’를 보지 않을거라고 생각하느냐?
자크 나리, 사람들은 우리 이야기 말고도 많은 것들을 다시 썼습니다.
이 아래 세상에서 일어난 모든 것은 이미 수백 번 다시 씌었고,
실제로 일어난 것을 확인할 생각은 누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들의 이야기가 너무 자주 쓰이는 바람에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더는 알지 못합니다.(15, 109쪽)
작가가 끊임없이 끼어들어 독자에게 시비를 거는 디드로 소설의 파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쿤데라의 작품에서는 두 주인공이 자신들을 창조한 작가를 “적어도 글재주는 있는 사람”인지 의심하기도 하고, “바보”요 “형편없는 시인들의 왕”이라고 모독하기도 한다.
“가벼운 형식과 무거운 주제의 결합”, “지극히 무거운 문제를 지극히 가벼운 형식과 결합하는 것”(11, 138쪽)은 쿤데라가 천착해 온 문제다. 특히 이 작품에서 그 결합이 돋보인다. 작가는 철학적 성찰을 줄곧 자유분방한 가벼운 이야기들과 뒤섞어 진지함의 무게를 덜어 낸다. 이를테면 엉덩이 큰 여자에 대한 주인의 집요한 성적 환상과 진실에 대한 반어적 담론을 엮어 웃음과 성찰을 결합시키고,(“쓸데없는 진실은 절대 이야기하지 말아야 한다.” “쓸데없는 진실보다 더 멍청한 걸 전 알지 못합니다.”) 자크가 친구의 여자를 가로챈 얘기를 하는 장면에서도 자크의 대사에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가볍게 담는다.(“감정을 제멋대로 아무렇게나 허비하는 사람들은 막상 필요할 때 쓰려고 보면 남아 있는 게 없죠.”)
결말의 분위기는 뚜렷한 차이를 드러낸다. 디드로의 작품이 유쾌하게 끝맺는 반면 쿤데라의 결말은 쓸쓸하고 황량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두 인물은 여전히 길 위에 서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막대한 어둠을 향해” 앞으로 걸어 나간다. 이 결말에는 자신의 시대를 “덫이 되어 버린 세계”라고 진단하는 20세기 작가의 암울한 비전은 물론, 더 이상 작품을 출간하지 못할 처지에 놓였던 작가가 작가 인생에 대한 “작별 인사”처럼 이 작품을 썼을 당시의 참담했던 개인적 상황도 반영되어 있다.
쿤데라는 소설의 무한한 유희적 가능성을 발견하고 소설의 진화에 새로운 길을 연 스턴의 ‘여행 초대’를 디드로만이 따랐다고 말한다. 그리고 디드로의 소설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의 천재성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보고 그 유희 초대에 응한 사람이 바로 쿤데라다. 디드로가 던진 유희에 작가는 이 작품으로 화답했다. 18세기 소설가의 거침없는 유희 정신과 테마를 이어받아 20세기 작가가 다른 장르의 새로운 유희 가능성을 모색하고 자신만의 성찰을 담아낸 것이 이 희곡이다. 디드로가 연 지평에 쿤데라는 새로운 차원을 부여했다. 쿤데라의 창조적 ‘읽기’에 의해 디드로의 소설이 새롭게 탄생한 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쿤데라의 이 작품을 읽고 나서는 디드로의 작품을 예전처럼 읽을 수 없으니 말이다. 보르헤스도 말하지 않았는가. “모든 작가는 자신의 선구자들을 창조
한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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