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에 대하여 _ 07 불멸

비평

07 불멸
『불멸』을 읽는 또 다른 방법

김병욱(성균관대 겸임 교수)

    

     『불멸』은 어떤 소설인가? 아녜스와 로라라는 두 자매의 경쟁 관계에 대한 이야기와, 괴테와 베티나 폰 아르님 사이의 오해에 대한 이야기인가? 미디어 권력의 자의적인 폭력에 맞서는 라디오 아나운서와, 모자도 벗지 않은 채 뒷짐을 지고 당당히 황녀 일행을 대면한 베토벤의 행동에 대한 이야기인가? 도시를 오염시키는 자동차 무리에 대한 증오심에서 밤마다 타이어에 구멍을 내며 돌아다니는 대학 교수 이야기인가? 루벤스라는 별명을 가진 남자의 성생활과 릴케, 엘뤼아르, 로맹 롤랑 같은 시인들의 ‘영원한 여성’ 숭배에 대한 이야기인가? 점성학의 은유적 가치에 대한 이야기, 괴테와 헤밍웨이의 사후 만남에 대한 이야기인가? 에로티시즘의 필수 요소인 수줍음의 복권에 대한 이야기, 팡테옹에 묻힌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인가? 러시아인들에게서 두드러지는 ‘영혼의 이상 팽창’에 대한 이야기인가? ……사실 이 작품에서 다뤄지는 주제들의 다양성과 이질성은 일일이 다 열거조차 하기 힘들다. 딱히 중심 줄거리라 할 만한 것 없이, 내용과 색깔이 다른 여러 갈래의 이야기들이 나란히 펼쳐지는 작품이기에,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이 소설이 어떤 소설인지 요약이 불가능해 다른 사람에게 소설 내용을 이야기해 줄 수도 없다. 그렇다면 쿤데라의 작품들 중에서 ‘구조적으로 가장 복잡한’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 소설을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묘하게도 『불멸』은 어떤 소설인가 하는 우리의 물음은 이렇듯 ‘읽기’ 문제로 연결되며, 그리고 ‘읽기’ 문제는 곧바로 우리를 이 작품의 ‘구성’ 문제로 인도한다. ‘『불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물음은, ‘일견서로 무관해 보이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이 소설의 이야기 조각들은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작품을 구성하는가?’라는 물음으로 직결되는 것이다.

     프랑스 문학 평론가 기 스카르페타는 쿤데라가 이 작품에서 선보이는 “대단히 엄밀하고 유연한” 구성 예술을 음악 작곡에 빗대어 설명한다. 그는 『불멸』에 쓰인 글쓰기 원칙으로 네 가지를 강조하는데, 그 첫째는 ‘유기적 단일성’에 종속되지 않는 시퀀스들의 상대적 자립성이다. 그래서 이 작품의 이야기 조각들은 마치 소나타나 심포니를 구성하는 악장들처럼, 논리적이거나 연대순으로 연쇄되는 것과 무관하게 하나씩 따로 음미될 수 있다는 얘기다. 둘째는, ‘사건의 일치’를 의도적으로 교란하여 중심적인 단일 줄거리 대신 여러 목소리 혹은 여러 ‘줄거리 선들’의 짜임으로, 다시 말해 호모포니 대신 폴리포니로, 단순 멜로디 대신 대위법으로 소설을 구성한다는 점이다. 셋째는, 전통 소설의 인과관계(소설의 인접한 두 시퀀스 간의 연속과 결과 관계를 설립하는 원칙)를 전복한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서 연대는 끊임없이 분해되고 재배치되며 ‘지연된 인과 관계’(혹은 불연속적인 모티프 전개)의 논리에 따라 가지를 뻗는데, 음악에서는 이런 구성을 ‘푸가’라고 한다.(예를 들면 고속도로를 걸어가다 교통사고를 일으키는 아가씨 에피소드가 그렇다. 이 모티프는 소설 초반에는 사소한 디테일, 즉 라디오의 두 광고 사이에 흘러나오는 토막 뉴스로 나타났다가, 뒤에 가서 그런 행동의 동기를 상상하는 화자의 성찰 대상이 되며, 다시 얼마 후 마치 화자가 그녀 생각과 느낌 속으로 침투한 양 내부에서 서술되다가, 결국에는 단순 에피소드가 아니라 소설을 대단원으로 이끄는 대파란, 즉 아녜스의 죽음이라는 사건의 중요한 매듭이 되는 식으로 불연속적인 전개를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상이한 여러 ‘이야기 선’들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몇몇 주요 테마들(및 부속 모티프들)의 존재다. 여러 갈래로 전개되는 이야기들을 접합해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이것들이다. 즉 사건의 일치에 의한 단일화가 아니라, 테마와 모티프 장치에 의한 단일화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소설을 상이한 두 가지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우선 우리의 독서 습관대로, 여느 소설을 읽듯 ‘수평적으로’ 이 작품을 읽어나갈 수 있다. 말하자면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시퀀스들의 연쇄를 그대로 따라가며 순차적으로 읽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만 읽고 나면 마치 함정에 빠진 듯한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쿤데라의 작품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이 느끼는 난해함은 대개 그의 구성 예술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함정이 주는 즐거움도 있으니 이렇게 읽어도 나쁠 것은 없다. 더욱이 소설의 시퀀스들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읽는 즐거움을 가득 안겨 주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 작품을 다르게 읽을 수도 있다. 말하자면 음악적으로, ‘수직적으로’ 읽어 볼 수 있다. 목소리들의 폴리포니에, 변주들의 유희에, 분산과 접합의 교묘한 변증법에 유의하여 이 작품을 읽어 가면서 쿤데라가 정한 ‘게임의 규칙들’을 조금씩 발견해 나가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 보자. 『불멸』은 이전에 발표된 그의 다른 소설들처럼 일곱 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 개의 주된 ‘이야기 선(線)’이 번갈아 가며 이 일곱 부를 수평적으로 지배한다. 첫 번째 선은 아녜스 이야기다. 동생 로라나 남편 폴과의 갈등 관계를 보여 주는 이 이야기에는 폴의 이야기가 대위법적으로 전개되며, 딸 브리지트와 아베나리우스 교수가 보조 인물로 등장한다. 이 선은 소설의 홀수 부들(1, 3, 5, 7)을 지배한다. 두 번째 ‘이야기 선’은 괴테와 베티나 폰 아르님의 관계에 대한 성찰로서, 여기에는 베토벤이나 헤밍웨이 같은 보조 인물들이 등장한다. 2부와 4부를 지배하는 이 선은 홀수 부들과는 달리 역사적이고 논증적인 음색이 도드라진다. 그리고 위의 둘과는 확연히 다른 세 번째 이야기 선, 즉루벤스라는 별명을 가진 남자의 성생활 이야기 선이 6부를 지배한다.
     수평적으로만 보면 이 소설에서는 내레이션이 다른 이 세 선이 부를 달리 하며 번갈아 펼쳐질 뿐이지만, 수직적으로 읽으면 이 선들을 간간이 연결해 주는 모티프들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첫 번째 선의 상황이나 등장인물이 두 번째 선에서 환기되기도 하고, 어떤 테마들은 세 선을 모두 관통하기도 한다. 예컨대 첫 번째 선의 로라와 두 번째 선의 베티나는 ‘불멸에 대한 욕망의 몸짓’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연결되고, ‘깨진 안경’이라는 에피소드는 격렬한 절교 장면 둘(베티나에게 화가 난 괴테 부인 크리스티아네가 그녀의 안경을 깨트리는 장면과, 아녜스가 로라의 안경을 깨트리는 장면)을 두 세기라는 시차를 뛰어넘어 연결하며, 젖가슴 애무 모티프(‘수줍음’의 에로티시즘에 딸린 모티프)는 두 번째 이야기 선의 괴테-베티나 관련 에피소드와 세 번째 선의 루벤스-아녜스 관련 에피소드를 연결한다. 어디 이것들뿐이겠는가. 보기에 따라서는 이 작품 전체에 이러한 반향들이 가득 울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불멸』을 수평적으로만 읽을 게 아니라, 이렇게 수직적으로 읽으면서 테마와 그 변주들(메아리들)을 부단히 음미해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직 종횡으로 여러 번 되풀이해서 읽어야만 이 작품의 참맛을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불멸』의 중심 주제는 단연코 ‘이미지의 지배’다. 사실 『불멸』은 전작(前作)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6부, 즉 이데올로기들이 지배하는 시대가 끝나고 키치가 빚어낸 이미지들이 지배하는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대행진」에서 예고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들은 역사에 속하지만, 이마골로기의 통치는 역사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라고 이 작품의 화자는 말한다. 이마골로기들이 지배하는 세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실재가 이미지에 자리를 내어주고 영원히 뒤로 물러나 버린 세계, 대행진을 이끈 ‘신의 눈’이 ‘카메라의 눈’으로 결정적으로 대체되어 버린 세계, 그리하여 자신의 ‘이미지’를 최대 다수의 대중에게 먹이로 제공하는 일이 일상적 의무가 되어 버린 세계다. 이러한 세계에서 인간이란 자신의 진정한 ‘자아’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자신의 이미지와 다르지 않은” 존재다. 각자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나타낸다고 생각하는 이런저런 모든 얼굴들은 어떤 “미의 마스크”, 어떤 “자아의 이미지”와 다르지 않으며, 시선(視線)은 사람들에게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난 어떤 이미지(일종의 홍보용 정체성)를 제의하면서, 각자 그 이미지에 맞춰 살 것을 강요한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이미지의 이러한 지배를 거부하고 다르게 존재할 가능성이 남아 있는가? ‘얼굴 없는 세계’를 꿈꾸는 이 작품의 여주인공 아녜스는 바로 이 물음에서 탄생한 것 같다. 그런 세계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자신의 자아로 존재하지 않아야 함을, 비존재로 존재해야 함을 의미한다.(‘작별’의 화신 아녜스의 이 아름다운 독백을 다시 한 번 음미해보자. “산다는 것, 거기에는 어떤 행복도 없다. 산다는 것, 그것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고통스러운 자아를 나르는 일일 뿐이다. 하지만 존재, 존재한다는 것은 행복이다.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자신을 샘으로, 온 우주가 따뜻한 비처럼 내려와 들어가는 돌 수반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사실 이 작품 곳곳에서 우리는, 이미지의 지배가 어떻게 우리의 ‘구체적인’ 삶을 소거하는지를 통찰하는 쿤데라의 예리한 시선과 맞닥뜨린다. 그 시선에는 전염력이 있다. 이 작품을 읽고 나면 주변 세계를 이전처럼 볼 수 없게 되는 이유는 그 시선에 전염되는 탓이다. 기 스카르페타는, 쿤데라의 소설은 “우리를 좀 더 깨어 있게 하고 좀 더 똑똑하게 만드는” 소설이라면서 그것이 그가 소설 작품에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라고 덧붙인다. 동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