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에 대하여 _ 08 느림

비평

08 느림
‘검은 유머’를 숨긴 유희적 광시곡


김병욱(성균관대 겸임 교수)


     『느림』은 쿤데라가 체코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쓴 첫 소설이다. 언어가 바뀌면서 작품 형식도 완전히 달라졌다. 그가 오랫동안 애용해 온 일곱 부 구성 형식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그의 말을 직접 들어 보자. “『불멸』을 발표하면서 나는 첫 소설 때부터 다양하게 발전시켜 온 내 소설 형식(일곱 부 구성)의 모든 가능성을 소진했다. 그러자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졌다. 내가 소설가로서의 길 끝에 도달한 것이거나 아니면 앞으로 전혀 다른 새로운 길을 발견하거나 둘 중 하나라는 사실이 말이다. 프랑스어로 글을 써야겠다는 주체할 수 없는 욕망도 아마 거기에서 비롯된 것 같다. 완전히 다른 곳에,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길에 서 보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이다.”(《게임의 규칙》, 1995년 5월호) 요컨대 이 작품은 그가 길 끝에서 찾아낸 새로운 길이요, 그의 새로운 시작, 그의 새로운 탄생을 알리는 작품이라는 얘기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달라진 걸까? 이 작품이 발표되었을 때 그를 서면으로 인터뷰한 기 스카르페타는 그 변화를 이렇게 요약한다. “언어가 프랑스어로 바뀌면서 쿤데라는 다른 어조에, 다른 세계에, 소설 예술의 새로운 차원에 도달한 것 같다. 어떤 자유로움을 획득했다고나 할까. 한결 경쾌하고 환상적이며, 즉흥에 훨씬 더 많은 자리를 내주는 것 같다. 이전 소설들의 건축적 엄격함을 버리고, 랩소디〔狂詩曲〕적인 서사 기법을 택한 것이 그 징표다.”(「쿤데라의 희유곡」, 『소설의 황금시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récit)와 담론(discours)이라는 두 가지 음역(音域)을 합쳐 꼬아 나가는 그의 독특한 소설 기법까지 달라진 것은 아니다. 먼저 전자부터 일별해 보자. 『느림』은 서로 무관한 듯이 보이는 여러 이야기가 나란히 펼쳐지다가 결국 하나로 엮이며 한 편의 코미디를 이루는 소설이다. 대중 앞에서 수모를 당하고는 비서로 일하는 쥘리를 유혹함으로써 복수하려 하는 아나키스트 성향의 청년 뱅상 이야기와, 예전에 잠시 사귀었던 임마쿨라타라는 방송 기자에게 끊임없이 쫓겨 다니며 괴롭힘 당하는 스타 지식인 베르크 이야기, 그리고 러시아의 체코 침공 때 박해받은 체코 과학자로서 뭇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나 조롱당하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체호르집스키 이야기가 그렇다. 이 등장인물들은 모두 학술 대회가 열리는 어느 호텔(옛날에 성이었던 호텔로, 화자도 이곳에 투숙하고 있다.)에 모이는데, 그들 이야기를 하나로 묶는 ‘매듭’ 구실을 하는 곳이 바로 호텔 수영장이다. 이곳에서 뱅상은 욕망을 이루지 못하고 쥘리를 놓치며, 임마쿨라타는 물에 빠져 죽으려다 애인 손에 구출되고, 체호르집스키는 그들 일에 끼어들다 애인과의 다툼 끝에 마지막 하나 남은 진짜 이를 잃게 된다. 이렇게 소설이 한바탕 소극으로 막을 내리기까지, 화자의 입을 통해 발설되는 많은 성찰(담론)들이 곳곳에서 이 유희적인 이야기와 뒤얽힌다. 느림에 대한, 쾌락주의에 대한, 무례함에 대한, 춤꾼들에 대한, 우리 모두에게 내면화된 ‘카메라의 시선’에 대한, 알몸에 대한, 발기 환상에 대한 성찰 등등.
     그런데 이 소설에는 위의 둘과는 음역이 또 다른, 마치 소설 속 소설같은 또 하나의 이야기가 첫 번째 이야기를 조명하는 먼 배경처럼 삽입되어 있다. 이 소설이 해설을 곁들여 전하는 비방 드농의 18세기 소설 「내일은 없다」다. 여기에 등장하는 젊은 기사는 T 부인과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 자신이 조종당했음을 깨닫는다. 말하자면 그녀 남편의 의심을 피하는 도구로, 관계가 좀 더 지속적이고 돈독한 다른 누군가와의 외도를 숨기기 위한 도구로 이용되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하지만 이 완벽한 행복의 순간이 T 부인에게도 단지 그런 계책에 불과한 것만은 아니었으리라는 가정도 배제되지 않는다.
     소설 속에 삽입된 이 이야기가 두 시대를 대면시키는 효과를 낸다는 점에서(화자는 소설 말미에서 기사와 뱅상을 실제로 대면시키기까지 한다.) 18세기는 이 시대의 시금석으로 등장한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중에서도, 모든 것이 언제라도 유포될 수 있는 라클로의 세계가 아니라, 비밀 엄수가 최고 가치로 여겨지는 비방 드농의 세계다. 『느림』은 이 18세기 세계와 오늘의 세계를 마치 양립 불가능한 두 패러다임인 양 대립해 나간다. 전자가 심리보다는 세련된 전략과 술책으로 쾌락을 음미하고 즐기며 추구하는 시대라면, 후자는 감정적 혼란과 사랑의 이상화를 통해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강화하고 고양하고자 하는 시대다. 전자가 육체적 모험에 ‘형식’을 부여할 줄 아는, 즉 예술을 추구하는 시대라면, 후자는 충동적이고 돌발적이고 불합리하고 무질서한 반응을 좇는 시대다. 육체적 관능을 그 자체로 즐기는 18세기 기사와는 달리, 오늘날의 뱅상은 쾌락(섹스)을, 삶을 그 자체로 향유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기 스카르페타는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이 보이는 행동이 ‘액션’이라기보다는 ‘리액션’에 가깝다는 점을 지적한다.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의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것들이 모두 남에게서 받은 모욕에 복수하려는 충동적인 반응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자기보다 좀 더 기민하고 꾀바른 춤꾼에게 패한 베르크는 더 한층 강도 높은 인도주의적 행동으로 자신의 구겨진 이미지를 회복하고자 하고, 베르크에게 차인 임마쿨라타는 똑같은 모욕을 애인에게 가함으로써 복수하며, 정장 차림 청년과의 설전에서 공개적으로 망신당한 뱅상은 자신의 남성다움과 유혹 능력을 과시함으로써 이 모욕을 액땜하려 하고, 체호르집스키 역시 자신의 거듭된 실수에 대응하기에 바쁘다. 누군가가 자신을 조롱하는 기미만 보이면 박해받던 시절의 강제노동 덕에 얻게 된 강인한 육체를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이다. 모두가 마치 어떤 덫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사람들같다. 덫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지만 그럴수록 더 고약한 덫 속으로 다시 떨어진다. 대체 무엇이 그들을 옭아매고 있는가? 그들로 하여금 그렇듯 허겁지겁 리액션을 취하게 하는 동기는 무엇인가? 분명 그것은 끊임없이 실추되는 자신들의 이미지를 얼른 회복해야겠다는 강박관념이다. 말하자면 어떤 이상화된 이미지가 그들을 원격 조종하면서 그들의 행동을 리액션으로 만들고, 그들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의 삶을 향유하는 주체가 아니라 예정된 어떤 이미지를 흉내 내는 시뮬라크르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가, 주체성을 상실하고 자기 이미지의 노예가 되어 행동하는 ‘존재의 행복한 춤꾼들’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명저 『시뮬라시옹』에서, 오늘날을 시뮬라크르들의 시대로 규정하면서 인간의 미래에 대해 매우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는다. 과거, 신이 죽었을 때는 신의 죽음을 알릴 니체가 있었고 신의 죽음으로부터 연유하는 허무주의가 세기말의 음울하고 음침한 색깔을 띠었으나, 이제 신마저도 죽은 것이 아니라 파생실재가 되어 버린 우리 시대의 허무주의는, 그러한 역사적 허무주의 형태들보다도 훨씬 근본적이고 위기적인 투명성의 허무주의라고 말이다.

     사실 아녜스의 죽음 이후 쿤데라의 작품들이 펼쳐 보이는 오늘날의 세계와 인간에 대한 비전 역시 적잖이 비관적이다. 시뮬라크르화한 인물의 전형 베르크라든가 뱅상과 쥘리의 ‘섹스 시뮬레이션’ 등, ‘존재의 행복한 춤꾼’으로 전락한 현대인의 존재 양식을 18세기 존재 양식과 대비한 이 작품은 물론이요, 소설 구성 자체를 통해 현실과 꿈의 경계를 지워 버린 『정체성』, 그리고 귀향 불능과 존재의 기반 상실을 다시 한 번 탐색하는 『향수』 등의 후속 작품들을 통해, 쿤데라는 부단히 이런 물음들을 제기하고 있는 것 같다. 아직도 우리에게 온전히 남아 있는 구체적 생활 세계(인간 실존의 장)가 존재하는가? 나와 나의 이미지, 현실과 꿈의 경계가 존재하기나 하는가? 이 시뮬라크르의 시대에, 소설에게 남아 있는 새로운 탐구 가능성은 무엇인가? ……갈수록 쿤데라의 호흡이 짧아지고 문장이 간결해지는 이유도 아마 오늘날의 이러한 존재 현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개인’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된 위대한 서사 형식으로서의 소설 예술이 ‘개인’의 시뮬라크르화와 더불어 어떤 종착점에 이르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다. 쿤데라는 이 희유(嬉遊)적인 작품을 있는 그대로 즐겨 주길 바라지만, 읽으면서 절로 쓴웃음을 머금게 되는 것은 그래서다. 아무래도 이 작품은 자유롭고 경쾌한 외양 속에 몹시 ‘검은’ 유머를 숨긴, 21세기를 위한 광시곡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