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에 대하여 _ 04 이별의 왈츠

비평

04 이별의 왈츠
불륜의 통속극에서 자아 발견의  실존적 드라마로


권은미(이화여대 교수)

 

     가을이 시작되는 어느 월요일 오후, 체코의 서유럽 국경 근처 한 온천 도시에서 걸려 온 루제나의 전화 한 통으로 사건은 시작된다. 불임 치료로 유명해 온통 여자들로 우글대는 그곳 온천장에서 벗어나기만을 고대하는 젊고 육감적인 간호사 루제나. 두 달 전 이곳으로 공연 왔던 수도의 유명한 트럼펫 주자인 클리마와 하룻밤을 보낸 그녀에게 임신이라는 요행이 찾아왔다. 물론 연하 남자 친구가 있으나, 그 아이가 클리마의 아이일 거라는 희망은 확신으로 변한다. 하지만 바람둥이 클리마에게 바람은, 아름다움의 화신인 아내 카밀라에 대한 극단적인 사랑을 역설적으로 확인하는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클리마는 임신 사실을 알려 온 루제나를 떼어 버릴 궁리를 하며 전전긍긍한다. 한편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에서 다른 여자의 냄새를 맡는 카밀라는 질투로 괴로워하나 이를 드러낼 수도 없어 더욱 고통스럽다. 신경이 예민한 클리마는 당장 루제나를 만나 해결을 보지 않고서는 병이 날 것 같다. 화요일 아침, 아내에게 거짓 핑계를 대고 온천 도시에 도착한 클리마는 루제나에게 거짓 사랑을 고백하고 그 사랑의 이름으로 낙태를 설득하는 작전을 펼친다. 불임 치료 온천장에서 낙태를 강요해야 하는 상황부터 아이러니컬하다.
     이 소설은 작가가 말했듯이 ‘5부로 구성된 희극’적 구성을 통해, 연극의 특성인 공간과 시간의 한정, 그리고 곁가지 없는 단일한 이야기의 통일성을 보여 준다. 임신을 알리는 루제나의 전화 목소리에 클리마의 대꾸와 카밀라의 질투로 시작된 통속적인 불륜의 삼중주는 월요일 오후부터 금요일 저녁까지 단 닷새 동안 온천 도시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다른 목소리가 하나씩 덧붙으며 퍼져 나가는 7인조 실내악으로 발전된다. 정확하게 바톤을 이어받으며 등장하는 인물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며 서로 대꾸하고 화답하는 이야기 전개 방식은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정교하다.

 

     두 달 전 클리마와 루제나를 엮게 된 하룻밤 파티를 열었던 베르틀레프, 그는 고향으로 돌아온 미국 국적의 부유한 사업가다. 기독교적 성자의 모습을 보여 주나 과도한 자비심과 타인에 대한 사랑을 엉뚱하게도 여인에 대한 섹스로 베푸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불임 치료 전문 의사 슈크레타는 아마추어 드럼 주자이자 몽상가다. 조국에 아무리 불쾌한 점이 많다 해도 “우리는 이 나라에 대해 책임이 있다.”라고 말하는 그는 공허한 정치가 아니라 의학을 통해, 즉 자기 정액을 불임 여성에게 주입함으로써 진짜 피를 나누는 형제들의 나라를 만들겠다는 기상천외한 몽상을 실현시키는 괴짜다. 이 두 인물이 내는 음색은 이야기를 유쾌하고 환상적으로 만들어 줄 뿐 아니라 ‘인간이란 태어날 가치가 있는가’, ‘정치란 무엇인가’, ‘인간의 삶을 추동하는 욕망의 실체는 무엇인가’ 등 철학적 질문을 유도하는 저음의 콘트라베이스와 같다. 클리마, 루제나, 카밀라와 함께 날카로운 핵심 멜로디를 이끌어 갈 사람으로 수요일 아침, 온천 도시에 야쿠프가 도착하고 그와 함께 그의 피후견인인 올가가 합류한다. 야쿠프는 정치 투쟁으로 평생을 행동의 핵심부에서 살았노라 자부하는 신념의 사나이다. 동지로부터 배신도 당하고 감옥에도 다녀왔으며 이젠 출국 허가를 얻어 영원히 이 나라와 작별하려고 한다. 그 전에 파란 독약을, 자신의 삶과 죽음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인간 존엄의 보증서 마냥 엄숙하게 품고 다니던 그 독약을 그 제조자인 슈크레타 의사에게 돌려주려고, 또 내심 위대한 행위라 여기며 돌봐 왔던 배신자 동지의 딸 올가와 작별을 하려고 이 온천 도시에 들른 것이다. 올가는 자신의 아버지, 즉 정치 투쟁 과정에서 처형당했으나 이젠 복권된 자기 아버지의 진실에 회의를 품은 지적인 여성이다. 육체는 볼품이 없으나 섬세한 자의식의 소유자로, 타인뿐 아니라 자신의 모든 행위를 차갑게 응시하며 상황을 주도하고자 하는 은밀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카밀라는 남편의 진실을 알기위해, 즉 그의 부정을 확인하기 위해 목요일 이곳 온천 도시로 와서 합류하게 된다. 이제 모든 등장인물들이 무대 전면에 등장했다. 루제나의 애인 프란티셰크와 영화인 그룹은 우스꽝스럽고도 처절한 이 멜로디를 더 자극적으로 돋보이게 하는 장식음이라고나 할까?

 

     목요일, 인간 존엄의 보증서 같았던 야쿠프의 독약이 우연히 루제나의 진정제 약통 속으로 들어가면서 불륜의 통속극은 ‘동기 없는 살인’이라는 실존적이고 철학적인 드라마로 심화된다. 이 소설에 대한 한 해설은 이 소설의 핵심 테마로 ‘속임수’를 들고 있다. 서로에 대한 속임수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속임수가 핵심 주제라는 것이다.
     클리마와 그의 아내 카밀라, 클리마와 루제나, 야쿠프와 올가는 서로 속이고 속으며 또 속는 척한다. 또 독약도 가짜가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가장 심각한 속임수는 자신에 대한 속임수, 즉 자신에 대한 착각과 오해로, 이는 일상에서는 결코 깨달을 수 없는 가장 은밀한 속임수다. 쿤데라는 소설의 존재 이유란 숨겨져 있던 ‘인간 본성’의 한 단면을 발견하는 것, 이런저런 예외적인 우연의 조합인 ‘상황의 정수(精髓)’가 없었더라면 결코 만날 수 없는 ‘실존적 성찰과 본질의 발견’이라고 그의 소설론에서 수차례 반복했다. 개 사냥이라는 상징적 에피소드로 암시된 이 소설의 정치적, 역사적 분위기는 그 자체로서의 의미보다는 인간 실존의 비밀을 드러낼 수 있도록 밀도 있게 집약된 첨예한 ‘상황의 정수’로서의 틀로 읽혀야 할 것이다.

     낙태 문제와 독약 사건을 중심으로 사랑과 질투, 권태와 탈출, 신념과 좌절, 죽음과 삶의 이야기가 교묘하게 엮이면서 핵심 인물들은 자기 존재의 근원적인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 이 문제들이 서로 충돌하며 마치 폭죽이 터지듯이 파열음을 내며 대단원의 파국이 시작된다. 속임수의 세계로부터 자기 발견과 자기 폭로로 나아가는 순간이다. 따라서 목요일 후반부터는 ‘깨달았다’는 표현이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무지가 철철 넘치던’ 루제나는 베르틀레프와 예상하지도 못한 사랑의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 클리마와 프란티셰크 이외 자기 삶에 다른 가능성이 있음을 깨닫는다. 오직 남편만을 바라보았던 카밀라는 그동안의 자기 삶이 눈먼 상태였음을 깨닫고 남편 없는 세계의 새로운 지평을 보게 된다. 야쿠프와 올가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오해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발견은 이 소설의 핵심 인물인 야쿠프를 통해 드러난다. 정치적 신념을 위해 평생을 바친 야쿠프는 아름다운 여인 카밀라를 본 순간, 자기 인생에는 근원적인 오류가 있지 않았나 자문한다. 모든 것을 알았노라,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소진하며 살았노라 자부했으나, 자신은 눈이 먼 채, 또 모든 걸 거꾸로 보고 산 게 아닌가, 그리하여 오직 아름다움을 위해 모든 걸 포기하고 달리 살 수도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저속함과 잔인함, 어리석음이 온갖 거짓으로 치장되는 행태를 저 혼자서 고고하게 내려다보았던 그, 모든 인간은 살인자지만 자신만은 섬세하고 고매한 정신의 소유자라고 자만했던 그가, 모르는 한 여자에게 독약을 주고도 그녀를 구하러 나서기보단 끊임없이 자기변명에 빠져드는 자기 모습에서 자신의 도덕적 오만과 자기 내부에 숨어 있던 살인자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소설 이론가 M. Z. 쉬로더는 그의 글 「아이러니와 소설」에서 소설을 “천진무구의 상태로부터 경험의 상태로, 무지로부터 세계의 실태에 관한 충분한 인식으로의 통과 과정을 기록”한 것이라 보았다. 그리고 이 무지에서 인식으로의 과정, 즉 환멸의 과정을 통해 외양과 실상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아이러니라며 소설이란 “본질적으로 아이러니에 의존하는 허구의 형식”이라 했다. 쿤데라도 이와 일맥상통하게 소설가의 탄생을 “미성숙에서 성숙”으로 가는 과정의 결실로 보며, “소설 창작은 인식의 행위”라고 보았다. 세계의 이면을 드러내고 실존의 비밀을 폭로하는 아이러니는 이 소설 마지막에도 끝나지 않는다. 드디어 모든 것을 깨달았노라 여기는 인물들의 오해와 착각이 소설 마지막 너머까지 여전히 계속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의 삶이 그러하듯이.

     쿤데라, 그의 시선은 칼날처럼 날카롭기에 그의 인간 실존 해부는 잔인하다. 인간 실존의 잔인한 비밀을 밝히는 이 무거운 소설을 한없이 가볍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아이러니컬한 진실의 폭로가 불러일으키는 쓰디쓴 웃음과 함께, 간결한 문체와 짤막한 장 구성, 허를 찌르는 정확한 비유, 인물 각자가 매몰된 진실의 상대성을 폭로하며 상황의 반전을 빠른 템포로 이어 가는 경쾌한 전개 과정일 것이다.


     1972년 쓰인 이 작품은 1975년 쿤데라가 체코를 떠나 프랑스로 정착하기 전 체코에서 쓴 마지막 소설이다. 그는 이 책에 원래 ‘에필로그’라는 제목을 붙이며 자신의 마지막 책이 되리라 여겨 그 속에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 썼다고 한다. ‘가을이 시작하는 어느 날’로 문을 연 이 소설은 특수하긴 하나 또한 보편적인 인간 실존 상황 속에서 인간이 살고 있는 거짓과 그 거짓에 대한 폭로라는 작가의 결산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작가가 자신의 소설론 『커튼』에서 인용한 프루스트의 말처럼, “작품은 일종의 광학기구에 불과하다. (……) 독자가 책이 말하는 것을 자기 자신 안에서 인정하는 일은 진실과 대면하는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쿤데라 책을 읽으며, 빠르게 전개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책을 내려놓고는 깊은 상념에, 자기 진실과의 대면에 빠져드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