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에 대하여 _ 02 우스운 사랑들

비평

02 우스운 사랑들
두려운 사랑의 일화 모음집

방미경(가톨릭대 교수)

 


     『우스운 사랑들』에는 사랑 이야기 일곱 편이 담겨 있다. 일곱 편의 작품들은 모두 경박해 보이는 연애 이야기들이 기본 골격을 이룬다. 등장 인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상대방을 유혹하고 정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심지어 착실한 사람이 미래를 위해 저축하듯 유혹할 대상을 확보해 두기 위해 애쓰기까지 한다. 때로 이런 노력들은 치열하기도 하고 처연하기도 하지만 이 사랑 이야기들이 모두 수렴되는 지점에는 어떤 웃음이 있다. 각 단편들의 끝에서 우리는 허탈하게 웃기도 하고, 씁쓸하게 웃기도 하며, 웃다가 서글퍼지기도 한다.


     「히치하이킹 게임」에서 젊은 연인은 휴가 길에 우연히 어떤 역할 놀이에 빠져든다. 지나치게 부끄러움이 많고 얌전했던 여자는 모르는 남자의 차를 얻어 탄 척하는 장난을 시작했다가 당돌하고 도발적인 여자 역할을 하게 된다. 정숙하고 소심한 자기 연인을 안쓰러워하고 소중히 여겼던 남자는 거칠고 무자비한 남자를 연기한다. 문제는 게임과 현실이 혼동되고 가면의 역할과 실제 자아가 한데 뒤섞이면서부터 일어난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장난으로 시작했으나 남자와 여자는 상대에게서 낯설고 혐오스러운 면모를 발견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성적 흥분을 경험한다. 그들의 발견은 상대에게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폭군처럼 행동하면서, 여자는 매춘부처럼 행동하면서, 미처 알지 못했던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다. 어느 순간 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상대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게 된다.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연인이었던 그들은 매매춘 상황처럼 성행위를 하고 나서, 기이한 고독감 속에 예전의 친숙한 연인을 되찾고 싶어 한다. 여자는 남자에게 흐느끼며 “나는 나야, 나는 나야.”라고 호소한다. 그러나 그녀가 주장하는 ‘나’가 누구일까? 어쩌면 유쾌하게 웃으며 끝낼 수도 있었을 사소한 게임이 결국 ‘사랑’이 무엇인지, ‘나’가 무엇인지 묻는 엄청난 질문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나는 나’라는 어설픈 동어반복이 여자의 정체성을 회복해 줄수 있을까? 만신창이로 상처 입은 연인들의 사랑이 회복될 수 있을까? 일년 내내 기다려 온 휴가 길에 사랑하는 두 남녀가 우연히 시작한 게임이 이런 질문에 가닿을 때 작가는 이를 ‘우스운 사랑’이라 한다.


     우리는 왜 이런 함정에 빠지는 것일까? 「누구도 웃지 않으리」에서 작가는 우리가 붕대로 눈을 가린 채 현재를 살며, 나중에 그 붕대가 풀리고 과거를 돌아보게 되어서야 비로소 무엇을 겪었는지 이해하고 그 의미를 깨닫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철저한 몰락이 시작되는 시점인지도 모르고 성공을 자축하는 축배를 들기도 하고, 어떤 슬픔에 가닿을지 모른 채 장난을 친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사소하다 여겼던 거짓말과 장난 때문에 사랑과 교수직과 인생에서 모두 실패한다. 그는 유머가 통하지 않는 시대에 농담을 하고, 확신만이 허락되는 시대에 냉소를 일삼는 죄악을 범한 것이다.


     그러한 시대의 비극을 쿤데라는 반어적 어법을 통해 서술한다. 반어란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전제를 묻는 것이다. 가령 ‘공부해라’라는 명령에 대해 ‘공부는 왜 해?’라고 묻는 것이고, 여기에 쿤데라 특유의 유머가 더해져서, 공부하라는 지시에 따르되 과장하고 극단화하여 웃음을 유발한다. 가령 식음을 전폐하고 공부에 매달려서 지시한 사람을 당황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반어는 비판이 된다. 쿤데라의 농담은 숨 막히고 답답한 인물이나 사회 전체의 분위기를 그렇게 희화화하고, 그럼으로써 일종의 환기구를 만들어 낸다. 사랑과 역사와 인생에 대한 쿤데라식 반어와 농담이 과거의 경직된 어떤 시대를 넘어서 우리 모두의 삶에 해당되기에 이 ‘우스운 사랑’ 이야기가 우리를 씁쓸하게 웃게 만드는 것이다.

 

     탄성을 자아내는 절묘한 장면 하나가 「에드바르트와 하느님」에 등장한다. 한 여학생이 스탈린의 죽음을 애도하며 장엄한 부동자세로 ‘고통의 동상’처럼 서 있다. 지나가던 동기 남학생이 그런 여학생 둘레를 여러 번 돌며 쳐다보더니 폭소를 터뜨리고 자리를 뜬다. 여학생은 남학생의 그 웃음에 모멸감을 느껴 복수심에 불타고, 그 행동을 정치적 도발로 평가하여 그를 대학에서 몰아낸다. 과도하게 심각하고 진지한 것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 바로 웃음일 텐데, 그 남학생은 대놓고 그렇게 웃었다가 인생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쿤데라는 결정적 대목에 늘 이 위험한 웃음을 장전해 놓는다.


     훗날 남학생의 동생이 교사가 되어 부임한 학교에 그 여학생은 교장이 되어 있다. 교장은 젊은 교사의 수상쩍은 사상을 재교육한다는 공적인 사명을 가지고 그를 대한다. 그러나 아주 미미한 신호 하나에 그녀는 불굴의 여전사이기를 멈추고 이제껏 욕망을 억누르고 살아 온 추녀가 되며, 벌거벗은 채 무릎을 꿇고 젊은 교사가 명하는 대로 기도문을 외운다. 이 우스꽝스럽고 엽기적인 에로티시즘의 장면 역시 견고함과 확실성을 부수는 농담의 위력을 보여 준다.

 

     우스운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모든 것을 다 걸었던 절대적인 사랑이 결국 우연과 오류로 얽힌 하찮은 것임을 확인하게 될 때도 사랑은 우스워진다. 종교적 신념에 따라 순결을 고집하는 알리체를 주인공은 어떻게든 안고 싶어 하고, 그 욕망을 위해 아예 알리체보다 더 독실한 신앙을 가진 척한다. 그러다가 학교에 알려져 공개 재판에 회부될 때 자신의 신앙이 가짜임을 얼른 고백하려 하나 그러지 못한다. 심판하는 이들의 태도가 너무 심각하고 진지해서 그 진지함을 웃음거리로 만들 엄두를 내지 못 하기 때문이다. 알리체는 이를 위대한 순교적 행위로 오해하고 드디어 몸을 허락한다. 그러나 그토록 애타게 바라왔던 순간이 그렇게 하찮을 수 있다는 데에 그는 환멸을 느낄 뿐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에 진지할 수 있을까? 변하지 않는 진지함의 대상, 영원히 소중히 여기며 진정을 다할 어떤 대상이 존재하긴 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것이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과 삶에 대한 태도 자체의 문제인 것일까? 미친 사람이 자기가 물고기라 주장할 때 당신은 물고기가 아니라고 끝까지 진지하게 설득해야 하는가 아니면 비늘이 아름답다고 말해 주어야 하는가? 진지하지 않은 것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건 진지함을 잃어버리는 것인가? 쿤데라는 아무것도 답해 주지 않는다. 다만 이 단편의 끝에서 에드바르트는 성당에 앉아 있고 깊은 슬픔을 느낀다. 세상의 그 무엇도 진지하게 여길 수 없을 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를 생각한다.


     「콜로키움」 역시 에로티시즘의 주제를 앞세워 나와 타자의 문제, 진지함과 경박함, 가벼움과 무거움, 삶과 죽음의 문제를 탐구한다. 희곡처럼 몇 개의 막으로 나뉘어 있어 이 단편은 더욱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사랑의 향연처럼 보이는데, 등장인물 다섯 명은 서로 엇갈리는 방향으로 욕망을 품고 그 욕망을 표현하는 행동을 하거나 장광설을 내뱉는다. 모든 여자를 마다하지 않는 하벨 박사가 굳이 엘리자베트는 거부하는 이유, 과장이 젊은 시절 한 창녀에게 거절당했던 이유가 피력되는 대목은 타자의 시선에 비친 나, 그 나를 바라보는 나에 대한 서술이다. 여기에서 문제는 누가 누구를 원하는가 또는 원하지 않는가가 아니라, 다른 이들 모두가 누구를 원하지 않는데 나 혼자 그 사람을 원하면 우스운 꼴이 된다는 것이다. 또는 누구든 다 받아들이지만 어떤 사람 하나는 거절함으로써, 자기가 아무나 다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그렇게 해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자 한다. 이때 기준은 ‘나’가 아니라 나를 보는 타자의 시선이다. 또는 타자의 시선에 비친 나를 바라보는 나가 기준이 된다. 히치하이킹 놀이라는 덫에 빠진 연인이나, 스탈린을 사랑했던 교장이나, 사랑의 하찮음에 환멸한 젊은이나, 사랑에 대해 길게 토론을 벌이는 의사들이나 모두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 앞에 허탈하게 웃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쿤데라는 이 책을 가장 사랑하는 책으로 꼽으면서 자신이 제일 행복했던 시기에 썼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어쩌면 다른 이유는 거기에 쿤데라 문학의 모든 원형이 들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농담’이기도 하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기도 하며 ‘삶은 다른 곳에’이기도 하다. 일곱 단편들은 모두 사랑, 농담, 존재, 역사, 가벼움과 무거움의 문제를 탐색하며 쿤데라 문학의 핵심으로 파고든다. 마치 대작의 밑그림에 해당하는 스케치들처럼 또 다른 작품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스케치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피카소의 수많은 스케치들이 후일 대작의 바탕이 된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 자체로서 우리에게 미소와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쿤데라의 이 소품들에는 특이한 매력과 개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