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소설가보다 위대하다 - 3

비평

소설은 소설가보다 위대하다 - 3

 

박성창-쿤데라(《세계의 문학》 2000년 겨울호)

 

3 쿤데라의 소설 형식

 

박성창

그다음으로 저는 특히 이번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꿈’에 관해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특히 한국 독자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오는 테레자의 꿈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쿤데라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이러한 꿈 이야기 덕분에 독자들은 테레자의 감추어진 부분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제가 이번 작품에서 묘사했던 ‘망명의 꿈’은 이러한 개인 차원의 꿈이 아닙니다. 일종의 집단 무의식에 관련된 것입니다. 제가 픽션으로 꾸며 낸 것도 아니고 순전히 제 개인적인 환상의 소산도 아닙니다. 한국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지만 프랑스어의 경우 이는 두 단어로 이루어진 복합어입니다만 독일어에는 한 단어로 존재합니다. 이 ‘망명의 꿈’은 실제로 저를 포함해서 모든 망명객들이 꾸었던 꿈이며 이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현상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박성창

마지막으로 이번 작품의 형식에 관해 질문드리겠습니다. 이 작품은 53개의 장들로 구성되어 있고 가장 긴 장도 당신이 제게 준 원고 상태로는 A4 용지로 4~5페이지를 넘지 않습니다. 특별히 이런 식으로 작품을 구성하신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리고 이번 작품에서 형식의 변화를 시도하셨나요?

쿤데라

소설가에게 형식이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를테면 자발적인 것이고 소설가는 ‘그 후에야’ 자신의 형식에 대해 깨닫지요. 실제로 이 작품은 『불멸』 이후에 제가 시도했던 형식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을 수 있는 텍스트, 전혀 분절되지 않고 전체가 한 덩어리로 뭉쳐진 긴 텍스트를 싫어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소설을 ‘소비’하게 만들지요. 빨리, 그리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읽고 난 후에는 남는 게 없습니다. 저는 이와는 반대로 제 소설을 이루는 각 장들을 거의 독립적인, 마치 한 편의 ‘시의 힘’을 지닌 것으로 읽어 주었으면 합니다. 비록 독자들이 전후 스토리의 맥락을 모르는 경우일지라도, 어느 장을 펼치더라도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지향합니다. 각각의 장이 충분한 미학을 지닌, 전체의 구성이 중요합니다.


박성창

그러니까 당신 작품을 설명하는 데 흔히 동원되는 소나타니 푸가니 하는 음악적 비유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신은 소설과 음악 간의 긴밀한 관계를 여러 번 강조했습니다. 당신 부친께서는 유명한 피아니스트셨고 당신도 스트라빈스키로 대표되는 현대 음악에 조예가 상당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당신 소설의 ‘대위법적 구성’도 이러한 맥락에서 생겨난 것이지요. 실제로 저는 『불멸』을 읽으면서 마치 음악 작품처럼 구성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알기로는 당신은 일찍부터 영화에 관심을 두었고 실제로 프라하에서 영화를 가르치기도 했지요. 당신작품과 영화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쿤데라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흔히 그렇게들 생각하는데 내 글쓰기는 영화에서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습니다. 문학적 글쓰기와 영화적 글쓰기는 전혀 길이 달라요. 물론 제가 영화를 가르친 건 사실이지만(쿤데라는 정확히 말해서 이미지로서의 영화가 아니라 글쓰기로서 시나리오를 가르친 것이라고 정정해 주었다.) 그 후의 제 삶은 영화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박성창 전혀 뜻밖의 대답이군요. 그런데 소설의 길과 영화의 길은 어떻게 다른가요?
쿤데라

글쎄요, 소설은 길이와 속도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삶은 정말로 너무나도 짧습니다. 항상 똑같은 일에만 매달려 있다면 얼마나 슬픈 일일까요! 저에게는 이전의 실존과는 다른 실존을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박성창

혹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영화로 만든 것에 실망해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아닌가요? 또 당신은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를 영화로 만든 것을 두고 미학적 키치라고 비판한 적도 있었지요. 그래도 좋아하는 영화는 있지 않나요?

쿤데라 거의 없어요. 단, 예외로 펠리니의 영화들은 무척 좋아합니다. 거의 유일한 예외지요.

 

박성창 일 년에 몇 번 정도 영화를 보십니까?
쿤데라 한두 번 정도.

 

박성창

정말입니까? 저는 늘 당신이 상당한 영화광일 거라고 상상해 왔는데 지금 그 상상이 깨지는군요. 그렇다면 금년에 보신 영화 중에 기억 남는 작품은 무엇입니까?

쿤데라 글쎄요, 금년에 본 영화라곤 단 한 편밖에 없어요. 그것도 제 친구가 만들었다고 해서 반의무적으로 보았지요.

 

     

     시계를 보니 오후 4시가 넘어 있었다. 12시 30분에 만났으니 제법 시간이 흐른 셈이다. 사실 질문을 하는 나는 조금씩 지쳐 가고 있었는데 쿤데라에겐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쿤데라의 부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쉬엄쉬엄 하라는 말을 건넨다. 담배도 피우고 차도 마셔 가면서 하라고. 이제 신상 관련 질문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중요한 질문은 이제부터인데. 대담을 할 때는 중요한 질문을 대담 한 가운데 배치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달았다. 너무나도 미안한 마음으로 소설에 관한 보다 일반적인 질문들을 해도 괜찮겠느냐는 질문에 쿤데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서둘러 질문 보따리를 풀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