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에 대하여 -

비평

01 농담

농담의 가벼움과 무거움


방미경(가톨릭대 교수)

 


     쿤데라는 소설이란 어쩌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어떤 단어의 정의를 오래 추적하는 작업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쿤데라의 소설은 그런 의미에서 ‘농담’, ‘가벼움’, ‘느림’, ‘불멸’, ‘사랑’ 같은 단어들에 대한 작가 고유의 정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각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삶이 마치 사전의 항목처럼 어떤 단어를 정의하는 긴 서술인 것 같기도 하다. 작품 제목이기도 한 이 단어들은 각 소설을 이끄는 관념의 중심점이면서 또한 작가의 모든 작품 속에서 한데 얽혀 다시 추적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쿤데라의 어느 작품에서든 농담과 웃음, 가벼움과 무거움, 느림과 속도, 불멸과 죽음, 사랑의 비극과 우스꽝스러움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쿤데라 문학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단어를 들자면 바로 ‘농담’이 아닐까 싶다.


     쿤데라는 자신의 첫 소설 『농담』에서 작가 특유의 냉소와 서정, 인간과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통해 ‘농담’이 무엇인가를 탐색한다. 이 단어를 추적해 가는 첫 번째 상황에 루드비크와 마르케타가 있다. 이들은 대학교의 공산당 학생 연맹에 소속되어 있다. 루드비크는 장난기 많고 냉소적인 반면 마르케타는 고지식하고 진지하다. 루드비크는 아름다운 마르케타와 여름방학을 함께 보내길 기대하는데 마르케타는 공산당원 연수에 간다. 연수에만 열성적인 마르케타의 태도에 루드비크는 질투를 느끼고 불온한 말투의 엽서를 보내는데 그것이 지도부에 알려지게 된다. 개학 후 루드비크는 공개 비판에 처해진다. 학생 연맹은 루드비크에게 세상의 전부인 친구이자 동지들의 모임이었다. 그들은 누구보다 루드비크를 잘 아는 사람들이었고, 그의 농담과 장난을 함께 즐겨 온 친구들이었다. 그는 이 상황을 그들이 이해해 주고도 남으리라고 믿었지만 오히려 평소 그의 성향이 냉소적이며 진지하지 못했다는 것이 반동적 요소로 받아들여진다. 학교 강당에서 공개 비판이 열리고, 친구였던 그들은 루드비크를 학교와 공산당으로부터 축출하는 데 일제히 손을 들어 찬성한다. 이후 그는 특수부대로 보내져 황폐한 광산에서 청춘을 보내게 된다.

 

     농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것은 무거움을 가벼움으로 변화시켜서 삶의 고통이나 힘든 상황을 견디게 해 주는 힘이 되기도 한다. 고통을 마주보고 웃음으로 대응한다는 것은 고통에 짓눌리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며 고통을 극복하는 에너지와 미래의 희망을 약속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것은 힘에 속한다. 반면에 농담은 모든 진지한 것들의 의미를 퇴색시켜 버리기도 한다. 열렬한 청년 공산당원들의 진지한 토론 속에서 불쑥 어떤 농담이 튀어나올 때 당장에는 모두 웃고 넘어가지만 나중에 되돌아보면 그 농담은 불온하고 의심스러워진다. 그것은 진지한 이들을 맥 빠지게 만들고, 언제나 우리 인생에 도사리고 있는 검은 구멍의 공허를 문득 바라보게 만든다. 루드비크의 농담에 깃든 삶에 대한 냉소는 그들이 가장 경계해야 하고 따라서 축출해야 하는 위험한 요소인 것이다.


      마르케타가 유발하는 웃음은 반대 방향으로, 가벼움이 무거움으로 변형되면서 일어난다. 모두가 농담을 할 때 혼자 알아듣지 못하고 진지하게 대응하는 이는 우스꽝스럽다. 이 우스꽝스러움은 가벼움이 가볍지 못 할 때 일어난다. 지극히 사소한 것을 과장되게 심각한 것으로 서술할 때 일어나는 웃음도 이에 해당한다. 이때 웃지 못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기는 이도 우스꽝스럽다. 가벼움이 무거움으로 위장된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태도가 웃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농담을 이해하지 못하고 진지하기 짝이 없는 마르케타는 평소 친구들을 웃게 만든다. 그러나 가벼움이 무거움에 위협이 되기 시작하는 어느 순간 모두의 웃음은 사라지고 농담을 던진 자가 위험해진다.


     농담을 이해하지 못하는 개인의 경직성이 시대의 정신과 상통할 때 웃음은 사라진다. 마르케타라는 예쁜 여학생이 고지식하고 매사에 진지해서 친구들을 웃게 만들 때 농담은 유쾌하고 흥겹다. 그러나 1948년 공산정권 수립 직후의 체코는 노동 계급의 승리와 완전히 새로운 시대의 도래에 환호했고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공산주의의 철두철미한 신념, 역사의 진보와 미래에 대한 희망적 확신으로 가득한 이들에게 농담은 허락되지 않는다. 이 진중한 신념의 시대에 무거움을 가벼움으로 변화시키는 농담은 가차 없이 제거해야 할 독이다. 루드비크를 심판하는 강당에서 농담은 이제 농담일 수 없고, 시대의 독이므로 아무도 웃지 않는다. 쿤데라는 웃지 못하는 그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질문은 의심이며 다시 돌아봄이다. 작가의 질문과 더불어 우리는 웃지 못하는 시대의 경직성에 대해, 체제와 확신과 인생에 대해 질문하고, 의심하고, 그런 시대를 거쳐 온 역사의 농담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그 강당에서는 아무도 웃지 않지만 그래도 농담은 지속된다. 황폐한 광산에서도 사람들의 삶과 일상은 이어지고 그래서 그곳에 유배된 자들은 다시 장난치고 농담하고 웃는다. 비참과 절망 속에서도 농담은 계속된다. 외설적인 여자 나체를 그려 놓고 공산주의의 이상을 형상화했다며 부대장을 우롱하기도 하고, 부대원들이 하나로 뭉쳐 포복절도할 게임을 구상해 내기도 한다. 이때 이들을 통제하고 단죄하려는 부대장은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삶은 이어지고 절망도 지속되지만 문득 그 절망도 가벼워지고 마는 웃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시기에 루드비크가 루치에와 만나 나누는 사랑은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어 보이는 기이한 사랑이다. 군대의 철조망을 사이에 둔이들의 사랑은 슬프고도 황홀하며, 절대적이고도 덧없으며, 늘 함께이면서도 멀리 있고, 애틋하면서도 잔인하고, 순결하면서도 음란하고, 사랑이면서도 사랑이 아니다. 루치에와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목숨을 거는 루드비크의 행각은 처절하면서도 우스꽝스럽다. 무거움과 가벼움이 파도처럼 번갈아 일렁이는 쿤데라의 결정적 사랑의 일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헬레나와의 일화 역시 비극이면서 희극이다. 헬레나는 예전 루드비크의 공개 재판을 주재했던 학생 대표의 아내다. 복수를 위해 루드비크는 헬레나를 유혹한다. 그러나 복수의 대상이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져 이혼을 애타게 바랐기 때문에 오히려 고맙기 그지없는 기회가 되었음을 알게 된다. 루드비크는 자신이 이제껏 복수를 통해 어떤 행위의 수정이 가능하리라 꿈꾸어 왔으나 수정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다만 망각될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이 등을 돌렸던 고향에서 원수의 아내와 밀회를 나누고 복수를 하려던 계획은 이제 황당한 소동으로 마무리될 뿐이다. 그는 헬레나의 마음은 셈에 넣지 못했다. 그녀가 그렇게 진심으로 열렬한 사랑을 바칠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를 짝사랑해 온 조수까지 끼어들어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좌절한 그녀는 자살 시도를 하지만 잘못하여 조수의 변비약을 먹고 설사 소동이 일어난다. 한바탕 한 여름 밤의 꿈이 희비극의 장관을 이루는 대목이다.

 

     여기에서 쿤데라는 이후 여러 작품에서 보여 주게 될 사랑의 진수를 선보인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방식대로 자신을 속인다. 우리는 기억이 영원하리라 믿으며 사람과 사물과 행위를 바로잡고자 하지만 기억은 새로운 이미지를 자신에게 덧씌워 원하는 것을 지어내거나 원치 않는 것을 지워 없앤다. 일곱 부로 이루어진 이 책은 서로 다른 목소리가 돌아가며 이야기를 이어가는데, 중심인물 세 명이 1부에서 5부까지 돌아가며 말하다가 마지막 7부에서는 다 함께 나와서 교대로 말한다. 서로 다른 목소리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그러니까 서로 다른 기억을 말할 수밖에 없다. 쿤데라는 이런 서술 방식만으로도 우리를 멈추어 서게 하고 되돌아가 다시 묻게 만든다.

 

     심지어 6부에서는 불쑥 새로운 인물이 끼어들어 전체 이야기에서 벗어난 자기 이야기를 들려 주고, 우리는 이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서 지난 이야기의 다른 면을 알게 된다. 루드비크에게 줄 것이 없어 공동묘지에서 몰래 꽃을 가져다 바쳤던 루치에의 그 마음이 사랑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는 것도 이 목소리를 통해서다. 어느 가수의 노래처럼 사랑은 비극이고, 너는 내가 아니며,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쿤데라가 좋아하는 이 구성, 전체 일곱 부 중 6부에 독립된 새로운 이야기를 등장시키는 것은 첫 소설 『농담』에서 시작하여 『삶은 다른 곳에』를 거쳐 『불멸』에 이르기까지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이러한 서술 방식 자체가 바로 유일한 진리는 없다는 쿤데라의 세계관이자 어떤 사태에 대한 물음이고 반성일 것이다.


     끝으로 7부에서 야로슬라프의 목소리로 서술되는 부분은 마치 우화적인 산문시같이 아름답고도 처량하며 작품의 주제들을 절묘하게 반복한다. 야로밀의 귀향은 증오의 대상을 쓰러뜨리는 것이 목표였으나 결국은 땅에 쓰러진 옛 친구 야로슬라프를 품에 안아 부축하고 있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는 쓰라린 기억 때문에 저버렸던 옛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야로슬라프가 지켜 내려 애쓴 모라비아 민속 축제는 아름답지만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 그 가치가 유린되는 것을 목도하는 가운데, 옛 친구를 품에 안고서, 깊은 슬픔에 잠기며 야로밀은 복수의 열망이 종말을 맞고 있음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