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소설가보다 위대하다 - 2

비평

소설은 소설가보다 위대하다 - 2

 

박성창-쿤데라(《세계의 문학》 2000년 겨울호)

 

 

2 망명의 실존적 문제들을 찾아서


 

박성창

당신은 최신작 『향수』를 프랑스가 아니라 스페인에서 제일 먼저 출간했습니다. 한국에서도 프랑스보다 먼저 책이 출간될 예정입니다. 그러한 ‘전략’을 선택하신 이유라도 있나요?

쿤데라

‘전략’이라니요! 이를 전략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언론사 기자들이 제가 이 작품을 우선 스페인어로 출간한 데 대해, 프랑스 비평가들이 제 작품들을 혹평했던 것에 대한 반발이라고 해석하는데, 이는 정말로 지나친 해석의 횡포입니다. 저는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의 편집인들과 정말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제가 스페인에서 먼저 책을 출간한 것은 그쪽 출판사의 편집인과 오랜 우정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비평가들이 저를 좋게 말하건 나쁘게 말하건 그것은 그들 몫입니다. 저는 제 작품을 지나치게 좋게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도 경계하는 편입니다.


박성창 이 소설을 쓰는 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나요?
쿤데라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저는 여러 작품을 동시에 구상하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동시에 집필하기 때문에 한 작품이 언제 구상되어서 어느 정도의 작업 기간을 거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봐야겠지요.

 

박성창 당신은 한 작품을 발표하고 다음 작품을 발표하기까지 대략 이삼 년의 기간을 두시는데요.
쿤데라 발표된 것만 놓고 보면 그럴 수 있지만 실제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은 다릅니다.

 

     갈수록 내 질문들과 쿤데라의 대답이 어긋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쿤데라가 자기 집으로 장소를 옮겨서 계속 이야기를 하자고 제안했다. 아, 그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음식을 음미할걸. 질문들을 생각하고 분명히 시간이 부족할 이 대담에 신경을 쓰느라고 음식 맛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쿤데라와 먹은 음식은 요즘에만 맛볼 수 있다는, 사냥해서 잡은 새 요리라는데. 식당을 빠져나오면서 쿤데라는 아까 식사 시중을 들었던 웨이터가 프랑스 전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의 집사였다고 귀띔해 주었다. 쿤데라의 집은 식당 오른편에 있는 아파트였다. 정말 의외였다. 우리가 점심을 먹은 식당 바로 옆에 자기 집이 있다니. 자기 집은 여기서 십 초면 간다고 해서 농담인 줄 알았었다. 베란다에서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그의 아파트는 넓고 안락했다. 소설가의 집답게 책들이 빼곡히 꽂힌 책장들이 눈에 띄었다. 책장에는 정말 여러 언어로 쓰인 책들이 꽂혀 있었다. 벽에는 초현실주의 풍 그림들이 걸려 있었는데 쿤데라는자신이 그린 그림도 있다고 말해 주었다. 내가 이 사실에 깜짝 놀라자 쿤데라는 우선 지금까지 나온 소설들의 표지를 보여 주면서 표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 자기가 직접 그림을 그려서 만든 표지라고 말했다. 얼핏 본 그 표지 그림들은 피카소 풍이었다. 번역에 대한 몇 가지 질문들을 마친 후 본격적인 대담에 들어갔다.

 


박성창

당신의 최근작 『향수』를 읽으면서 저는 그것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대응하는 작품, 일종의 후속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컨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그들의 나라나 프라하를 떠나야만 했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면 이 작품은 다시 그들의 나라나 프라하로 돌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지요. 또 인물들의 성격 차원에서도, 이레나는 여러 가지 점에서 테레자를 연상시키고 조제프는 토마시와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쿤데라

글쎄요, 저는 전혀 그렇게 의식하고 작품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독자들은 얼마든지 자유롭게 제 작품을 받아들이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당신 해석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번 작품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뿐만 아니라 이전 작품에서 부분적으로 다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주제들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고자 했습니다.


박성창

제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비교해서 말씀드린 것은 워낙 그 작품이 한국 독자들에게 불러일으킨 반향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당신 작품들마다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일종의 ‘순환적 주제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이번 작품에서 당신이 성찰하고자 하는 기억과 망각의 주제는 『농담』과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 언급되었지요. 그런데 이 주제들을 이번 작품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고자 한 동기는 무엇입니까?

쿤데라

글쎄요, 이제는 그것들을 본격적으로 다루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나 할까요. 제 나이 탓도 있는 것 같아요. ‘향수’란 근본적으로 기억과 망각의 문제를 작동시키니까요.


박성창 제 질문에 대한 충분한 답을 주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쿤데라

제 작품 속에 모든 대답이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작품 ‘밖에서’ 작품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제게는 몹시도 거북하고 난처한 일임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쿤데라의 음성이, 그것도 원래 체코어의 강한 억양이 섞여 있던 그의 프랑스어 톤이 갑자기 올라감을 느꼈다. 사실 쿤데라와의 대담을 준비하면서 가장 걱정했던 것은 이런 것이었다. 그는 이미 다른 글에서 분명히 이렇게 밝히지 않았는가. “내 소설들을 설명하는 것, 작가가 말하고자 한 것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는 것을 나는 철저하게 거부한다. 왜냐하면 작가는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소설에서 다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가가 무언가를 말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늘 기꺼운 마음으로 나의 시학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은 유혹에 빠져든다.” 마치 물에 빠지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개울을 건너는 심정으로, 그리고 그가 계속 이러한 유혹에 빠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다음 질문을 던지려는 순간 쿤데라가 대답을 덧붙여 주었다.

 


쿤데라

이렇게 말해 보면 어떨까요. 초기의 제 작품들이 주로 체코나 프라하에서 벌어지는 인물들의 이야기라면 『불멸』 이후 『느림』과 『정체성』에서는 프랑스에서 일어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리고자 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파리도 프라하도 아닌 파리와 프라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다고 할까요. 물론 무대나 공간을 중심으로 해 본 단순화된 지적입니다만.


박성창

그러고 보니 당신 작품은 이 ‘사이’를 중심으로 일종의 대위법적인 구성을 지향하는 것 아닌가요. 파리와 프라하 ‘사이’,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 형식과 주제 ‘사이’, 문학과 철학 ‘사이’…….

쿤데라 글쎄요, 그런 건 어쩌면 비평가들의 몫일지도 모릅니다.

 

박성창

최근에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는 『기억, 역사, 망각』이라는 몹시 흥미로운 제목의 책을 냈습니다. 당신이 이번 소설에서 탐구하고자 하는 주제어들이 제목에 고스란히 들어 있더군요.

쿤데라

글쎄요, 리쾨르의 작품을 읽어 보지 않아서 뭐라고 이야기하기는 그렇지만 이 기억과 망각이 20세기의 커다란 주제임은 틀림없습니다. 저는 이 주제에 대해 무슨 논쟁 같은 걸 제기할 의도는 전혀 없었고 다만 제 나름대로 이 주제를 천착해 보고자 했지요. 기억은 무엇인가, 기억의 능력은 무엇인가, 인간에게 기억의 능력은 너무나도 미약한 것이 아닐까, 기억은 망각의 한 형태는 아닐까. 대략 이런 질문들을 하고자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박성창

리쾨르의 책을 읽으면서 다음 대목은 당신의 이번 작품을 잘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번 인용해 보겠습니다. “불행은 공유되지 않는다. 상처 입은 기억들은, 내 불행은, 다른 여러 불행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매번 불행의 독특함이란 것이 존재한다.”

 


     이 질문에 대해 쿤데라는 고개만 끄덕일 뿐 구체적인 대답은 피했다. 다만 이 작품 속에서 오랜만에 프라하로 돌아간 여주인공 이레나가 친구들을 초대해서 이야기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이레나는 친구들에게 자신이 타국에서의 망명 생활에서 얼마나 고생했는가를 이야기하고 싶어했지만 그녀의 친구들은 자신들이 프라하에 남아 얼마나 고생했는가만을 되풀이해서 이야기한다. 친구들은 한 번도 그녀의 망명 생활이 어땠는지에 관해 묻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의 불행이 가장 비극적인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박성창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소설적 탐색과 관련하여 당연히 프루스트의 소설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한국 독자들에게 친숙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프루스트의 시도와 당신의 시도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습니까?

쿤데라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하고 기억을 통해 되찾은 삶의 행복과 희열을 노래하지요. 하지만 저는 그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기억 속에 떠올리는 것은 생생한 실재가 아니라 오히려 그 부재의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실재가 아니라 실재의 환영(illusion)이라고나 할까요. 저는 이번 소설에서 조제프라는 인물을 통해 주로 이러한 부재, 실재의 환영, 그리고 이러한 ‘환’의 ‘멸’, 즉 환멸(dés-illusion)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박성창

당신이 기억은 망각의 한 형태일지 모른다고 이야기한 것도 이런 맥락인 것 같습니다. 이제 조금 다른 각도에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이 작품 속에서 프랑스 혁명 이후 지금까지의 유럽 역사를 ‘망명’이라는 관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방식으로 정리하더군요. 프랑스 대혁명이 망명객이라는 유럽의 위대한 인물을 태어나게 했다면 1980년대 말 공산주의의 몰락은 이 인물을 유럽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시켰다는 지적 말입니다.

쿤데라

아, 그런 지적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마세요. 저는 일종의 아이러니로 그렇게 표현한 겁니다. 저는 망명 문제를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관점에서 제기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망명 문제를 ‘실존적’ 범주 차원에서 다루고자 했습니다. 이점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저는 예전부터, 정확히 말해서 십 년 전부터 망명의 탄생과 소멸의 문제를 다루고 싶었지만 그것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해석할까 봐 계속 미루어 왔던 겁니다.


박성창 아까 당신이 말씀하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도 될까요.
쿤데라

글쎄요, 저는 망명 문제를 ‘실존적’ 범주로 다루면서 망명을 국가나 당, 또는 이데올로기에 연결하지 않고 기억, 망각, 향수 등의 문제들과 결부하고자 했습니다. 정치가 없다면 망명도 없었겠지만 망명이 항상 정치적인 문제인 것만은 아닙니다. 저는 늘,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상황은 실존적인 상황을 감추고 은폐한다고 생각합니다. 소설가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 제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문제 틀을 벗어나는 실존적 문제 틀의 천착입니다. 망명의 실존적 문제 틀은 시간이란 무엇인가, 기억이란 무엇인가, 향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들을 제기합니다.

 

박성창

그러니까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게 된 이 망명객은 자기 나라로 돌아갈 수밖에는 없었겠군요. 혹시 당신도 체코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느낀 적은 없나요? 이 소설의 인물들처럼 당신도 망명객 아닙니까?

쿤데라

저와 작품 속 인물들을 혼동하지는 맙시다. 그에 대한 개인적인 답변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자기 나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는 점만은 이야기하고 싶군요. 우리의 실존적 상황은 늘 아이러니와 모순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박성창

어떤 이데올로기적인 ‘편견’에서 드린 질문은 아니고 그저 독자 입장에서 궁금해서 드린 질문이라고 이해해 주십시오. 독자들은 늘 작품과 작가를 연결해서 생각하는 버릇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초기에는 당신 작품들에 대한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해석이 문학적인 해석을 방해했던 측면이 있었지요. 이제 사람들이 당신 작품에 대해 온전하게 문학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쿤데라

글쎄요, 정치적인 해석이 점점 약해진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은데요. 그와 관련해서 제가 한번 질문해 보지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한국에서 호응도가 높았던 것은 그에 대한 정치적 해석 탓인가요?

 


     갑작스러운 쿤데라의 질문에 나는 정치적 해석에 기인한 바 크지만 그 외 다른 이유들도 있을 거라고 얼버무렸다. 그 외 다른 이유들에 대해 그가 몹시도 궁금해했지만 솔직히 말해 그것들을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다만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관점과 실존적 관점을 자꾸만 분리하려고 하는 쿤데라의 시각 자체가 ‘정치적’ 관점이라는 생각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