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에 대하여 _ 11 소설의 기술

비평

11 소설의 기술
보헤미안 문학론


권오룡(한국교원대 교수)

 


      쿤데라가 체코 태생이라는 사실은 여러 가지 의미와 연결된다. 체코 태생이면서도 그는 체코에 살기를 거부하고 체코라는 나라 이름조차 좋아하지 않는다. 정치적 이유로 망명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에야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탓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자유화의 물결이 넘쳐든 이후에도 쿤데라는 조국인 체코로 돌아가지 않고 프랑스에서 망명 아닌 망명 생활을 이어 가고 있다. 이런 사정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로 체코라는 이름에 대한 거부감도 작용하는 게 아닐까 싶다. 「소설에 관한 내 미학의 열쇠어들」에서 쿤데라는 체코슬로바키아라는 국명에 대해 이런 생각을 피력한다.

 

내 소설에서 인물들의 행위는 대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이루어지지만 나는 내 소설에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말을 절대로 쓰지 않는다. 만들어진 단어인 이 말은 너무 젊고(1918년에 만들어졌다.) 역사적 뿌리가 없으며 아름답지도 않다. 그리고 그 말로 지칭되는 대상의 너무 젊고(시간의 시련을 겪지 않은) 인위적인 성격을 나타내지도 못한다. 이처럼 단단하지 못한 단어 위에 억지로 나라는 세울 수 있겠지만 소설을 세우는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내 작중 인물들의 나라를 지칭하기 위해 나는 언제나 보헤미아라는 낡은 단어를 쓴다. 지정학적 관점에서 보면 옳지 않지만(내 소설을 번역한 사람들은 종종 이에 반발하곤 했다.) 시의 관점에서 보면 쓸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은 오직 그것뿐이다.(11, 206~207쪽)

 

     그의 마음이 시적이어서일까? 심정적으로 쿤데라는 체코인이 아니라 보헤미아인, 즉 보헤미안이다. 그런데 보헤미안이라고 할 때 우리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연상 내용은 떠돌이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닌가? 요즘에야 이런 사람들을 노마드라는 조금 고상한 이름의 신인류로 주목하기도 하지만, 이런 새로운 이름도 쿤데라에게는 그리 탐탁하게 여겨질 것 같지 않다. 그러니 그저 떠돌이라는 의미로 한정할 때 보헤미안이란 자신의 고향에서 살 수 없는 운명을 안고 태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게 아니겠는가. 보헤미아에 정착하여 살아갈 때 보헤미안으로서의 정체성은 사라져 버리고 만다. 보헤미아에 살 수 없는 사람들, 이들이 바로 보헤미안이다. 달리 말하면 고향으로서의 보헤미아라는 특별한 지명을 스스로 해체해 버리는 사람들, 이들이 보헤미안인 것이다.


     이 같은 해체 이후 보헤미안에게 주어지는 삶의 무대는 세계 — 조금 구체적으로 좁혀 잡으면 유럽 — 라고 하는 조금 넓고 추상적인 공간일 수밖에 없다. 고향에서 세계로 탈향(脫鄕)하는 과정에서 보헤미안 역시 세계인이라는 추상적 모습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실제적으로나 상상적으로나 탈향 이후 보헤미안들의 삶의 무대는 세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점의 공간들이고 이들 삶의 역사란 이 점들을 연결하는 선의 궤적과 일치한다. 이러한 운명과 역사가 보헤미안적 상상력의 원형적 조건이라면 쿤데라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으리라. 소설에 대한 쿤데라의 많은 생각들이 유럽 전역으로 확대된 상상의 공간을 무대로 펼쳐지는 연유는 이런 사정에서 말미암는다. 인류의 진화사에서 탈향은 언제나 보다 나은 삶의 환경을 찾아나서는 모험이었다. 언제나 탈향의 동기를 이루는 것은 고향에서 겪게 되는 삶의 위기다. 그러나 고향을 떠난다고 해서, 새로운 환경에정착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과연 삶은 안전하고 평화로워지는가? 언제 어디서건 삶은 불안정하고 위험하다. 사회주의 체제 하의 체코에서 쿤데라가 직접 겪었던 체험이나 이로 인한 위기감은 이러한 엄연한 진실의 한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보헤미안의 상상력이라는 것도 너무 순진한 낭만주의에 불과한 것은 아닐지? 그러나 이러한 인류학적 이해 지평에 역사적 관점을 덧붙여 보면, 비록 순진한 수준일지라도, 낭만주의적 상상력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가 좀 더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과연 근대 이후, 즉 서구 중심적으로 말하자면 르네상스 이후 사람들에게 탈향의 욕망을 부채질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이런 물음에 대한 쿤데라의 답은 과학과 기술이고, 겉으로 표방된 이데올로기가 어떤 것이든 실제로는 전체주의적 야망을 이면에 감추고 있는 정치 제도다. 조금 거칠게 말하면 근대 이후 정치나 여타 사회 권력이 수행해 온 바는 과학, 기술, 지식을 동력과 변속 장치로 삼아 사람들을 진보라는 속도 경쟁으로 내몰아 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동안 사람들에게 탈향 충동을 부추겼던 것은 먼 곳에 대한 동경도, 다른 곳에서의 다른 삶에 대한 갈망도 아니었다. 과학과 기술 발전이 사탕발림처럼 선물하는 편안한 삶, 관료주의 사회와 정치 제도가 무책임한 착오와 감시의 횡포에 대한 대가로 제공하는 약간의 안전, 이런 것들이 사람들의 탈향을 부추겨 온 게 아닌가? 쿤데라의 맥락에서 벗어나 이야기하면 이런 유토피아적 기망(欺罔)의 구체적 항목들은 훨씬 더 많이 열거될 수 있으리라. 돈 놓고 돈 먹자는 논리의 금융자본주의의 뻔뻔함 같은 것을 필두로 해서. 이렇게 탈향의 의미를 타락으로 바꿔 놓은 비인간화된 세계를 쿤데라가 “덫이 되어 버린 세계”라는 표현으로 압축할 때, 이를 통해 반(反)근대주의자로서 쿤데라의 면모는 더할 나위 없이 명확하게 부각된다.


     물론 르네상스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가치 상실이라는 타락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시각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를 문학, 특히 소설과 맞닿은 접경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역사적 의미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는 소설의 본질적 의미와 소임을 인식할 수 있게 만드는 거울이 된다. 쿤데라가 생각하는 소설의 본질은 인간에 대한 앎, 인간의 실존적 가능성의 추구라 할 수 있지만 본질에 대한 물음이라고 해서 그것이 역사적 변화의 맥락과 무관한 추상적 질문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역사와의 관련성 위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제기되어야 하는 질문이다. 인간이 자신의 주인일 때 인간에게 필요했던 질문이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소크라테스적 물음이었다면 이제 고향에서 추방된 채 인간의 허울을 쓰고 있을 뿐 실제로는 자신으로부터의 이방인, 사회의 노예, 제도의 희생자, 현실 속 눈 뜬 장님에 지나지 않는 하찮고 무지한 존재로 전락했다고 할 때 새롭게 필요한 것은, 인간의 의미를 바깥에서 추궁할 수 있도록 하는 관점의 이동일 것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더 이상 인간만의 의미를 묻는 내성적 질문이 아니라 현실 세계의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며 ‘저것이 진정한 삶의 세계이고 인간인가’라는 겹의 물음을 동시에 던지는 반향(反響)적 질문이다. 쿤데라가 카프카나 브로흐 같은 작가들을 통해 집요하게 환기하는 것은 이런 질문의 절박한 필요성이거니와, 이런 관점 이동 역시 보헤미안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보헤미안적이건 아니건, 유럽 소설에 대한 쿤데라의 역사적 이해 방식은 적잖이 독특하다. (쿤데라 자신의 표현대로 말하면) 격세 유전적이고 (들뢰즈의 용어를 빌려 말하면) 리좀(rhyzome)적으로 짜인 시공간적 그물로, 쿤데라는 세르반테스, 디드로, 스턴, 프루스트, 카프카, 브로흐 같은 작가들을 포착하면서 이들이 공통적으로 탐색했던 인간의 실존 가능성에 대한 물음을 추적한다. 이렇게 듬성듬성 모습을 드러내는 작가들은 서구 문명의 고대적 원형과 현대적 변형을 이어 주는 징검다리 돌들이고, 이 문명의 궤적을 따라 방랑하는 보헤미안의 이정표다. 그러니까 서구 문명과 소설에 대한 쿤데라의 역사적 이해를 비유적으로 형태화하면, 유럽이라는 대지에서 고대 그리스에서 중세 말에 이르기까지의 고대 문명을 땅속 뿌리로 삼고 땅 위로는 근대 문명의 줄기가 우뚝하게 자라 많은 전문화된 과학들의 가지를 뻗어 그 끝에 잎사귀와 열매를 맺고 있는 커다란 나무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쩌면 이 나무는 곧 고사의 운명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 ‘축소라는 흰 개미’가 갉아 먹고 있어서 인본주의라는 수액이 뿌리에서 가지 끝까지 잘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람하지만 허약한 이 나무에 문학의 가지, 소설의 가지는 있는가? 그 가지는 건강하고 튼튼한가? 앞서 열거한 작가들을 이 거대한 나무 그루터기에서 뻗어 있었던 가지의 흔적으로 남은 옹이들이라 할 수 있다면 이 옹이들을 매만지는 쿤데라의 상념은 이들을 잇는 가지가 어디선가 또다시 뻗어 나와 나무 전체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으리라는 기대와 소망으로 분망할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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