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에 대하여 _ 09 정체성

비평

09 정체성
자긍심,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발생하기 어려운 감정

강신주(철학자)

 


     이렇게 일이 커질 줄을 몰랐다. 장마르크는 자신의 작은 행동이 거대한 폭풍우를 낳게 되는 나비의 날갯짓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동거하는 연상의 여자 샹탈이 어느 날 애잔하게 자신에게 토로했던 슬픔이 사건의 시작이다.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더라.” 동거하는 남자에게는 너무나 무례한 이야기겠지만, 장마르크는 여전히 샹탈을 사랑하고 있었나 보다. 애써 치미는 질투의 감정을 삭이고 나서 그는 샹탈의 슬픔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모든 여자는 노화의 정도를 남자들이 그들에게 표출하는 관심, 혹은 무관심을 척도로 가늠한다.”라고 애써 짐작하고 나서 장마르크는 미지의 스토커가 되어 샹탈에게 편지를, 그러니까 그녀를 항상 주시하고 있다는 편지를 보내게 된다. “나는 당신을 스파이처럼 따라다닙니다. 당신은 너무, 너무 아름답습니다.” 그렇게 나비의 날갯짓이 시작된 것이다. 밀란 쿤데라가 1997년에 출간한 소설 『정체성』은 바로 이렇게 시작된다.

 

     다른 편지들도 속속 들이닥쳤고 그녀는 그것을 점점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편지는 지적이며 점잖았고 조롱기나 장난기도 전혀 없었다.(……) 유혹이 아닌 숭배의 편지였다. 혹시 거기에 유혹이 있었다면 장기적 안목으로 계획된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방금 받은 편지는 보다 대담했다. “사흘 동안 당신을 보지 못했습니다. 당신을 다시 보았을 때 너무도 가볍고 위로 떠오르고자 갈망하는 당신 모습에 나는 경탄하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존재하기 위해서는 춤을 추고 위로 솟구쳐야만 하는 불꽃을 닮았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늘씬한 몸매로 당신은 경쾌하고, 디오니소스적이고, 도취한 듯한 야만적인 불꽃, 그 불꽃에 둘러싸여 있더군요. 당신을 생각하며 나는 당신 알몸 위에 불꽃으로 엮은 외투를 던졌습니다. 당신의 하얀 육체를 추기경의 주홍색 외투로 가렸습니다. 이렇게 가리운 당신 몸, 빨간 방, 빨간 침대, 빨간 추기경 외투, 그리고 당신. 아름다운 빨간 당신이 눈에 선합니다!” 며칠 후 그녀는 빨간 잠옷을 샀다.


     장마르크는 당혹스럽기만 하다.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 혹은 누군가가 찬양하고 숭배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샹탈은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편지에 진주 목걸이가 아름답다고 하자 장마르크의 선물이지만 너무 화려하다며 자주 걸지 않았던 진주 목걸이를 자랑스럽게 걸고 외출하는 것이다. 빨간 옷을 이야기하면 샹탈은 빨간 잠옷을 입고 그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여자로 변신한다. 지금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마저 바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샹탈을 찬양하는 스토커의 편지 내용이 전적으로 그녀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찬양과 숭배의 편지를 쓰기 위해 장마르크는 과거보다 훨씬 더 치밀하게 그녀를 관찰했기 때문이다. 스토커의 편지, 그러니까 장마르크의 편지는 그녀가 망각하고 있었던 자신의 매력을 비춘 스포트라이트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스포트라이트가 그녀에게 엄청난 자기만족, 혹은 자긍심이란 감정을 부여한 것이다.


자긍심(acquiescentia in se ipso)이란 인간이 자기 자신과 자기의 활동 능력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기쁨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자신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확인할 때, 샹탈이 아닌 다른 누구라도 기쁨을 느끼기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자긍심이다. 자긍심은 얼마나 매력적인 감정인가. 길거리를 걸을 때도 우리의 걸음걸이는 레드 카펫을 걷는 여배우처럼 당당하고 아름다울 것이고, 낯선 사람과 대화할 때도 우리의 말과 행동은 거칠 것 없는 아우라를 뿜을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평범한 사람이 자신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자각한다는 것은, 그래서 자긍심이라는 감정에 사로잡히는 놀라운 경험을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사람들은 대개 어떤 피해 의식에 사로잡혀 위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샹탈이 받은 스토커 편지가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당신이 얼마나 많은 보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를 알려 주는 숭배자가 없다면, 자긍심을 갖기는 너무나 힘든 법이니까.
     그렇다. 장마르크는 제대로 오판한 것이다. 연상의 동거녀 샹탈이 자신의 노화를 걱정했던 것은 아니다. 샹탈의 우울과 슬픔은 사실 자신의 삶에 대한 자긍심이라는 감정이 연기처럼 빠져나가고 있다는 자각이었던 것이다. 하긴 자긍심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누구라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늙은이가 되는 것 아닐까. 그래서 장마르크가 보낸 스토커 편지가 중요한 것이다. 비록 동정심과 연민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스토커 편지는 샹탈에게 잃어버린 자긍심을 되찾아 주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연애편지는 샹탈만이 아니라 장마르크의 ‘정체성’도 변화시킨다는 점이다. 편지를 쓰기 위해서는 장마르크가 샹탈의 매력에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장마르크는 샹탈을 숭배했고 사랑했던 자신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여러 모로 많이 변모한 샹탈을 새롭게 사랑하게 된 남자로 변한 것이라고 말해도 좋다.
     스토커의 편지가 장마르크가 보낸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화를 참지 못한 샹탈은 순간적이나마 그를 떠나 버린다. 같이 있던 사람이 떠났을 때에만 우리는 떠난 사람이 자신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때늦게 자각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샹탈과 장마르크에게도 마찬가지다. 두 남녀는 자신들이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깨닫게 된다. 그러니 두 사람이 다시 런던에서 재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를 일이다. 우여곡절 끝에 화해를 한 두 사람은 잠자리를 함께할 때 마침내 알게 된다. 사랑은 서로를 주목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아가 서로를 숭배하면서 자긍심을 심어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소설 『정체성』의 마지막 장면은 우리에게 애잔하지만 깊은 감동을 준다. “그는 몸을 조금 일으켜 입술을 그녀에게 대려고 했다.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냥 당신을 보기만 할 거야.’ 그러더니 다시 말했다. ‘밤새도록 스탠드를 켜 놓을 거야. 매일 밤마다.’”

 

 

작품에 대하여 _ 08 느림

비평

08 느림
‘검은 유머’를 숨긴 유희적 광시곡


김병욱(성균관대 겸임 교수)


     『느림』은 쿤데라가 체코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쓴 첫 소설이다. 언어가 바뀌면서 작품 형식도 완전히 달라졌다. 그가 오랫동안 애용해 온 일곱 부 구성 형식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그의 말을 직접 들어 보자. “『불멸』을 발표하면서 나는 첫 소설 때부터 다양하게 발전시켜 온 내 소설 형식(일곱 부 구성)의 모든 가능성을 소진했다. 그러자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졌다. 내가 소설가로서의 길 끝에 도달한 것이거나 아니면 앞으로 전혀 다른 새로운 길을 발견하거나 둘 중 하나라는 사실이 말이다. 프랑스어로 글을 써야겠다는 주체할 수 없는 욕망도 아마 거기에서 비롯된 것 같다. 완전히 다른 곳에,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길에 서 보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이다.”(《게임의 규칙》, 1995년 5월호) 요컨대 이 작품은 그가 길 끝에서 찾아낸 새로운 길이요, 그의 새로운 시작, 그의 새로운 탄생을 알리는 작품이라는 얘기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달라진 걸까? 이 작품이 발표되었을 때 그를 서면으로 인터뷰한 기 스카르페타는 그 변화를 이렇게 요약한다. “언어가 프랑스어로 바뀌면서 쿤데라는 다른 어조에, 다른 세계에, 소설 예술의 새로운 차원에 도달한 것 같다. 어떤 자유로움을 획득했다고나 할까. 한결 경쾌하고 환상적이며, 즉흥에 훨씬 더 많은 자리를 내주는 것 같다. 이전 소설들의 건축적 엄격함을 버리고, 랩소디〔狂詩曲〕적인 서사 기법을 택한 것이 그 징표다.”(「쿤데라의 희유곡」, 『소설의 황금시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récit)와 담론(discours)이라는 두 가지 음역(音域)을 합쳐 꼬아 나가는 그의 독특한 소설 기법까지 달라진 것은 아니다. 먼저 전자부터 일별해 보자. 『느림』은 서로 무관한 듯이 보이는 여러 이야기가 나란히 펼쳐지다가 결국 하나로 엮이며 한 편의 코미디를 이루는 소설이다. 대중 앞에서 수모를 당하고는 비서로 일하는 쥘리를 유혹함으로써 복수하려 하는 아나키스트 성향의 청년 뱅상 이야기와, 예전에 잠시 사귀었던 임마쿨라타라는 방송 기자에게 끊임없이 쫓겨 다니며 괴롭힘 당하는 스타 지식인 베르크 이야기, 그리고 러시아의 체코 침공 때 박해받은 체코 과학자로서 뭇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나 조롱당하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체호르집스키 이야기가 그렇다. 이 등장인물들은 모두 학술 대회가 열리는 어느 호텔(옛날에 성이었던 호텔로, 화자도 이곳에 투숙하고 있다.)에 모이는데, 그들 이야기를 하나로 묶는 ‘매듭’ 구실을 하는 곳이 바로 호텔 수영장이다. 이곳에서 뱅상은 욕망을 이루지 못하고 쥘리를 놓치며, 임마쿨라타는 물에 빠져 죽으려다 애인 손에 구출되고, 체호르집스키는 그들 일에 끼어들다 애인과의 다툼 끝에 마지막 하나 남은 진짜 이를 잃게 된다. 이렇게 소설이 한바탕 소극으로 막을 내리기까지, 화자의 입을 통해 발설되는 많은 성찰(담론)들이 곳곳에서 이 유희적인 이야기와 뒤얽힌다. 느림에 대한, 쾌락주의에 대한, 무례함에 대한, 춤꾼들에 대한, 우리 모두에게 내면화된 ‘카메라의 시선’에 대한, 알몸에 대한, 발기 환상에 대한 성찰 등등.
     그런데 이 소설에는 위의 둘과는 음역이 또 다른, 마치 소설 속 소설같은 또 하나의 이야기가 첫 번째 이야기를 조명하는 먼 배경처럼 삽입되어 있다. 이 소설이 해설을 곁들여 전하는 비방 드농의 18세기 소설 「내일은 없다」다. 여기에 등장하는 젊은 기사는 T 부인과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 자신이 조종당했음을 깨닫는다. 말하자면 그녀 남편의 의심을 피하는 도구로, 관계가 좀 더 지속적이고 돈독한 다른 누군가와의 외도를 숨기기 위한 도구로 이용되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하지만 이 완벽한 행복의 순간이 T 부인에게도 단지 그런 계책에 불과한 것만은 아니었으리라는 가정도 배제되지 않는다.
     소설 속에 삽입된 이 이야기가 두 시대를 대면시키는 효과를 낸다는 점에서(화자는 소설 말미에서 기사와 뱅상을 실제로 대면시키기까지 한다.) 18세기는 이 시대의 시금석으로 등장한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중에서도, 모든 것이 언제라도 유포될 수 있는 라클로의 세계가 아니라, 비밀 엄수가 최고 가치로 여겨지는 비방 드농의 세계다. 『느림』은 이 18세기 세계와 오늘의 세계를 마치 양립 불가능한 두 패러다임인 양 대립해 나간다. 전자가 심리보다는 세련된 전략과 술책으로 쾌락을 음미하고 즐기며 추구하는 시대라면, 후자는 감정적 혼란과 사랑의 이상화를 통해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강화하고 고양하고자 하는 시대다. 전자가 육체적 모험에 ‘형식’을 부여할 줄 아는, 즉 예술을 추구하는 시대라면, 후자는 충동적이고 돌발적이고 불합리하고 무질서한 반응을 좇는 시대다. 육체적 관능을 그 자체로 즐기는 18세기 기사와는 달리, 오늘날의 뱅상은 쾌락(섹스)을, 삶을 그 자체로 향유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기 스카르페타는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이 보이는 행동이 ‘액션’이라기보다는 ‘리액션’에 가깝다는 점을 지적한다.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의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것들이 모두 남에게서 받은 모욕에 복수하려는 충동적인 반응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자기보다 좀 더 기민하고 꾀바른 춤꾼에게 패한 베르크는 더 한층 강도 높은 인도주의적 행동으로 자신의 구겨진 이미지를 회복하고자 하고, 베르크에게 차인 임마쿨라타는 똑같은 모욕을 애인에게 가함으로써 복수하며, 정장 차림 청년과의 설전에서 공개적으로 망신당한 뱅상은 자신의 남성다움과 유혹 능력을 과시함으로써 이 모욕을 액땜하려 하고, 체호르집스키 역시 자신의 거듭된 실수에 대응하기에 바쁘다. 누군가가 자신을 조롱하는 기미만 보이면 박해받던 시절의 강제노동 덕에 얻게 된 강인한 육체를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이다. 모두가 마치 어떤 덫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사람들같다. 덫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지만 그럴수록 더 고약한 덫 속으로 다시 떨어진다. 대체 무엇이 그들을 옭아매고 있는가? 그들로 하여금 그렇듯 허겁지겁 리액션을 취하게 하는 동기는 무엇인가? 분명 그것은 끊임없이 실추되는 자신들의 이미지를 얼른 회복해야겠다는 강박관념이다. 말하자면 어떤 이상화된 이미지가 그들을 원격 조종하면서 그들의 행동을 리액션으로 만들고, 그들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의 삶을 향유하는 주체가 아니라 예정된 어떤 이미지를 흉내 내는 시뮬라크르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가, 주체성을 상실하고 자기 이미지의 노예가 되어 행동하는 ‘존재의 행복한 춤꾼들’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명저 『시뮬라시옹』에서, 오늘날을 시뮬라크르들의 시대로 규정하면서 인간의 미래에 대해 매우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는다. 과거, 신이 죽었을 때는 신의 죽음을 알릴 니체가 있었고 신의 죽음으로부터 연유하는 허무주의가 세기말의 음울하고 음침한 색깔을 띠었으나, 이제 신마저도 죽은 것이 아니라 파생실재가 되어 버린 우리 시대의 허무주의는, 그러한 역사적 허무주의 형태들보다도 훨씬 근본적이고 위기적인 투명성의 허무주의라고 말이다.

     사실 아녜스의 죽음 이후 쿤데라의 작품들이 펼쳐 보이는 오늘날의 세계와 인간에 대한 비전 역시 적잖이 비관적이다. 시뮬라크르화한 인물의 전형 베르크라든가 뱅상과 쥘리의 ‘섹스 시뮬레이션’ 등, ‘존재의 행복한 춤꾼’으로 전락한 현대인의 존재 양식을 18세기 존재 양식과 대비한 이 작품은 물론이요, 소설 구성 자체를 통해 현실과 꿈의 경계를 지워 버린 『정체성』, 그리고 귀향 불능과 존재의 기반 상실을 다시 한 번 탐색하는 『향수』 등의 후속 작품들을 통해, 쿤데라는 부단히 이런 물음들을 제기하고 있는 것 같다. 아직도 우리에게 온전히 남아 있는 구체적 생활 세계(인간 실존의 장)가 존재하는가? 나와 나의 이미지, 현실과 꿈의 경계가 존재하기나 하는가? 이 시뮬라크르의 시대에, 소설에게 남아 있는 새로운 탐구 가능성은 무엇인가? ……갈수록 쿤데라의 호흡이 짧아지고 문장이 간결해지는 이유도 아마 오늘날의 이러한 존재 현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개인’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된 위대한 서사 형식으로서의 소설 예술이 ‘개인’의 시뮬라크르화와 더불어 어떤 종착점에 이르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다. 쿤데라는 이 희유(嬉遊)적인 작품을 있는 그대로 즐겨 주길 바라지만, 읽으면서 절로 쓴웃음을 머금게 되는 것은 그래서다. 아무래도 이 작품은 자유롭고 경쾌한 외양 속에 몹시 ‘검은’ 유머를 숨긴, 21세기를 위한 광시곡 같다.

 

 

작품에 대하여 _ 07 불멸

비평

07 불멸
『불멸』을 읽는 또 다른 방법

김병욱(성균관대 겸임 교수)

    

     『불멸』은 어떤 소설인가? 아녜스와 로라라는 두 자매의 경쟁 관계에 대한 이야기와, 괴테와 베티나 폰 아르님 사이의 오해에 대한 이야기인가? 미디어 권력의 자의적인 폭력에 맞서는 라디오 아나운서와, 모자도 벗지 않은 채 뒷짐을 지고 당당히 황녀 일행을 대면한 베토벤의 행동에 대한 이야기인가? 도시를 오염시키는 자동차 무리에 대한 증오심에서 밤마다 타이어에 구멍을 내며 돌아다니는 대학 교수 이야기인가? 루벤스라는 별명을 가진 남자의 성생활과 릴케, 엘뤼아르, 로맹 롤랑 같은 시인들의 ‘영원한 여성’ 숭배에 대한 이야기인가? 점성학의 은유적 가치에 대한 이야기, 괴테와 헤밍웨이의 사후 만남에 대한 이야기인가? 에로티시즘의 필수 요소인 수줍음의 복권에 대한 이야기, 팡테옹에 묻힌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인가? 러시아인들에게서 두드러지는 ‘영혼의 이상 팽창’에 대한 이야기인가? ……사실 이 작품에서 다뤄지는 주제들의 다양성과 이질성은 일일이 다 열거조차 하기 힘들다. 딱히 중심 줄거리라 할 만한 것 없이, 내용과 색깔이 다른 여러 갈래의 이야기들이 나란히 펼쳐지는 작품이기에,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이 소설이 어떤 소설인지 요약이 불가능해 다른 사람에게 소설 내용을 이야기해 줄 수도 없다. 그렇다면 쿤데라의 작품들 중에서 ‘구조적으로 가장 복잡한’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 소설을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묘하게도 『불멸』은 어떤 소설인가 하는 우리의 물음은 이렇듯 ‘읽기’ 문제로 연결되며, 그리고 ‘읽기’ 문제는 곧바로 우리를 이 작품의 ‘구성’ 문제로 인도한다. ‘『불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물음은, ‘일견서로 무관해 보이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이 소설의 이야기 조각들은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작품을 구성하는가?’라는 물음으로 직결되는 것이다.

     프랑스 문학 평론가 기 스카르페타는 쿤데라가 이 작품에서 선보이는 “대단히 엄밀하고 유연한” 구성 예술을 음악 작곡에 빗대어 설명한다. 그는 『불멸』에 쓰인 글쓰기 원칙으로 네 가지를 강조하는데, 그 첫째는 ‘유기적 단일성’에 종속되지 않는 시퀀스들의 상대적 자립성이다. 그래서 이 작품의 이야기 조각들은 마치 소나타나 심포니를 구성하는 악장들처럼, 논리적이거나 연대순으로 연쇄되는 것과 무관하게 하나씩 따로 음미될 수 있다는 얘기다. 둘째는, ‘사건의 일치’를 의도적으로 교란하여 중심적인 단일 줄거리 대신 여러 목소리 혹은 여러 ‘줄거리 선들’의 짜임으로, 다시 말해 호모포니 대신 폴리포니로, 단순 멜로디 대신 대위법으로 소설을 구성한다는 점이다. 셋째는, 전통 소설의 인과관계(소설의 인접한 두 시퀀스 간의 연속과 결과 관계를 설립하는 원칙)를 전복한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서 연대는 끊임없이 분해되고 재배치되며 ‘지연된 인과 관계’(혹은 불연속적인 모티프 전개)의 논리에 따라 가지를 뻗는데, 음악에서는 이런 구성을 ‘푸가’라고 한다.(예를 들면 고속도로를 걸어가다 교통사고를 일으키는 아가씨 에피소드가 그렇다. 이 모티프는 소설 초반에는 사소한 디테일, 즉 라디오의 두 광고 사이에 흘러나오는 토막 뉴스로 나타났다가, 뒤에 가서 그런 행동의 동기를 상상하는 화자의 성찰 대상이 되며, 다시 얼마 후 마치 화자가 그녀 생각과 느낌 속으로 침투한 양 내부에서 서술되다가, 결국에는 단순 에피소드가 아니라 소설을 대단원으로 이끄는 대파란, 즉 아녜스의 죽음이라는 사건의 중요한 매듭이 되는 식으로 불연속적인 전개를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상이한 여러 ‘이야기 선’들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몇몇 주요 테마들(및 부속 모티프들)의 존재다. 여러 갈래로 전개되는 이야기들을 접합해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이것들이다. 즉 사건의 일치에 의한 단일화가 아니라, 테마와 모티프 장치에 의한 단일화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소설을 상이한 두 가지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우선 우리의 독서 습관대로, 여느 소설을 읽듯 ‘수평적으로’ 이 작품을 읽어나갈 수 있다. 말하자면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시퀀스들의 연쇄를 그대로 따라가며 순차적으로 읽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만 읽고 나면 마치 함정에 빠진 듯한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쿤데라의 작품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이 느끼는 난해함은 대개 그의 구성 예술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함정이 주는 즐거움도 있으니 이렇게 읽어도 나쁠 것은 없다. 더욱이 소설의 시퀀스들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읽는 즐거움을 가득 안겨 주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 작품을 다르게 읽을 수도 있다. 말하자면 음악적으로, ‘수직적으로’ 읽어 볼 수 있다. 목소리들의 폴리포니에, 변주들의 유희에, 분산과 접합의 교묘한 변증법에 유의하여 이 작품을 읽어 가면서 쿤데라가 정한 ‘게임의 규칙들’을 조금씩 발견해 나가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 보자. 『불멸』은 이전에 발표된 그의 다른 소설들처럼 일곱 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 개의 주된 ‘이야기 선(線)’이 번갈아 가며 이 일곱 부를 수평적으로 지배한다. 첫 번째 선은 아녜스 이야기다. 동생 로라나 남편 폴과의 갈등 관계를 보여 주는 이 이야기에는 폴의 이야기가 대위법적으로 전개되며, 딸 브리지트와 아베나리우스 교수가 보조 인물로 등장한다. 이 선은 소설의 홀수 부들(1, 3, 5, 7)을 지배한다. 두 번째 ‘이야기 선’은 괴테와 베티나 폰 아르님의 관계에 대한 성찰로서, 여기에는 베토벤이나 헤밍웨이 같은 보조 인물들이 등장한다. 2부와 4부를 지배하는 이 선은 홀수 부들과는 달리 역사적이고 논증적인 음색이 도드라진다. 그리고 위의 둘과는 확연히 다른 세 번째 이야기 선, 즉루벤스라는 별명을 가진 남자의 성생활 이야기 선이 6부를 지배한다.
     수평적으로만 보면 이 소설에서는 내레이션이 다른 이 세 선이 부를 달리 하며 번갈아 펼쳐질 뿐이지만, 수직적으로 읽으면 이 선들을 간간이 연결해 주는 모티프들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첫 번째 선의 상황이나 등장인물이 두 번째 선에서 환기되기도 하고, 어떤 테마들은 세 선을 모두 관통하기도 한다. 예컨대 첫 번째 선의 로라와 두 번째 선의 베티나는 ‘불멸에 대한 욕망의 몸짓’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연결되고, ‘깨진 안경’이라는 에피소드는 격렬한 절교 장면 둘(베티나에게 화가 난 괴테 부인 크리스티아네가 그녀의 안경을 깨트리는 장면과, 아녜스가 로라의 안경을 깨트리는 장면)을 두 세기라는 시차를 뛰어넘어 연결하며, 젖가슴 애무 모티프(‘수줍음’의 에로티시즘에 딸린 모티프)는 두 번째 이야기 선의 괴테-베티나 관련 에피소드와 세 번째 선의 루벤스-아녜스 관련 에피소드를 연결한다. 어디 이것들뿐이겠는가. 보기에 따라서는 이 작품 전체에 이러한 반향들이 가득 울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불멸』을 수평적으로만 읽을 게 아니라, 이렇게 수직적으로 읽으면서 테마와 그 변주들(메아리들)을 부단히 음미해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직 종횡으로 여러 번 되풀이해서 읽어야만 이 작품의 참맛을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불멸』의 중심 주제는 단연코 ‘이미지의 지배’다. 사실 『불멸』은 전작(前作)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6부, 즉 이데올로기들이 지배하는 시대가 끝나고 키치가 빚어낸 이미지들이 지배하는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대행진」에서 예고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들은 역사에 속하지만, 이마골로기의 통치는 역사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라고 이 작품의 화자는 말한다. 이마골로기들이 지배하는 세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실재가 이미지에 자리를 내어주고 영원히 뒤로 물러나 버린 세계, 대행진을 이끈 ‘신의 눈’이 ‘카메라의 눈’으로 결정적으로 대체되어 버린 세계, 그리하여 자신의 ‘이미지’를 최대 다수의 대중에게 먹이로 제공하는 일이 일상적 의무가 되어 버린 세계다. 이러한 세계에서 인간이란 자신의 진정한 ‘자아’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자신의 이미지와 다르지 않은” 존재다. 각자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나타낸다고 생각하는 이런저런 모든 얼굴들은 어떤 “미의 마스크”, 어떤 “자아의 이미지”와 다르지 않으며, 시선(視線)은 사람들에게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난 어떤 이미지(일종의 홍보용 정체성)를 제의하면서, 각자 그 이미지에 맞춰 살 것을 강요한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이미지의 이러한 지배를 거부하고 다르게 존재할 가능성이 남아 있는가? ‘얼굴 없는 세계’를 꿈꾸는 이 작품의 여주인공 아녜스는 바로 이 물음에서 탄생한 것 같다. 그런 세계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자신의 자아로 존재하지 않아야 함을, 비존재로 존재해야 함을 의미한다.(‘작별’의 화신 아녜스의 이 아름다운 독백을 다시 한 번 음미해보자. “산다는 것, 거기에는 어떤 행복도 없다. 산다는 것, 그것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고통스러운 자아를 나르는 일일 뿐이다. 하지만 존재, 존재한다는 것은 행복이다.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자신을 샘으로, 온 우주가 따뜻한 비처럼 내려와 들어가는 돌 수반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사실 이 작품 곳곳에서 우리는, 이미지의 지배가 어떻게 우리의 ‘구체적인’ 삶을 소거하는지를 통찰하는 쿤데라의 예리한 시선과 맞닥뜨린다. 그 시선에는 전염력이 있다. 이 작품을 읽고 나면 주변 세계를 이전처럼 볼 수 없게 되는 이유는 그 시선에 전염되는 탓이다. 기 스카르페타는, 쿤데라의 소설은 “우리를 좀 더 깨어 있게 하고 좀 더 똑똑하게 만드는” 소설이라면서 그것이 그가 소설 작품에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라고 덧붙인다. 동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