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에 대하여 _ 10 향수

비평

10 향수
21세기의 오디세우스가 부르는 망명과 귀환의 노래

박성창(서울대 교수)

 

망명은 편도 여행이다. 되돌아갈 ‘고향’이란 없다. 과거에도 결코 없었다. — 스튜어트 홀


     쿤데라가 펴낸 책 속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간략한 저자 소개가 실려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났다. 1975년 프랑스에 정착하였다.” 작가가 살아 온 복잡한 이력을 긴 문장으로 피력하는 통상적인 저자 소개와는 무척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작가의 전기적 삶과 작품을 분리해서 보아야 한다는 쿤데라의 신념이 반영된 결과다. 그럼에도 쿤데라의 작품에서 자전적 요소를 찾기란 어렵지 않으며, 최근 소설로 올수록 자전적 경향은 강화된다. 또한 쿤데라는 프랑스로의 이주 혹은 망명이 그의 삶뿐만 아니라 작품의 핵심 열쇠임을 인정한 바 있다. 예컨대 어느 인터뷰에서 한 발언을 보자. “프랑스에서 나는 다시 태어났다는 잊을 수 없는 감정을 겪었다. 육 년간의 휴식 끝에 나는 조용히 문학으로 되돌아왔다. 내 아내는 내게 ‘프랑스는 당신의 두 번째 조국이야.’라고 줄곧 말하곤 했다.”

      쿤데라가 체코어로 쓴 마지막 소설인 『불멸』의 무대는 프랑스다. 그가 체코를 떠나 프랑스로 망명하기까지의 과정이 소설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가 프랑스어로 쓴 마지막 소설인 『향수』의 무대는 정반대로 체코다. 『향수』는 강제로 먼 길을 떠나거나 타지로 망명해야 했던 사람들이 공산주의 체제가 몰락하면서 돌아오기 시작한 1980년대 말에 벌어지는 귀환의 서사가 담긴 작품이다. 그러나 자신의 첫 번째 조국이나 자신이 태어난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나, 되돌아가야 한다는 의지를 담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귀환의 불가능성을 그린 특이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정작 쿤데라 자신도 1989년 이후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프랑스가 제2의 조국이 된 쿤데라와 체코 사회의 오해는 그의 이런 결정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쿤데라의 어느 작품보다 『향수』에서 자전적 요소가 강하게 나타난다 하더라도 이 작품에서 작동하는 소설의 미학적 원리를 간과해서는 곤란하다. 그가 여러 곳에서 되풀이해서 말했듯이 소설의 의미는 작가의 삶을 이야기하거나 그의 행동과 체험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적 ‘상황’에 질문을 던지는 데 있다. 이 소설의 실존적 상황이란 조국의 해방과 더불어 갑작스럽게 생겨난 새로운 실존의 ‘덫’에 던져진 추방된 인간의 상황이다. 이러한 실존적 상황 속에서 쿤데라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등장인물들과 함께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함께 모색하고자 한다. 이러한 새로운 실존적 상황에서 이제껏 겪어 보지 못한 경험이 존재의 어떤 새로운 면모나 알려지지 않은 가능성을 발견하고 이해하게 해 주는가? 시대가 급변하고 국경이 무너지고 세계가 완전히 개방될 때 가족간의 연민, 향수, 조국에 대한 애착, 자기 삶에 대한 추억 같은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에 어떤 일이 생겨나는가? 마지막으로 망명 혹은 귀환 같은 주제가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존적 인물(혹은 ‘실천적’ 인물)들에 의해 접근될 때 그 의미는 어떤 방식으로 해명될 수 있는가?
     이 소설은 1968년 이후 프라하에서 망명한 두 인물 이레나와 조제프가 다시 프라하로 되돌아가면서 겪는 일련의 사태를 그렸다는 점에서서양 문학의 고전인 『오디세이아』를 그 바탕에 깔고 있다. 쿤데라에 따르면 서구인들은 타지에서의 위태로운 삶과 귀환을 통한 안락한 삶 사이에서 늘 귀환을 선택했으며 이는 미지에 대한 열정적 모험 대신 익숙한 것에 대한 예찬을 낳았다. 페넬로페의 고통은 찬양하면서 칼립소의 눈물은 비웃는다. 이것이 『오디세이아』가 서구인들에게 주는 메시지다. 이 소설은 『오디세이아』로 대표되는 서양의 신화, 즉 고향이란 존재하며, 고향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욕망이며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가능하다는 믿음을, 이레나와 조제프의 귀환의 서사를 통해 깨뜨린다.
     이레나에게 프랑스로의 망명이 강요된 것과 마찬가지로 체코로의 귀환 또한 자발적인 선택의 결과가 아니다. 이레나의 친구인 실비가 “너의 위대한 귀환이 될 거야.”라면서 조국인 체코로 돌아갈 것을 강력하게 권유하지만 사실 연인, 자식, 직장, 친구 그리고 아파트 등 그녀의 모든 삶은 이 십 년 이상을 보낸 파리에 있다. 망명은 이레나의 바깥에서 그녀에게 강요된 것이기에 이레나는 수년 동안 자신을 희생자로 여기는 데 익숙하다. 그러나 자신이 희생자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그녀의 귀향 또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레나의 이러한 삶의 궤적은 자신이 태어난 곳을 떠나 세계 시민으로 살아가기를 자처하는 그녀의 애인 구스타프의 삶과는 정반대다. 그는 실패한 결혼에서 자발적으로 벗어나기 위해 스웨덴을 떠났기에 그곳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레나는 자기 자신에 충실하며 망명의 스테레오 타입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반면에 구스타프는 세계 시민의 스테레오 타입에 따라 행동하며 그의 행동은 자연스럽고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여기서도 쿤데라 소설의 주된 주제인 실존적 삶의 역설적 요소가 잘 드러난다.

     체코로 돌아간 이레나의 삶을 우리는 잘 안다. 친구들은 이레나를 이해하지 못하며 대화를 통한 의사소통은 완전한 실패로 돌아간다. 체코에서 그녀는 이제 새롭게 망명자 신세가 된다. 이레나는 체코인들에게 조국을 버리고 떠난 배반자로 받아들여진다. 망명은 너무 손쉬운 선택이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이레나는 이중의 오해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녀는 한편으로 망명을 선택한 자로서 적의 뒤에 숨어 살면서 고통을 겪었던 사람들에게는 배반자 낙인이 찍히며,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나라에서는 희생양의 이미지로 굳어진다. 그렇다면 조제프의 귀환은 어떠한가.
     귀환과 관련해서 조제프가 겪는 일련의 에피소드들은 오디세우스의 귀향과 정반대다. 호메로스의 올리브 나무 같은 것을 주위에서 알아볼 수 없었던 그는 돌아온 조국 체코의 풍경을 알아보지 못한다. 기억의 순간 또한 도래하지 않는다. 조제프는 단지 알 수 없는 이상한 나라를 방문하고 있을 뿐이다. 조제프의 머릿속에서는 다음 질문들만 맴돌 뿐이다. “오늘날 ‘오디세이아’를 생각할 수 있는가? 귀환의 서사시는 아직도 우리 시대에 속하는가? 예부터 있던 올리브 나무가 쓰러지고 주위에서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다면 오디세우스가 이타카의 기슭에서 깨어났던 그 아침에 그는 위대한 귀환의 음악을 황홀경 속에서 들을 수 있었을까?” 조제프는 친구들이나 가족으로부터 소외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된다. 고등학교 시절 자신이 쓴 일기에서 아무런 기억의 흔적도 찾지 못한 그는 이전의 자아와 동화되지 못하며 완전한 이방인으로 느낀다. 시간과 더불어 모든 것을 지워 버리고 변형하는 기억의 메커니즘은 이 소설에서 조제프의 귀향을 통해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작품에서 쿤데라가 프랑스어로 쓴 『느림』이나 『정체성』 같은 소설들에서 이미 선보였던 소설적 ‘푸가’라는 형식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쿤데라는 체코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소설을 쓰기로 한 순간부터 최소한의 텍스트 공간 속에 최대한의 의미를 담으려고 노력했다. 체코어로 쓰인 소설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문체의 간결함이라든가 쉰 개의 짧은 장들로 분할된 소설 구성에서 형식적 완성과 주제의 밀도를 추구하는 쿤데라 소설의 미학적 원리가 잘 드러난다. 어떠한 세부적인 사항도 작품 속에 등장하는 순간 버려지는 법 없이 여러 차례 반복, 변주되면서 모티프로 변화한다. 이 소설의 주된 모티프인 향수, 망각, 오디세우스, 쇤베르크, 거울, 소음으로 변형된 음악 외에 다른 모티프를 찾아내는 것은 독자의 몫일 것이다.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초반부에 제시된 여러 모티프들이 화음을 일으키고 한 곳에 모이면서 더 웅장하고 밀도 높은 구성을 보이는 소설적 ‘푸가’의 원리가 이번 소설에서는 더욱 성숙한 장인의 솜씨로 다듬어진다. 아직 쿤데라는 『향수』 이후로 소설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 현재로서는 그가 발표한 마지막 소설에 해당하는 이 작품에서 『농담』 이후 무려 삼십오 년 동안 꾸준하게 이어진 그의 작품 세계가 추구했던 미학적 프로젝트의 가장 완성되고 성숙한 성취를 주목하는 것은 『향수』를 읽는 독자의 커다란 즐거움이자 의무일 것이다.
     이 작품의 프랑스어 원제는 Ignorance이다. 유럽의 언어들에는 향수를 나타내는 다양한 표현이 있는데 돌아가고자 하는 채워지지 않는 욕구에서 비롯된 ‘노스탈지’가 그 대표적 어휘다. ‘노스탈지’는 그리스어로 귀환을 뜻하는 ‘노스토스(nostos)’와 괴로움을 뜻하는 ‘알고스(algos)’의 합성어다. 유럽인들은 대개 이 단어에 기원을 둔 어휘들을 사용하는데 이는 고향에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생긴 슬픔만을 의미할 뿐이다. 쿤데라는 ‘노스탈지’라는 일반적인 어휘 대신 ‘이뇨랑스(ignorance)’라는 어휘를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쿤데라에 의하면 어원상으로 향수는 무지의 상태에서 비롯된 고통으로 나타나며 이는 일반적인 ‘노스탈지’보다 더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뇨랑스’라는 단어는 이 소설의 한 대목을 인용하자면 “너는 멀리 떨어져 있고 나는 네가 어찌 되었는가를 알지 못하는 데서 생겨난 고통. 내 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고 나는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하는 고통”을 매우 적절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이뇨랑스’의 우리말 대응어인 ‘무지’는 이러한 어원상의 의미를 전달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향수’라는 단어를 이 소설 제목으로 택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쿤데라의 자세한 설명은 이 소설의 2장을 참조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