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에 대하여 _ 14 만남

비평

14 만남
예기치 않음으로 가득 찬
쿤데라의 상상 갤러리

한용택(교수)

 


     최대한 간략하게 비유해서 말한다면, 한 저작물의 제목은 문장의 주어에 해당되고, 그 내용은 주어에 대한 술어라고 할 수 있다. 쿤데라의 『만남』은 그러니까 ‘만남’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 만남은 몇 줄의 글로 정의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다. 프랑스어 제목에는 단수형 부정 관사가 명사 ‘만남’을 수식하지만, 그 내용은 다양성과 이질성이 혼재된 복수의 만남들이다. 책은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 그리고 1972년 프라하에서 겪은 쿤데라 자신의 경험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되어, 쿤데라가 ‘원(原)-소설’이라고 말하는 말라파르테의 소설 『가죽』에 관한 이야기로 끝맺는다. 이 1부와 9부 사이에 음악, 미술, 소설, 시, 영화, 오페라, 역사와 개인, 추방과 망명, 향수, 아이러니, 망각, 공포, 사랑, 키치, 참여 등 다양한 주제들이 섞여 있다. 한편에는 16세기 프랑스 작가 라블레에 관한 언급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아이슬란드의 현대 소설가 구드베르구르 베르그손의 작품이 소개된다. 마르티니크 출신 에르네스트 브를뢰르의 그림과 체코 출신 야나체크의 오페라가 나란히 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과거와 현재, 주변부와 중심부, 역사적 사건과 개인적 경험, 전통과 전위, 소설과 미술과 음악이 시대와 공간, 장르 구분을 넘어서 서로 어울리는 이러한 만남은 쿤데라가 인용한 로트레아몽의 표현이 상기시키듯 “해부대 위에서 이루어진 재봉틀과 우산의 뜻밖의 만남처럼” 아름답다.


     몽테뉴 이래로 에세이라는 장르는 무엇보다도 자유로움과 가소성을 특징으로 한다. 다양한 재료를 버무려 하나의 작품을 빚어내는 에세이에서 영원히 발기 중인 우산과 제복을 만드는 재봉틀이 한 해부대 위에서 조우한다 한들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궁금증까지 말끔히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만남’은 도대체 무엇이며, 그 이질적인 요소들의 공존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문장의 주어는 분명한데, 술어는 단숨에, 일목요연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만남’은 문장의 주어인 동시에 하나의 화두가 된다. 쿤데라는 베이컨에 관한 글에서, “예술가가 다른 예술가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언제나 (간접적으로, 우회적으로)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묻는다. “베케트에 대해 말하면서 베이컨은 자기 자신에 대해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그러면 쿤데라는 해부대와 재봉틀과 우산처럼 이질적인 요소들의 만남을 통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쿤데라의 만남을 관통하는 것은 예기치 않음이다. 우선 행위 자체는 돌발적으로 일어난다. 앙드레 브르통과 에메 세제르의 교류는 1941년 미국으로 향하던 브르통이 마르티니크의 한 잡화점에서 세제르가 발행하던 잡지 한 권을 우연히 보게 됨으로써 시작되며, 알렉시와 드페스트르 같은 아이티의 젊은 작가들과 브르통의 교류도 프랑스 귀국 길의 포르토프랭스 강연이 계기가 된다. 그 만남은 “스파크고 섬광이고 우연”이다. 야나체크 사후 일 년 뒤에 태어난 쿤데라가 야나체크의 음악을 만난 것은 피아니스트였던 그의 아버지가 같은 도시 브르노에 살던 야나체크의 지지자 그룹에 속했다는 “전기적인 우연” 덕분이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삶, 인생 자체가 우연으로 점철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쿤데라가 말하는 만남의 예기치 않음은 이러한 행위 차원의 돌발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전혀 상관없어 보이거나 이질적인, 때로는 상반되기까지 하는 요소들이 하나의 “해부대” 위에 나란히 놓여 있음으로써 유발되기도 한다. 유럽 문화에 대한 항의, 세계주의, 청년이 키워드인 프랑스의 68혁명과, 유럽 문화에 대한 찬양, 한 나라의 독창성과 독립, 성인들의 포스트-혁명적 회의주의로 규정되는 프라하의 봄이 1968년 봄에 우연히 조우하거나,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라틴 아메리카와 중부 유럽이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바로크적 상상력에 의해 동질성을 갖고 서로 마주보게 되는 예기치 않음, 또는 라블레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과 샤무아조의 『훌륭한 솔리보』가 네 세기의 시차와 문화의 차이를 넘어 구술 문학과 기록 문학의 전환점이라는 공통분모로 이해되는 예기치 않음 등이 그 예다. 이러한 “경이로운 우연”은 원래부터 당연히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고 찾아지는 것이다. 시공간적으로, 문화적으로,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현상, 사물, 인물, 사상 들을 “뜻밖의 유사성”으로 묶는 것, 다시 말해, 우산과 재봉틀을 하나의 해부대 위에 올려놓는 것은 쿤데라의 성찰이며, 『만남』은 바로 이러한 성찰의 결과다. 우연은 인간 삶을 조건 지우기도 하지만, 우연에서 경이로움을 찾는 것은 인생의 의미를 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만남이 초래하는 예기치 않음은 궁극적으로 소설 미학의 핵심을 이룬다. 이때 예기치 않음은 주로 이야기되는 내용이나 주제가 상반되는 형식 또는 상황과 모순적으로 어울림으로써 야기된다. 아울러 이 상반적 요소들의 만남은 쿤데라가 즐겨 쓰는 모순 어법 즉, 서로 대척적인 위치에 있는 의미소들의 결합 사용을 설명한다. 희극성이 없기에 희극적인 도스토옙스키의 『백치』, 호화로움이 배제되었기에 가장 쓸쓸하지만 그래서 가장 아름답고 충실한 한 암캐의 죽음이 이야기되는 셀린의 『성에서 성으로』, 파렴치해 보이지만 가슴 뭉클한 다정함을 부여하는 로스의 『욕망의 교수』, 지극히 순정적인 사랑이 극심한 공포의 발현임을 암시하는 비엔치크의 『트보르키』, 대혁명 공포정치 시대의 무거움을 가벼운 문체로 다루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극적인 역사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한 일상의 동거”가 이루어지는 아나톨 프랑스의 『신들은 목마르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사실임 직하지 않은 기괴한 에피소드들이 공존하는 말라파르테의 『파멸』과 『가죽』 등이 그러하다. 쿤데라가 말하는 의미 있는 소설이 내용과 형식, 주제와 상황의 예기치 않은 동거를 특징으로 하는 이유는 비교적 명료해 보인다. 인간 자신이 미스터리하고 모순적이며 불가사의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모순과 아이러니에 기반을 둔 소설만이 인간의 그러한 실존적 수수께끼에 접근할 수 있고, 또 그것을 총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에 의해서, 시대에 의해서 인간 실존에 변화가 온다면, 이러한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 새로운 소설 형식이 등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된다.


      쿤데라가 명확하게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실존적 본질의 추구가 오로지 소설만의 고유한 영역은 아닐 것이다. 예술이 인간에 대해 표현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예술의 본질적 미학도 여기서 벗어날 수는 없다. 음악이나 미술에서의 새로운 형식의 시도가 그것을 암시한다. 인간이 우발적이고 무의미한 존재임을 실감하고, 유일하게 명백하고 비장하며 구체적인 몸을 통해 이 우연성과 유희성을 즉물적으로 표현한 베이컨의 그림이 그러하고, 단성음악의 시대에 다성음악의 풍부함을 성공적으로 삽입하여, 감정과 형식의 이질성으로 이채로움을 부각한 베토벤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 그리고 줄거리와 극적 요소 중심의 서사적 요소를 포기하고 음악적 요소를 전면에 내세운 야나체크의 오페라가 그러하다. 

 

     소설이나 예술이 고정화된 메시지로 인간과 인생을 표현하려고 할 때, 또는 소설과 예술을 단순화된 절대적 체계 안에서 파악하려고 할 때, 그 본질은 사라진다. 대표적인 예가 모더니즘의 독단성이다. 20세기 아방가르드는 현대 예술이 마치 고유하고 독자적인 미의 기준을 가진 것처럼 전통과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을 만들었지만, 그 장벽은 역설적으로 인위적이고 틀에 박힌 분류, 클리셰, 키치, 무의미한 수다만을 양산했을 뿐이다. 이러한 것들 앞에서 쿤데라는 묻는다. “브레히트, 그대에게서 무엇이 남을 것인가?” 기실 인간의 삶과 관련해서 영원불변한 것은 없다. 글라바니크의 소설 『밤 일』의 주인공 요나스가 깨달았듯, 그리고쿤데라 자신이 깨달았듯,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골드리스트는 언제든지 블랙리스트로 바뀔 수 있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20세기라고 해서 우리가 셰익스피어에게 진 빚을 면제해 주지는 않는 것이다.”

 

     결국 예기치 않음은 맹신적, 획일적 교조주의에 대한 거부이며, 우발적이고 무의미할 수 있는 삶에 자기만의 질서를 부여하는 창조성을 내포한다. 그것은 또한 예술의 본질적인 것에 대한 복원이다. 앙드레 말로는 과거의 예술 작품을 기능의 맥락에서 추출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시간과 죽음의 풍화 작용과 무의미화 압력에 저항하는 ‘상상 박물관’을 주장했다. 『만남』은 현대 지식인과 대중의 허영과 자기 과신에 의해 망각되고 무시된 소설의 본질, 예술의 본질에 대한 복원이 예기치 않게 이루어지는 쿤데라의 상상 갤러리다.

 

작품에 대하여 _ 13 커튼

비평

13 커튼
에세이로 풀어쓴 소설 예찬:
소설의 커튼이 열어젖히는 삶의 새로운 지평

박성창(서울대 교수)

 


     쿤데라는 1986년 『소설의 기술』을 시작으로 『배신당한 유언들』(1993), 『커튼』(2005), 『만남』(2009)에 이르기까지 소설에 관한 성찰을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낸 4부작을 발표한다. 『소설의 기술』이 일종의 원재료에 해당한다면, 이후 세 편의 문학 에세이는 『소설의 기술』에서 제시된 성찰의 주제나 모티프들을 변화시키고 확장하며 심화하려는 일련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커튼』은 『소설의 기술』과 『배신당한 유언들』이후 소설에 대한 쿤데라의 성찰을 담은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최대한 간결하고 정확한 문체를 동원하며 소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군더더기 없이 표현해 고전적인 프랑스 산문의 모범을 보여 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쿤데라는 자신의 세 번째 문학 에세이에서 이론가의 추상적인 관점에서 소설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가로서 자신의 경험을 최대한 반영하여 자신이 직접 실천한 소설의 기술로부터 촉발된 사유를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낸다. 언제나 인간의 개인적인 체험으로부터 출발해 인간 실존의 보편적인 문제로 나아간다는 쿤데라의 원칙은 그의 소설뿐만 아니라 소설론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20세기 중후반 유럽 역사에서 자신이 겪은 개인적인 체험으로부터 지금 이 세계에 사는 우리 인간의 삶이란무엇인가라는 보편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특유의 방식은 소설론에서도 유지된다. 다시 말하자면 쿤데라는 몽테뉴가 그 유명한 『수상록(Essais)』에서 그랬듯이 자기 자신을 시험대에 올려놓고 소설적 진실에 육박하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커튼』을 포함한 네 편의 소설에 관한 에세이들은 쿤데라 소설과 대등한 위치와 중요성을 확보하고 있다. 뛰어난 소설가들이 소설뿐만 아니라 소설에 관한 훌륭한 성찰을 동시에 보여 주듯이 쿤데라 역시 소설 창작을 소설에 대한 성찰과 분리하지 않으려고 노력한 대표적인 작가다.


     사실 소설과 성찰은 쿤데라에게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각별한 관계에 놓여 있기에 그의 소설론은 단순한 소설에 관한 생각이 아니라 소설과 성찰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다. 쿤데라에겐 소설 역사에 관한 매우 분명한 생각이 있다. 즉 소설은 서술에서 묘사로, 묘사에서 성찰로 이어지는 세 단계를 거쳐 전개되어 왔다는 것이다. 주인공의 모험과 행동에 대한 서술로부터 출발한 소설은 19세기에 이르러 묘사를 소설 본위에 두는 리얼리즘 소설로 이행하며, 20세기에 들어 쿤데라의 표현에 따르면 ‘성찰적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위대한 소설의 탄생으로 귀결된다. 즉 소설은 인간 실존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이에 관해 성찰하는 매우 중요한 기제이며,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사유에 몰두하는 철학과는 달리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인물들의 유희를 통해 성찰해 가는 독특한 장르다. 소설은 소설 나름의 방식으로 성찰하기에 그의 소설론은 소설 특유의 성찰 방식과 의미에 대한 성찰이다.


      쿤데라의 소설론은 단순히 소설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한 통상적인 소설론이 아니라 뛰어난 소설 예찬론이다. 소설은 다른 여러 문학 장르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소설만의 독특한 특수성과 자율성을 지닌 예술이라는 점을 쿤데라는 줄곧 강조한 바 있다. 즉 소설은 음악이나 미술처럼 자신만의 ‘언어’를 표현 수단으로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험적인 자아를 통해 인간 실존의 중요한 주제들을 깊이 있게 탐색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자신만의 ‘방법론’을 보유한다. 또한 라블레와 세르반테스를 거쳐 카프카와 브로흐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역사’와 쿤데라의 비유에 따르자면 “결코 말해지지 않은 것으로부터 갑자기 촉발된 빛”과도 같은 소설 특유의 ‘아름다움’도 있다. 게다가 소설은 니체 식의 “불확실성의 지혜” 같은 소설 특유의 ‘지혜’까지 제공해 주는 까닭에 쿤데라에게 소설은 시나 음악 혹은 미술이나 영화와 대등한 장르가 아니라 그 모두를 포괄하고 뛰어넘는 ‘예술’ 그 자체인 셈이다.


     이 책 이전에 출간된 두 소설론을 읽은 독자라면 소설의 기술에 관해 쿤데라가 피력한 낯설지 않은 주제들을 여기서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몇 세기에 걸쳐 전개되는 유럽의 소설사나 인간 실존의 비밀을 해명하려는 소설의 기능, 쿤데라가 부여하는 소설 특유의 시학 그리고 소설이 유래한 근본적인 정신과 점점 더 멀어지는 현재 상황 등이 그러한 핵심 주제에 해당한다. 여기서 우선 독자들에게 다소 낯설게 보일 수도 있는 이 책의 제목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보자. 쿤데라는 세상을 가리는 선이해의 커튼을 찢어 내는 것, 이것이 바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같은 작품으로 시작되는 근대소설의 임무라는 점을 강조한다. 즉 “작가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현실의 한 영역을 드러낸다. 이러한 드러냄은 놀라움을 만들어 내고 이제 놀라움은 미학적 즐거움과 미의 감각을 창조해 낸다.” 기존의 두 책에서 쿤데라가 다루었던 주제가 ‘커튼’이라는 매우 절묘한 비유를 통해 이번 책에서 반복되면서 심화된다. 소설이 어떻게 선이해의 커튼을 열어젖히고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실존의 새로운 지평을 보여 주는가를 가급적이면 논쟁적인 어조를 배제한 상태에서, 그러나 자신의 세계가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것을 목도하는 자의 우수가 담긴 어조로 말하고 있는 책이 바로 『커튼』이다.


     쿤데라는 이 책에서 세계 문학이라는 커다란 콘텍스트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세계 문학이 그 훌륭한 취지에도 불구하고 손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이유를 ‘커다란 국가’와 ‘작은 국가’의 경우로 나누어 설명한다. 즉 훌륭한 문학적 자산을 가진 몇몇 유럽 국가들 같은 ‘커다란 국가’들은 자국의 풍부한 문학적 유산으로 만족하기 때문에 세계 문학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반면, ‘작은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문학적 자산이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문학에 있어서의 지방주의’를 고수하면서 세계 문학의 개념에 저항한다. 특히 작은 국가는 “자신의 작가에게 그는 오직 자신에만 속해 있다는 확신”을 주입하면서 “시선을 조국 너머에 고정하는 것, 예술의 초국가적 영토에서 동포들과 합류하는 것은 건방지거나 동포들을 무시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쿤데라는 한 작품의 모든 의미를 ‘자기 나라에서 하는 역할’로 환원하는 ‘작은 콘텍스트의 테러리즘’이말로 세계 문학이라는 커다란 콘텍스트를 배격하고 그에 저항하게 하는 주된 요인이라고 지적한다.


     ‘작은 콘텍스트의 테러리즘’을 벗어나 세계 문학이라는 커다란 콘텍스트로 나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 사이의 간극이 크기 때문에 쿤데라는 작은 콘텍스트와 커다란 콘텍스트 사이에 중간 콘텍스트를 설정한다. 예술가에게 국경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어떤 초월적 공간에 속한 것도 아니다. 세계 문학이라는 커다란 콘텍스트는 자칫 잘못하면 이러한 무중력적이고 초월적인 공간이 존재한다는 환상을 가져올 위험이 있다. 예술가는 국가가 아니라 문화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서 쿤데라는 그가 보헤미아라고 부르는 ‘중부 유럽’의 문화적 전통을 강조하면서 중부 유럽이라는 콘텍스트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룬다.

 

     냉전을 통해 유럽을 동과 서로 양분하는 ‘정치적인’ 해석을 그 ‘문화’의 정체성에 근거한 해석으로 대체하는 것, 이것이 바로 ‘중부 유럽’이라는 콘텍스트를 통해 쿤데라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이다. 그렇다면 중부 유럽이란 무엇인가? ‘그 국경을 정확하게 정의하려는 것은 헛된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중부 유럽은 국가가 아니라 문화 혹은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 국경은 상상적이며 각각의 새로운 역사적 상황에 의거하여 다시 그려져야 한다.’ 오스트리아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거쳐 루마니아에 이르는 이 중부 유럽에 속한 국가들은 두 가지 공통점을 지닌다. 우선 ‘작은 국가’들이라는 점과 유럽의 문화적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함으로써 유럽 연합의 문화적 원형을 보여 준다는 점이다. 중부 유럽의 비극은 작은 국가이기에 그 ‘유럽성’을 부정당하고 동유럽이라는 정치적인 재단에 의해만들어진 틀 속에 귀속되었다는 사실이다. 쿤데라는 자신의 소설적 유산을 해명하기 위해 최대한의 공간에 최소한의 문화적 다양성을 용인하는 동유럽 대신 최소한의 공간에 최대한의 문화적 다양성을 산출하는 중부 유럽의 콘텍스트를 제시한다.


     무질이나 카프카, 브로흐나 곰브로비치 같은 작가들은 중부 유럽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로서 쿤데라의 소설적 성찰을 살찌우는 원재료에 해당한다. 쿤데라는 『커튼』에서 그 성찰의 폭을 플로베르나 발자크, 도스토옙스키나 프루스트까지 넓히면서 유럽 소설의 역사에 대한 총체적인 조감도를 제시한다. 쿤데라만큼 초국가적인 유럽, 영토로서가 아닌 문화로서 유럽에 남다른 감각과 통찰을 제시한 작가는 드물다. 그는 체코로 대표되는 중부 유럽의 문화권에서 프랑스로 대표되는 서유럽의 문화권까지를 두루 섭렵하고 포용함으로써 유럽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해 깊이 있게 성찰한 대표적인 작가로 평가받는다. ‘소설의 죽음’이라는 고정관념에 맞서 소설이란 아직 사용되지 않은 자원들이 무궁무진한 예술이며 실존적 탐험의 무한한 가능성을 담지한 장르라는 쿤데라의 신념은 이러한 믿음이 깨져 가는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볼 때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 준다.

작품에 대하여 _ 12 배신당한 유언들

비평

12 배신당한 유언들
다시, 소설의 길을 묻다


김병욱(성균관대 겸임 교수)

 


     『배신당한 유언들』은 쿤데라가 소설 『불멸』(1990년)을 발표한 후부터 『느림』(1994년)을 발표하기 전까지, 필리프 솔레르가 주관하던 계간지 《무한》에 발표한 글들을 모은 에세이집이다. 당시 이 에세이들은 한 편 한편 잡지에 발표될 때마다 이런저런 울림들을 낳았고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예컨대 이 책 9부에서 통합된 글(「이보시오, 여긴 당신 집이 아니오」)에서, 쿤데라가 자신이 속한 유럽 소설사 제3기의 미학적 전통을 옹호하기위해 곰브로비치의 선구적 작품을 예로 들어 편 주장(“『페르디두르케』는 『구토』가 발표되기 일 년 전인 1937년에 간행되었으나, 곰브로비치는 무명이요 사르트르는 유명하다. 어찌 보면 『구토』는 소설사에서 곰브로비치가 차지해야 할 자리를 빼앗은 것이라 할 수도 있다.”)은 프랑스 문단의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특히 1992년 《무한》 가을호에 게재된 글, 「파뉘르주가 더는 웃기지 않는 날」(이 책 1부)은 유럽 문화계 전체를 뒤흔들며 지식인들의 자성(自省)을 자극했다. 이 글에서 쿤데라가 살만 루슈디의 『악마의 시』를 옹호하면서 소설 예술에 무감각한 유럽 지식인들에게 가한 일침(“이 모든 슬픈 이야기에서 가장 슬픈 것은 호메이니의 선고가 아니라, 소설 예술이라는 가장 유럽적인 예술을 옹호하고 설명할 수 없는” 달리 말해서 “자기 고유의 문화를설명하고 옹호할 수 없는 유럽의 무능이다.”)이 거대한 논쟁거리가 되어 그해 내내 유럽 전체를 들썩이게 한 것이다. 물론 이제 많이 흐려지긴 했지만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본 당시 일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호메이니가 선고를 언도한 루슈디를 위시하여 피에르 부르디외, 자크 데리다, 토니 모리슨, 앙리 레비 등 많은 작가, 철학자, 심지어 정치가 들까지 참여하여, 호메이니의 평결을 비판하면서 뭔가 돌파구를 마련해 보고자 하던 크고 작은 많은 회합들. 당시 루슈디는 어느 텔레비전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쿤데라에게 공개적으로 감사를 표명했다. 그 일 년 전, 이 텍스트가 잡지 《무한》에 실린 직후 이미 루슈디는 《리베라시옹》 독점 인터뷰(1992년 10월 15일)에서, 전혀 쿤데라의 이름을 들먹이는 일 없이 “우리 제3세계 작가들은 유럽 형식으로 글을 쓴다. 유럽 문화의 토대는 소설이다. 나의 경우를 통해 제기된 물음, 그것은 바로 유럽이 자신을 정의하는 그 형식들을 옹호할 준비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라며 쿤데라의 논리를 그대로 되풀이했다. 경의의 표현으로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을 생각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이렇듯 한 편 한 편이 발표될 때마다 종종 세간의 논란거리가 되곤 했던 이 에세이집은 사실 여러 얼굴을 보여 준다.(미국에서는 ‘음악평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이 무엇보다도 쿤데라의 독특한 소설 미학(현대의 ‘최종 패러독스’를 탐구하는, 대단히 ‘반현대적인(antimoderne)’ 미학)을 잘 드러낸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소설 예술에 대한 이전 성찰(『소설의 기술』, 1986년)의 연장이지만, 성찰 폭이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넓고 풍요롭다. 이전 탐구가 세르반테스 이후 유럽 소설이 걸어온 길을 더듬으며 헤르만 브로흐와 더불어 주로 소설의 존재 이유를 천명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다면, 여기서는 16세기 프랑스 르네상스의 대표 작가인 라블레(『가르강티아와 팡타그뤼엘 이야기』)에서 비롯된 소설의 미덕과 소설 미학의 특성을 특히 카프카와 더불어 규명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책에서 특히 도드라지는 것은 소설을 국가적 틀이라는 소(小)맥락에서 떼어내 유럽이라는 대(大)맥락 속에 재배치하여, ‘예술로서의 소설’의 역사와 그 미덕과 그 미학적 원칙 들을 재정립하고자 하는 쿤데라의 강렬한 의지로서, 위에서 언급한 사르트르 관련 논란도 결국은 소설을 보는 사고 틀(소맥락/대맥락)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수 있다. 그의 그런 강렬한 의지에 수반되는 과격한 어조도 인상적이다. 원래 그의 어조가 대체로 ‘단호한’ 편임을 감안하더라도 이 책의 어조는 예사롭지 않다. 책 여기저기에서 격한 감정 표출까지 서슴지 않는 그의 강한 어조에는 어떤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왜 그럴까?
     잠시 그의 창작 도정을 되돌아보면서, 이 글들을 쓸 당시 쿤데라가 처한 상황을 살펴보자. 프랑수아 리카르는 그의 창작 도정을 세 ‘사이클’로 나눈다. 첫 번째는 『농담』(1967)에서 『삶은 다른 곳에』(1973)로 이어지는 ‘체코 사이클’이다. 작품 소재를 주로 체코라는 국가의 틀 안에서 찾은 시기다. 두 번째는 『웃음과 망각의 책』(1979),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 『불멸』(1990)로 이어지는 ‘중간 사이클’이다. 종래의 국가적 틀에서 벗어나 국제적 독자를 겨냥하여 작품을 쓴 시기다. 마지막 세 번째는 『느림』(1994), 『정체성』(1997), 『향수』(2000)로 이어지는 ‘프랑스 사이클’이다. 그가 애용해 온 7부 구성 형식을 버리고 전혀 다른 형식으로, 직접 프랑스어로 글을 쓴 시기다. 중간 사이클이 끝난 시기, 즉 『불멸』 이후 일정 시기가 그의 문학적 위기의 시기로 언급되곤 한다. 그러므로 이 에세이는 중간 사이클이 끝나고 프랑스 사이클이 시작되기 전, 이른바 “문학적 위기”의 시기에 이루어진 소설 예술에 대한 성찰의 총 결산이라 할 수 있다. 재충전이 필요한 시기에, 소설의 길이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살피면서 자신의 새로운 길을 찾고자 하는 그의 결연한 의지와 깊은 성찰의 결실인 것이다.

     그가 직접 프랑스어로 쓴 작품들이라는 점도 강조해 두자. 이 에세이들은 프랑스어를 그의 새로운 문학 언어로 만들기 위한 노고의 결실이자, 그가 프랑스어로 작품을 쓰는 ‘프랑스 작가’로 새 출발하는 데 밑거름이 된 글들이기도 하다. 쿤데라는 『불멸』 발표 이후 문학적 위기 상황에서, 프랑스어로 글을 써야겠다는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 세계의 정점으로도 평가되는 『불멸』과 더불어 지금까지 애용해 온 소설 형식(7부 구성)의 가능성을 소진해 버린 막막한 상황에서, 어쩌면 다시 그를 일으켜 세워 소설가의 길을 계속 걷게 해 준 것이 이 ‘새로운 문학 언어’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프랑스어가 그에게 그런 힘을 줄 수 있었을까? “프랑스어로 말을 할 때는 쉬운 게 하나도 없고, 언어의 자동성이 나를 도와주는 일도 없다. 문장 하나하나가 정복이요, 성취요, 발명이요, 모험이요, 발견이요, 경이이며, 어법 하나하나가 정신의 총체적인 참여를 요구한다. 프랑스어가 나의 모국어를 대체하게 되는 일은 없을 테지만, 이 언어는 나의 열정이다.”(《제네바 저널》, 1998년 17~16일자) 말하자면 언어의 장벽, 언어의 시련이 창작 활동에 장애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모국어의 자동성을 극복하고 자신의 모든 존재를 각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얘기다.
     새로운 형식, 새로운 언어, 새로운 길의 모색…… 문학적 위기의 시기에 서술된 이 책 곳곳에는 분명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길의 모색과 새로운 작가로 거듭나고자 하는 쿤데라의 절절한 의지가 배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을 그저 쿤데라가 자신이 아는 현대 예술(현대 소설, 현대 음악, 현대 미술)에 관한 지식을 나열하는, 그의 개인적 ‘현대 예술론’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 이 책은 현대 소설의 개척자들이 헤쳐 나간 길들 구석구석을 더듬으면서 자신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 한 소설가의 비장한 의지를 담은 책으로도 읽어야 하는 것이다.

 

     이 책 출간 당시 《르 몽드》 문예란 기사는 이 에세이집이 마치 한 편의 소설처럼 읽힌다고 지적했다. 옳은 말이다. 신기하게도, 적잖은 시차를 두고 따로 하나씩 발표된 에세이들이, 내용이 약간 첨삭되고 순서가 바뀌어 아홉 부로 구성된 책 한 권으로 간행되자 곧 한 편의 재미난 소설로 읽히는 것이다. 유럽 소설의 대서사시를 펼쳐 보이는 흥미진진한 소설 같은 에세이집. “소설이라는 나비가 번데기 잔해들을 짊어진 채 날아오르는” 행복한 라블레 시대에서부터 금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이라는 무대를 배경으로, 작품, 작가, 음악가, 번역가, 오케스트라 지휘자 들 등, 많은 등장 인물들이 등장했다간 사라지고, 사라졌다간 또다시 등장하여, 쿤데라의 번뜩이는 시선을 통해 다양한 관계들로 짜이면서 시종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전개되는 한 편의 소설. 유럽이라는 소설 대가족과, 소설 창작 세 시기의 주역들, 그들의 미학적 최종 의사, 그들의 유언, 그리고 그들의 배신자들, 그 배신자들의 배신 의지와 왜곡 행위, 그 결과 등이 이 소설을 가로로 짜 나가는 씨실이라면, 유언과 배신의 이 희비극 안에서, 그의 작품과 소설 미학이 위치하는 곳(“해 저문 하늘의 노을과 같은” 소설사의 제3기)에 대한 그의 애착과 그곳을 온전히 지키고 그 길을 계속 나아가고자 하는 그의 결연한 의지는 애초부터 이 소설에 세로로 걸쳐진 날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이 에세이는 쿤데라의 ‘인간적’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나는 책인 것 같다. 어쩌면 책 곳곳에서 접하게 되는 그의 비장한 어조 때문에 드는 느낌인지도 모른다. 살면서 뭔가 허전하거나 쓸쓸한 느낌이 들 때, 종종 이 책을 뒤적거리곤 한다. 소설 예술에 대한 빛나는 통찰들과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삶의 지혜로 가득한, 참으로 아름다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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