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에 대하여 _ 11 소설의 기술

비평

11 소설의 기술
보헤미안 문학론


권오룡(한국교원대 교수)

 


      쿤데라가 체코 태생이라는 사실은 여러 가지 의미와 연결된다. 체코 태생이면서도 그는 체코에 살기를 거부하고 체코라는 나라 이름조차 좋아하지 않는다. 정치적 이유로 망명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에야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탓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자유화의 물결이 넘쳐든 이후에도 쿤데라는 조국인 체코로 돌아가지 않고 프랑스에서 망명 아닌 망명 생활을 이어 가고 있다. 이런 사정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로 체코라는 이름에 대한 거부감도 작용하는 게 아닐까 싶다. 「소설에 관한 내 미학의 열쇠어들」에서 쿤데라는 체코슬로바키아라는 국명에 대해 이런 생각을 피력한다.

 

내 소설에서 인물들의 행위는 대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이루어지지만 나는 내 소설에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말을 절대로 쓰지 않는다. 만들어진 단어인 이 말은 너무 젊고(1918년에 만들어졌다.) 역사적 뿌리가 없으며 아름답지도 않다. 그리고 그 말로 지칭되는 대상의 너무 젊고(시간의 시련을 겪지 않은) 인위적인 성격을 나타내지도 못한다. 이처럼 단단하지 못한 단어 위에 억지로 나라는 세울 수 있겠지만 소설을 세우는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내 작중 인물들의 나라를 지칭하기 위해 나는 언제나 보헤미아라는 낡은 단어를 쓴다. 지정학적 관점에서 보면 옳지 않지만(내 소설을 번역한 사람들은 종종 이에 반발하곤 했다.) 시의 관점에서 보면 쓸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은 오직 그것뿐이다.(11, 206~207쪽)

 

     그의 마음이 시적이어서일까? 심정적으로 쿤데라는 체코인이 아니라 보헤미아인, 즉 보헤미안이다. 그런데 보헤미안이라고 할 때 우리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연상 내용은 떠돌이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닌가? 요즘에야 이런 사람들을 노마드라는 조금 고상한 이름의 신인류로 주목하기도 하지만, 이런 새로운 이름도 쿤데라에게는 그리 탐탁하게 여겨질 것 같지 않다. 그러니 그저 떠돌이라는 의미로 한정할 때 보헤미안이란 자신의 고향에서 살 수 없는 운명을 안고 태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게 아니겠는가. 보헤미아에 정착하여 살아갈 때 보헤미안으로서의 정체성은 사라져 버리고 만다. 보헤미아에 살 수 없는 사람들, 이들이 바로 보헤미안이다. 달리 말하면 고향으로서의 보헤미아라는 특별한 지명을 스스로 해체해 버리는 사람들, 이들이 보헤미안인 것이다.


     이 같은 해체 이후 보헤미안에게 주어지는 삶의 무대는 세계 — 조금 구체적으로 좁혀 잡으면 유럽 — 라고 하는 조금 넓고 추상적인 공간일 수밖에 없다. 고향에서 세계로 탈향(脫鄕)하는 과정에서 보헤미안 역시 세계인이라는 추상적 모습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실제적으로나 상상적으로나 탈향 이후 보헤미안들의 삶의 무대는 세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점의 공간들이고 이들 삶의 역사란 이 점들을 연결하는 선의 궤적과 일치한다. 이러한 운명과 역사가 보헤미안적 상상력의 원형적 조건이라면 쿤데라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으리라. 소설에 대한 쿤데라의 많은 생각들이 유럽 전역으로 확대된 상상의 공간을 무대로 펼쳐지는 연유는 이런 사정에서 말미암는다. 인류의 진화사에서 탈향은 언제나 보다 나은 삶의 환경을 찾아나서는 모험이었다. 언제나 탈향의 동기를 이루는 것은 고향에서 겪게 되는 삶의 위기다. 그러나 고향을 떠난다고 해서, 새로운 환경에정착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과연 삶은 안전하고 평화로워지는가? 언제 어디서건 삶은 불안정하고 위험하다. 사회주의 체제 하의 체코에서 쿤데라가 직접 겪었던 체험이나 이로 인한 위기감은 이러한 엄연한 진실의 한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보헤미안의 상상력이라는 것도 너무 순진한 낭만주의에 불과한 것은 아닐지? 그러나 이러한 인류학적 이해 지평에 역사적 관점을 덧붙여 보면, 비록 순진한 수준일지라도, 낭만주의적 상상력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가 좀 더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과연 근대 이후, 즉 서구 중심적으로 말하자면 르네상스 이후 사람들에게 탈향의 욕망을 부채질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이런 물음에 대한 쿤데라의 답은 과학과 기술이고, 겉으로 표방된 이데올로기가 어떤 것이든 실제로는 전체주의적 야망을 이면에 감추고 있는 정치 제도다. 조금 거칠게 말하면 근대 이후 정치나 여타 사회 권력이 수행해 온 바는 과학, 기술, 지식을 동력과 변속 장치로 삼아 사람들을 진보라는 속도 경쟁으로 내몰아 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동안 사람들에게 탈향 충동을 부추겼던 것은 먼 곳에 대한 동경도, 다른 곳에서의 다른 삶에 대한 갈망도 아니었다. 과학과 기술 발전이 사탕발림처럼 선물하는 편안한 삶, 관료주의 사회와 정치 제도가 무책임한 착오와 감시의 횡포에 대한 대가로 제공하는 약간의 안전, 이런 것들이 사람들의 탈향을 부추겨 온 게 아닌가? 쿤데라의 맥락에서 벗어나 이야기하면 이런 유토피아적 기망(欺罔)의 구체적 항목들은 훨씬 더 많이 열거될 수 있으리라. 돈 놓고 돈 먹자는 논리의 금융자본주의의 뻔뻔함 같은 것을 필두로 해서. 이렇게 탈향의 의미를 타락으로 바꿔 놓은 비인간화된 세계를 쿤데라가 “덫이 되어 버린 세계”라는 표현으로 압축할 때, 이를 통해 반(反)근대주의자로서 쿤데라의 면모는 더할 나위 없이 명확하게 부각된다.


     물론 르네상스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가치 상실이라는 타락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시각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를 문학, 특히 소설과 맞닿은 접경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역사적 의미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는 소설의 본질적 의미와 소임을 인식할 수 있게 만드는 거울이 된다. 쿤데라가 생각하는 소설의 본질은 인간에 대한 앎, 인간의 실존적 가능성의 추구라 할 수 있지만 본질에 대한 물음이라고 해서 그것이 역사적 변화의 맥락과 무관한 추상적 질문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역사와의 관련성 위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제기되어야 하는 질문이다. 인간이 자신의 주인일 때 인간에게 필요했던 질문이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소크라테스적 물음이었다면 이제 고향에서 추방된 채 인간의 허울을 쓰고 있을 뿐 실제로는 자신으로부터의 이방인, 사회의 노예, 제도의 희생자, 현실 속 눈 뜬 장님에 지나지 않는 하찮고 무지한 존재로 전락했다고 할 때 새롭게 필요한 것은, 인간의 의미를 바깥에서 추궁할 수 있도록 하는 관점의 이동일 것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더 이상 인간만의 의미를 묻는 내성적 질문이 아니라 현실 세계의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며 ‘저것이 진정한 삶의 세계이고 인간인가’라는 겹의 물음을 동시에 던지는 반향(反響)적 질문이다. 쿤데라가 카프카나 브로흐 같은 작가들을 통해 집요하게 환기하는 것은 이런 질문의 절박한 필요성이거니와, 이런 관점 이동 역시 보헤미안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보헤미안적이건 아니건, 유럽 소설에 대한 쿤데라의 역사적 이해 방식은 적잖이 독특하다. (쿤데라 자신의 표현대로 말하면) 격세 유전적이고 (들뢰즈의 용어를 빌려 말하면) 리좀(rhyzome)적으로 짜인 시공간적 그물로, 쿤데라는 세르반테스, 디드로, 스턴, 프루스트, 카프카, 브로흐 같은 작가들을 포착하면서 이들이 공통적으로 탐색했던 인간의 실존 가능성에 대한 물음을 추적한다. 이렇게 듬성듬성 모습을 드러내는 작가들은 서구 문명의 고대적 원형과 현대적 변형을 이어 주는 징검다리 돌들이고, 이 문명의 궤적을 따라 방랑하는 보헤미안의 이정표다. 그러니까 서구 문명과 소설에 대한 쿤데라의 역사적 이해를 비유적으로 형태화하면, 유럽이라는 대지에서 고대 그리스에서 중세 말에 이르기까지의 고대 문명을 땅속 뿌리로 삼고 땅 위로는 근대 문명의 줄기가 우뚝하게 자라 많은 전문화된 과학들의 가지를 뻗어 그 끝에 잎사귀와 열매를 맺고 있는 커다란 나무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쩌면 이 나무는 곧 고사의 운명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 ‘축소라는 흰 개미’가 갉아 먹고 있어서 인본주의라는 수액이 뿌리에서 가지 끝까지 잘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람하지만 허약한 이 나무에 문학의 가지, 소설의 가지는 있는가? 그 가지는 건강하고 튼튼한가? 앞서 열거한 작가들을 이 거대한 나무 그루터기에서 뻗어 있었던 가지의 흔적으로 남은 옹이들이라 할 수 있다면 이 옹이들을 매만지는 쿤데라의 상념은 이들을 잇는 가지가 어디선가 또다시 뻗어 나와 나무 전체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으리라는 기대와 소망으로 분망할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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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 전집 완간 기념 강연 후기 _ 김병욱 (번역가, 교수)

뉴스

밀란 쿤데라 전집 완간 기념 강연 후기 _ 김병욱 (번역가, 교수)

문학, 키치와 싸우다.

 

 

한양대·민음사 융합 독서 아카데미 2학기 그 첫 강연이 어제 시작되었습니다. 

밀란 쿤데라 전집 완간 기념으로 그 첫 시간은 김병욱 교수님과 함께 쿤데라의 『불멸』에 대해 이야기 나눠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쿤데라의 문학이 다루는 삶과 인간 내면의 성찰, 키치에 대한 심도있는 논평을 가진 시간에 대한 후기, 지금 만나보세요!

 



 

김병욱 교수님은 강의를 들어가면서 쿤데라의 작품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첫째, 개인이라는 말.

둘째, 역사(역사의 종말) 

셋째, 키치 

 

이 세가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한 가지씩 그 이유에 대해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쿤데라에게 소설은 '개인'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었고, 소설은 '개인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개인의 구체적인 삶을 비춰주는 등불 같은 것으로서) '개인의 죽음'과 더불어 끝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강의는 개인의 탄생과 더불어 근대가 시작됐다는 이야기로 이어졌습니다.

개인이라는 것이 근대에 들어와서 만들어졌고, 이 '개인'의 탄생과 더불어서, '망각된 존재'를 탐험하는 위대한 서사 형식으로서 소설이 탄생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소설이란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존재를 망각으로부터 보호하는 등불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개인이 어떤 식으로 존재하는지를 밝혀주는 것이 바로 소설이라는군요.

 

그런 개인으로 사는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통념이고 키치라고 설명을 하면서 그런 통념과 키치와의 싸움을 바로 소설이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설의 존재 이유를 쿤데라는 작품 속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설의 존재 이유는 오직 소설만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소설만이 밝혀줄 수 있는 실존의 면면을 발견하는 것이 소설이라고 말입니다.

 

 

쿤데라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개념, 바로 역사에 대한 이야기도 이어갔습니다.

설명은 근대의 성삼위일체로 시작되는데요.

개인, 역사, 이성 이 세 가지를 바탕으로 국가, 제도, 이데올로기의 '동질화'가 이루어진 시대가 바로 근대라고 합니다.

역사의 발전을 믿고, 개인이 주축이 되어 이성에 안내를 받는 것이 바로 성삼위일체이며 이 세가지는 한 몸과 같이 이 근대를 이끌었다고 설명합니다.

 

쿤데라의 <소설의 기술> 속에서 이 내용을 한번 찾아봅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쓰면서, 나는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세상에서 물러나게 되는 등장인물들에게서 영감을 얻어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즉 '인간이 세계의 주인이자 소유자'라는 명제의 운명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 여러 가지 기적을 이룬 인간은 문득 자신이 아무것도 소유한 게 없다는 사실을 자각합니다. 결코 자연의 주인도 아니요 (자연은 점차 지상에서 사라졌습니다.), 역사의 주인도 아니요(역사는 그에게서 벗어나 버렸죠.), 자기 자신의 주인조차 아니라는 것(그는 영혼의 불합리한 힘에 의해 조종됩니다.)을 말입니다. 신이 떠나버렸고 인간도 더는 주인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주인인가요? 지구는 어떤 주인도 없이 공허 속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입니다."

 

 

요즘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은 개인은 사라지고 무게도 나가지 않는 이미지로 살고 있다고 쿤데라의 말을 빌어 교수님은 설명하셨습니다. 우리의 존재가 바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고 말입니다. 도대체 왜 제목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일까 궁금증을 품었던 독자에게 어느 정도의 해답을 제시해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쿤데라의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바로 '키치'입니다.

매 강연마다 키치를 빼놓고 설명한 적이 없는데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통해서는 키치는 수용하는, 그리고 부정하는 사람들이 어울어져 그 속에서 어떻게 작동되는가를 보여주는 반면, 『불멸』을 통해서는 키치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여자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그럼 키치란 무엇일까요?

'키치 스타일'하면 흔히 진품(명품)을 흉내낸 저급한 스테일의 오브제(문화), 싸구려 예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지만 쿤데라에게 키치는 철학적, 인류학적 차원의 문제였습니다.

키치는 실존의 한 범주로 "우리의 현실을 보다 나은 세계(찬란한 미래/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꿈으로 대체하려는, 매력적이고 뿌리 뽑을 수 없는 인간 능력의 표현이라고 정의합니다.

쿤데라는 키치를 '존재와 분리될 수 없는 현상'으로 보고, 어떤 한정된 역사적 시기하고만 결부된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에 대한 절대적 동의"('갈등 없는 세계'에 대한 맹목적, 무조건적 집착)의 미학적 표현으로 봅니다. 사람들이 바라는, 이데올로기나 이마골로지가 그렇게 보이게 하려고 하는 세계가 바로 키치라고 교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우리 삶의 방식이 키치라는 명제를 설명하는 예로 남성연대 대표의 자살사건, 포토샵 등을 들어주셨는데요. 머리 속에 쏙쏙 들어오는 예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불멸』이라는 작품을 설명하면서 개인이, 키치가, 우리의 이미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말씀해주셨는데요.

지금 설명드린 내용을 토대로 책을 읽어보시면 더 많은 것을 읽어보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교수님께서는 이 이미지 시대를 살면서 키치를 거스르는 인물을 옆에 두고 살면서 개인을 돌아봐야 한다고 마무리하면서 강의를 끝마치셨습니다. 강의실을 가득 메운 학생들이 교수님의 강의를 2시간여 동안 경청하면 들어주셨는데요.

 

쿤데라 작품을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의 학구열을 뜨겁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참여해주신 모든 독자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다음 시간은 풍월당에서 '쿤데라의 문학과 음악'에 대한 이야기로 자리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작품에 대하여 _ 10 향수

비평

10 향수
21세기의 오디세우스가 부르는 망명과 귀환의 노래

박성창(서울대 교수)

 

망명은 편도 여행이다. 되돌아갈 ‘고향’이란 없다. 과거에도 결코 없었다. — 스튜어트 홀


     쿤데라가 펴낸 책 속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간략한 저자 소개가 실려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났다. 1975년 프랑스에 정착하였다.” 작가가 살아 온 복잡한 이력을 긴 문장으로 피력하는 통상적인 저자 소개와는 무척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작가의 전기적 삶과 작품을 분리해서 보아야 한다는 쿤데라의 신념이 반영된 결과다. 그럼에도 쿤데라의 작품에서 자전적 요소를 찾기란 어렵지 않으며, 최근 소설로 올수록 자전적 경향은 강화된다. 또한 쿤데라는 프랑스로의 이주 혹은 망명이 그의 삶뿐만 아니라 작품의 핵심 열쇠임을 인정한 바 있다. 예컨대 어느 인터뷰에서 한 발언을 보자. “프랑스에서 나는 다시 태어났다는 잊을 수 없는 감정을 겪었다. 육 년간의 휴식 끝에 나는 조용히 문학으로 되돌아왔다. 내 아내는 내게 ‘프랑스는 당신의 두 번째 조국이야.’라고 줄곧 말하곤 했다.”

      쿤데라가 체코어로 쓴 마지막 소설인 『불멸』의 무대는 프랑스다. 그가 체코를 떠나 프랑스로 망명하기까지의 과정이 소설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가 프랑스어로 쓴 마지막 소설인 『향수』의 무대는 정반대로 체코다. 『향수』는 강제로 먼 길을 떠나거나 타지로 망명해야 했던 사람들이 공산주의 체제가 몰락하면서 돌아오기 시작한 1980년대 말에 벌어지는 귀환의 서사가 담긴 작품이다. 그러나 자신의 첫 번째 조국이나 자신이 태어난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나, 되돌아가야 한다는 의지를 담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귀환의 불가능성을 그린 특이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정작 쿤데라 자신도 1989년 이후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프랑스가 제2의 조국이 된 쿤데라와 체코 사회의 오해는 그의 이런 결정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쿤데라의 어느 작품보다 『향수』에서 자전적 요소가 강하게 나타난다 하더라도 이 작품에서 작동하는 소설의 미학적 원리를 간과해서는 곤란하다. 그가 여러 곳에서 되풀이해서 말했듯이 소설의 의미는 작가의 삶을 이야기하거나 그의 행동과 체험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적 ‘상황’에 질문을 던지는 데 있다. 이 소설의 실존적 상황이란 조국의 해방과 더불어 갑작스럽게 생겨난 새로운 실존의 ‘덫’에 던져진 추방된 인간의 상황이다. 이러한 실존적 상황 속에서 쿤데라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등장인물들과 함께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함께 모색하고자 한다. 이러한 새로운 실존적 상황에서 이제껏 겪어 보지 못한 경험이 존재의 어떤 새로운 면모나 알려지지 않은 가능성을 발견하고 이해하게 해 주는가? 시대가 급변하고 국경이 무너지고 세계가 완전히 개방될 때 가족간의 연민, 향수, 조국에 대한 애착, 자기 삶에 대한 추억 같은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에 어떤 일이 생겨나는가? 마지막으로 망명 혹은 귀환 같은 주제가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존적 인물(혹은 ‘실천적’ 인물)들에 의해 접근될 때 그 의미는 어떤 방식으로 해명될 수 있는가?
     이 소설은 1968년 이후 프라하에서 망명한 두 인물 이레나와 조제프가 다시 프라하로 되돌아가면서 겪는 일련의 사태를 그렸다는 점에서서양 문학의 고전인 『오디세이아』를 그 바탕에 깔고 있다. 쿤데라에 따르면 서구인들은 타지에서의 위태로운 삶과 귀환을 통한 안락한 삶 사이에서 늘 귀환을 선택했으며 이는 미지에 대한 열정적 모험 대신 익숙한 것에 대한 예찬을 낳았다. 페넬로페의 고통은 찬양하면서 칼립소의 눈물은 비웃는다. 이것이 『오디세이아』가 서구인들에게 주는 메시지다. 이 소설은 『오디세이아』로 대표되는 서양의 신화, 즉 고향이란 존재하며, 고향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욕망이며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가능하다는 믿음을, 이레나와 조제프의 귀환의 서사를 통해 깨뜨린다.
     이레나에게 프랑스로의 망명이 강요된 것과 마찬가지로 체코로의 귀환 또한 자발적인 선택의 결과가 아니다. 이레나의 친구인 실비가 “너의 위대한 귀환이 될 거야.”라면서 조국인 체코로 돌아갈 것을 강력하게 권유하지만 사실 연인, 자식, 직장, 친구 그리고 아파트 등 그녀의 모든 삶은 이 십 년 이상을 보낸 파리에 있다. 망명은 이레나의 바깥에서 그녀에게 강요된 것이기에 이레나는 수년 동안 자신을 희생자로 여기는 데 익숙하다. 그러나 자신이 희생자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그녀의 귀향 또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레나의 이러한 삶의 궤적은 자신이 태어난 곳을 떠나 세계 시민으로 살아가기를 자처하는 그녀의 애인 구스타프의 삶과는 정반대다. 그는 실패한 결혼에서 자발적으로 벗어나기 위해 스웨덴을 떠났기에 그곳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레나는 자기 자신에 충실하며 망명의 스테레오 타입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반면에 구스타프는 세계 시민의 스테레오 타입에 따라 행동하며 그의 행동은 자연스럽고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여기서도 쿤데라 소설의 주된 주제인 실존적 삶의 역설적 요소가 잘 드러난다.

     체코로 돌아간 이레나의 삶을 우리는 잘 안다. 친구들은 이레나를 이해하지 못하며 대화를 통한 의사소통은 완전한 실패로 돌아간다. 체코에서 그녀는 이제 새롭게 망명자 신세가 된다. 이레나는 체코인들에게 조국을 버리고 떠난 배반자로 받아들여진다. 망명은 너무 손쉬운 선택이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이레나는 이중의 오해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녀는 한편으로 망명을 선택한 자로서 적의 뒤에 숨어 살면서 고통을 겪었던 사람들에게는 배반자 낙인이 찍히며,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나라에서는 희생양의 이미지로 굳어진다. 그렇다면 조제프의 귀환은 어떠한가.
     귀환과 관련해서 조제프가 겪는 일련의 에피소드들은 오디세우스의 귀향과 정반대다. 호메로스의 올리브 나무 같은 것을 주위에서 알아볼 수 없었던 그는 돌아온 조국 체코의 풍경을 알아보지 못한다. 기억의 순간 또한 도래하지 않는다. 조제프는 단지 알 수 없는 이상한 나라를 방문하고 있을 뿐이다. 조제프의 머릿속에서는 다음 질문들만 맴돌 뿐이다. “오늘날 ‘오디세이아’를 생각할 수 있는가? 귀환의 서사시는 아직도 우리 시대에 속하는가? 예부터 있던 올리브 나무가 쓰러지고 주위에서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다면 오디세우스가 이타카의 기슭에서 깨어났던 그 아침에 그는 위대한 귀환의 음악을 황홀경 속에서 들을 수 있었을까?” 조제프는 친구들이나 가족으로부터 소외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된다. 고등학교 시절 자신이 쓴 일기에서 아무런 기억의 흔적도 찾지 못한 그는 이전의 자아와 동화되지 못하며 완전한 이방인으로 느낀다. 시간과 더불어 모든 것을 지워 버리고 변형하는 기억의 메커니즘은 이 소설에서 조제프의 귀향을 통해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작품에서 쿤데라가 프랑스어로 쓴 『느림』이나 『정체성』 같은 소설들에서 이미 선보였던 소설적 ‘푸가’라는 형식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쿤데라는 체코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소설을 쓰기로 한 순간부터 최소한의 텍스트 공간 속에 최대한의 의미를 담으려고 노력했다. 체코어로 쓰인 소설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문체의 간결함이라든가 쉰 개의 짧은 장들로 분할된 소설 구성에서 형식적 완성과 주제의 밀도를 추구하는 쿤데라 소설의 미학적 원리가 잘 드러난다. 어떠한 세부적인 사항도 작품 속에 등장하는 순간 버려지는 법 없이 여러 차례 반복, 변주되면서 모티프로 변화한다. 이 소설의 주된 모티프인 향수, 망각, 오디세우스, 쇤베르크, 거울, 소음으로 변형된 음악 외에 다른 모티프를 찾아내는 것은 독자의 몫일 것이다.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초반부에 제시된 여러 모티프들이 화음을 일으키고 한 곳에 모이면서 더 웅장하고 밀도 높은 구성을 보이는 소설적 ‘푸가’의 원리가 이번 소설에서는 더욱 성숙한 장인의 솜씨로 다듬어진다. 아직 쿤데라는 『향수』 이후로 소설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 현재로서는 그가 발표한 마지막 소설에 해당하는 이 작품에서 『농담』 이후 무려 삼십오 년 동안 꾸준하게 이어진 그의 작품 세계가 추구했던 미학적 프로젝트의 가장 완성되고 성숙한 성취를 주목하는 것은 『향수』를 읽는 독자의 커다란 즐거움이자 의무일 것이다.
     이 작품의 프랑스어 원제는 Ignorance이다. 유럽의 언어들에는 향수를 나타내는 다양한 표현이 있는데 돌아가고자 하는 채워지지 않는 욕구에서 비롯된 ‘노스탈지’가 그 대표적 어휘다. ‘노스탈지’는 그리스어로 귀환을 뜻하는 ‘노스토스(nostos)’와 괴로움을 뜻하는 ‘알고스(algos)’의 합성어다. 유럽인들은 대개 이 단어에 기원을 둔 어휘들을 사용하는데 이는 고향에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생긴 슬픔만을 의미할 뿐이다. 쿤데라는 ‘노스탈지’라는 일반적인 어휘 대신 ‘이뇨랑스(ignorance)’라는 어휘를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쿤데라에 의하면 어원상으로 향수는 무지의 상태에서 비롯된 고통으로 나타나며 이는 일반적인 ‘노스탈지’보다 더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뇨랑스’라는 단어는 이 소설의 한 대목을 인용하자면 “너는 멀리 떨어져 있고 나는 네가 어찌 되었는가를 알지 못하는 데서 생겨난 고통. 내 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고 나는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하는 고통”을 매우 적절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이뇨랑스’의 우리말 대응어인 ‘무지’는 이러한 어원상의 의미를 전달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향수’라는 단어를 이 소설 제목으로 택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쿤데라의 자세한 설명은 이 소설의 2장을 참조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