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데라 소설의 핵심어들: 『우스운 사랑들』에서 『향수』까지 (1)

비평

쿤데라 소설의 핵심어들:
『우스운 사랑들』에서 『향수』까지


김연경(소설가, 서울대 강사)

 

1 웃음, 농담, 희극
1-1 『우스운 사랑들』

 

 

 

    1959년에서 1968년 사이 삼십 대의 쿤데라가 쓴 중단편은 모든 첫 소설들이 그렇듯 상당히 선언적이다. 가령 『우스운 사랑들』(1963)의 처음에 실린 「누구도 웃지 않으리」의 내용은 이렇다. 대학에서 미술사 강의를 하는 ‘나’는 엉터리 논문을 발표한 자투레츠키에게서 자기를 옹호하는 글을 써 달라는 난감한 부탁을 받는다. 완곡한 거절이 통하지 않자 외국에 나간 것처럼 해 놓고서 실은 바뀐 시간표로 강의를 하는 식의 술수를 써가며 계속 자투레츠키를 피한다. 그러나 상대방은 포기하기는커녕 ‘나’가 모델 지망생 애인(클라라)과 함께 사는 은신처를 찾아오기에 이른다. 그것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이용, 성범죄 관련 스토리를 꾸몄다가 남편의 학적 재능을 철석같이 믿는 자투레츠키의 ‘투사형’ 부인까지 끌어들이는 형국이 되고, 설상가상으로 학과 측과도 문제가 생긴다. 우여곡절 끝에 모든 말썽이 해결된 순간에는 모델 자리를 찾아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클라라가 다른 남자(칼루세크 박사)에게 가 버린다. “잠시 후에야 나는 내 이야기가 (나를 둘러싼 얼음 같은 침묵에도 불구하고) 비극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희극이라는 것을 깨달았다.”(2, 62쪽) 심지어 그 사실에서 ‘위안’을 받는다.
    소설집 마지막에 실린 「에드바르트와 신」도 재미있다. 대학 졸업 후 시골에 사는 형의 소개로 보헤미아 한 소도시의 교사가 된 에르바르트는 신앙심이 깊은 한 아가씨(알리체)에게 반한다. “신에 대한 믿음으로 예쁜 목마를 만들어” “그 배 속에 숨었다가 아가씨 마음속으로 살그머니 들어갈”(2, 301쪽) 속셈으로 열심히 믿는 척하다가 그만, 알리체와 함께 성당 앞을 거닐거나 성호를 긋는 장면을 목격당한다. 위원회는 “오늘날, 달에다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시대”에 “선생님 같은 젊은이가 신을 믿게”(2, 316쪽) 된 경위를 설명하라고 요구한다. 결국 교장(체하츠코바)이 재교육을 맡는 선에서 일은 마무리되는 한편 이번 일로 영웅이 된 에드바르트는 알리체에게서 밀회 약속을 받아 낸다. 그러나 정신 재교육을 위해 교장과 만난 순간, 문제는 성당 사건이 아님이 밝혀진다. 에드바르트는 “육체의 태업”(2, 338쪽) 때문에 곤란을 겪다가 ‘하느님’의 힘으로 이 노처녀와 정사를 치르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주말에는 형의 시골집에서 알리체와 첫 관계를 갖는데 이내 환멸을 느끼고, 돌아가는 길에 역시나 ‘하느님’ 운운 ‘신학적 궤변’을 늘어놓아 그녀를 떼 놓는다.
     형이상학적인 것(철학과 종교)과 형이하학적(성(性)과 배설)을 뒤섞고 또 뒤집는 희(비)극이야말로 쿤데라 소설의 핵심적인 요소가 아닌가 싶다. 그가 직접 만든 소위 ‘쿤데라 소설 사전’에는 ‘웃음(유럽적인)’은 물론이거니와 ‘희극’ 항목이 따로 있다. “우리에게 인간의 위대함이라는 멋진 환상을 줌으로써 위안을 제공”하는 비극과 달리 희극은 “가혹”하게도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폭로”(11, 212쪽)한다. ‘진정한 희극의 천재’로서 쿤데라가 구축한 희극의 새 영역은 『농담』에서 보다 또렷한 형상을 갖는다.

 

 

1-2 『농담』


     쿤데라의 첫 장편 『농담』(1967)은 서른일곱의 남자(루드비크 얀)가 모종의 목적을 갖고 오랜만에 고향 땅(모라비아)을 밟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현재의 사흘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십오 년 쯤 전의 전사(前事)이다. 대학생 루드비크는 여자 친구(마르게리타)를 골려 주려고 쓴 엽서 한 장 때문에 사회주의의 적으로 몰려 당과 대학에서 제명당하고 오스트라바 근교의 탄광에 떨어진다.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루드비크.”(1, 59쪽) 이 문구의 함의도 문제겠지만 그것이 농담이라는 사실 때문에 1948년 혁명 이후의 ‘승리감과 역사적 낙관주의’, ‘금욕적이고 장엄한 기쁨’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된다. 덧붙여 당(전체)은 당원(개인)이 어떤 사람이며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권리가 있다. 세 명의 대학생 앞에서 진행되는 ‘심판’은 진지함(무거움)의 폭력 앞에서 우스움(가벼움)이 희생양으로 전락하는 (역시나 우스운!) 과정을 여실히 보여 준다. 죄가 죄인과 죄의식과 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유죄 선고 및 벌에서 죄가 생겨나는 식이다. 한 번 선고된 죄는 철회될 수도 없다. 쿤데라가 카프카의 『소송』을 분석하며 전개한 논리인바 “농담의 내장”, “코믹한 것의 무서움”(11, 150쪽)은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다. 죄인 루드비크는 거듭된 자아비판 끝에 대학생이라는 신분, 지적 오만과 냉소주의 등 모든 것이, 숫제 존재 자체가 죄임을 깨닫는다.

 

나는 인간의 운명을 심판하는 최고재판소에 비치된 나라는 사람의 이미지를 도저히 바로잡아 볼 도리가 없다는 것을 차츰 깨닫기 시작했다. 이 이미지(아무리 나와 비슷하지 않다 해도)는 나 자신보다 비교할 수 도 없이 더 실제적이며, 그것이 나의 그림자가 결코 아니라 나, 바로 나자신이 내 이미지의 그림자였다. 왜 나를 닮지 않았느냐고 그 이미지를 탓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며, 이미지와 다른 것은 내 잘못이었다. 그리고 이 다름은 바로 나의 십자가, 그 누구에게 떠넘길 수도 없고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것으로 선고받은 십자가였다.” (1, 89~90쪽)


     실상 농담 한 마디 때문에 유형살이를 하게 된 정황이야말로 한 편의 농담 같다. 병영 생활 중 우연히 만난 ‘느림’과 ‘안개의 소녀’(루치에)와의 낭만적인 사랑이 농담의 밀도와 깊이를 더한다. 그러나 진짜 농담은 그가 자신의 인생을 망쳐 놓은 제마네크를 상대로 펼치는 복수극이다.

     루드비크는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방송국 기자(헬레나)가 제마네크의 부인임을 알게 되고, 마침 취재차 모라비아에 가야 하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었다. 그러나 해묵은 원한을 설욕하기 위한 정사를 전후하여 그를 지배하는 정조는 역시 웃음(농담)이다. 더 우스운 것은 그들이 딸 때문에 마지못해 같이 사는 명목상의 부부가 된 지 오래라는 사실이다. 젊고 발랄한 애인까지 있는 제마네크에겐 헬레나가 오히려 성가신 존재이고, 또 복수의 표적이 되기엔 그가 너무 약해졌다. 이쯤 되면 복수는 ‘환상’이자 ‘자기만의 종교’이자 ‘신화’, 즉 또 다른 농담에 다름 아니다. “이제 예전의 얀이 아닌 다른 얀이 역시 예전의 제마네크가 아닌 다른 제마네크 앞에 서 있는 것이며, 내가 그에게 날려야 하는 따귀는 다시 되살릴 수도 다시 복구할 수도 없이 영원히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
다.”(1, 491쪽) 증오의 대상을 무너뜨리기 위해 감행한 귀향이 쓰러진 옛 친구(야로슬라프)를 부둥켜안는 것으로 끝난다. 헬레나와는 달리 ‘비물질적이고 추상적인’ 존재인 루치에와 재회했으나 그녀가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혹은 않는다)는 사실도 상징적이다. “내가 복수하고자 했던 나의 과거, 그러나 여기서 마주쳤는데도 마치 나를 알지도 못한다는 듯이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가 버린 나의 과거, 그 과거 전체가 나에게 보여 준 것과 동일한 그런 차가운 무관심.”(1, 475쪽)
     『농담』은 주인공뿐만 아니라 그를 에워싼 다른 인물들에게도 자기만의 목소리와 스토리가 있는, 쿤데라식 다성악 소설의 첫 시도다. 가령 우스꽝스러운 복수극의 희생양이 된 헬레나는 열아홉 살의 조수(인드라)에겐 흠모와 숭배의 대상이다. 사건의 전말을 알고서 절망한 그녀가 자살하기 위해 복용한 인드라의 진통제가 변비약으로 밝혀짐으로써 ‘호모 센티멘탈리스’(12, 24쪽)와 ‘낭만적 열정’을 둘러싼 한 편의 농담이 완성된다. 야로슬라프는 민중 애호가를 자처하는 프라하 출신의 제마네크와는 달리 뼛속까지 전통을 숭배하는 모라비아 출신의 음악가다. ‘왕들의 기마 행렬’ 행사와 관련해 아들과 부인이 공히 자신을 기만했음을 깨닫고 좌절하는 순간, ‘민속-가부장적 과거’를 재건하려는 욕망(12, 24쪽)이 눅눅한 농담으로 바뀐다. 루치에를 매개로 다시 루드비크와 엮인 코스트카 박사는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대학을 떠나야 했지만 여전히 “복음서에 접목된 공산주의 유토피아”(12, 24쪽)를 구현하고자 한다. 한편, 소설 속에서 적잖은 비중을 띰에도 루치에만은 자기만의 장(章)과 말을 갖지 못한 채 루
드비크와 코스트카의 독백을 통해 외부에서만 조명된다. 덕분에 그녀는, 애초 작가의 의도이기도 한바, 자신의 음습한 과거와 함께 “유리창 저편”(11, 127쪽)에, 그녀가 철조망 사이로 루드비크에게 건넨 장미꽃 한 송이의 이미지로 남는다.

     『농담』의 주인공들은 모두 농담의 희생양이지만,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그 자체로 희극적인 요소를 내포한 인간과 시간의 보편적인 속성(11, 212쪽)이다.


 

사람들 대부분은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 있다. 기억(사람, 사물, 행위, 민족 등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행위, 실수, 죄, 잘못 등 을) 고쳐 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이것은 둘 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믿음이다.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다. 모든 것은 잊히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 (복수에 의해서 그리고 용서에 의해서)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힐 것이다.(1, 493쪽)

 

     과거를 회상하며 루드비크는 자신을 심문하던 자들 또한 “자신들이 가장 탁월하다고 믿는 가면, 즉 금욕적이고 강직한 혁명가의 가면 아래 자신들의 완성되지 않은 얼굴을 감춘 어린아이들”이었음을, 그리고 그 자신도 “이 역할 저 역할을 왔다 갔다 하던 끝에, 결국 어디로 도망쳐야 하나 어쩔 줄 모르다가 붙잡힌 것”(1, 151~152쪽)이었음을 인정한다. 그렇다고 죄와 벌의 근원, 즉 윤리와 도덕에 관한 물음이 불필요하거나 무의미하다는 소리는 아니다. 죄는 있으나 죄인은 없는 상황, 이 총체적 혼돈 앞에서 특정한 정체(政體)도, 종교도 더 이상 답이 될 수 없다. 그의 소설은 혁명 이후의 세계를 포착하고 또 니체 이후 신의 귀환은 바랄 수 없는 까닭이다. 모순들을 어찌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