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구성에 관한 대담 - 3

비평

예술의 구성에 관한 대담 - 3

살몽 - 쿤데라(『소설의 기술』 수록)

 

살몽

다음으로 넘어가죠. 구성의 통일성 문제에 관한 이야기로 되돌아 가 볼까요. 당신은 『웃음과 망각의 책』을 ‘변주 형식의 소설’이라고 규정하셨죠. 그것도 소설인가요?

쿤데라

그것에 소설다운 면모가 보이지 않는 것은 행동의 통일성이 없기때문입니다. 이러한 통일성이 없는 소설을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지요. ‘누보로망’의 실험들조차도 행동(혹은 무행동)의 통일성에 바탕을 두지요. 스턴과 디드로는 이 통일성을 아주 약하게 만드는 걸 즐겼죠. 자크와 그의 주인의 여행이 소설에서 차지하는 부분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아요. 다른 일화나 이야기, 생각 들을 포장하기 위한 우스꽝스러운 핑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 핑계, 이 ‘상자’는, 이 소설이 소설로 여겨지기 위해서, 혹은 최소한 소설의 패러디로 여겨지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거죠. 그러나 제 생각으로는 소설의 일관성을 보장해 주는 더 깊은 무언가가 존재합니다. 바로 주제의 통일성이죠. 언제나 그래요. 『악령』의 세 계열은 서사 기법에 의해 결합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주제, 즉 신을 잃은 인간을 사로잡는 악령들이라는 동일한 주제에 의해 결합된 겁니다. 각각의 계열 속에서 이 주제는 마치 하나의 사물이 세 개의 거울을 통해 비치듯이 각기 다른 각도에서 관찰되지요. 소설 전체에 내적 일관성을 부여해 주는 것은 바로 이 사물(추상적으로 말하면 주제)입니다. 이 내적 일관성은 잘 드러나 보이지는 않지만 가장 중요한 겁니다.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 전체의 일관성은 변주되어 가는 몇 가지 주제(와 모티프)의 통일성에 의해서만 창조됩니다. 이런 게 소설이냐고요? 제 생각엔 그렇습니다. 소설이란 상상적 인물을 통해 관찰된 실존에 대한 성찰이니까요.


살몽

그렇게 광범위한 정의에 따른다면 『데카메론(Decameron)』 같은 것도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겠군요! 단편들 전체가 사랑이라는 동일한 주제로 결합되었고 같은 화자 열 명이 이야기를 전개하니 말예요.

쿤데라

『데카메론』을 소설이라고 부를 정도로까지 대담해지고 싶지는 않군요. 그러나 어쨌든 근대 유럽에서 이 책이 이야기체 산문으로 큰 규모의 구성 방식을 창조하려 한 최초의 시도 가운데 하나라는 것, 그리고 최소한 소설의 뿌리이자 선구자로 소설사의 한 부분을 이룬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당신도 아시다시피 소설의 역사는 그것이 택한 길로 접어들었으니까요. 소설의 역사는 다른 길로 접어들 수도 있었을 겁니다. 소설의 형식이란 거의 무한한 자유지요. 그러나 소설은 그 역사를 통해 이러한 자유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어요. 자유를 잃은 거죠. 소설은 아직 개발되지 않은 많은 형식상의 가능성을 남겨 놓고 있습니다.

 

살몽

『웃음과 망각의 책』을 제외하면 당신의 소설 역시 조금 느슨해졌기는 하지만 어쨌든 행동의 통일성에 바탕을 두었죠.

쿤데라

저는 항상 소설을 두 가지 차원에서 구성합니다. 첫 번째 차원에서는 소설적 이야기를 구성하죠. 저는 그 위에다 주제를 전개합니다. 주제는 소설적 이야기 속에서, 이야기에 의해 끊임없이 가공됩니다.소설이 주제를 버리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으로 만족해 버리면 싱거워지고 맙니다. 반대로 어떤 주제는 이야기 바깥에서 독자적으로 전개될 수도 있어요. 이러한 주제의 취급 방식을 저는 일탈이라고 부릅니다. 이 일탈이라는 용어가 의미하는 바는 잠깐 동안 소설의 이야기를 포기한다는 거죠. 예를 들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키치에 대한 생각은 모두 일탈이죠. 소설의 이야기를 버리고 주제(키치)를 직접 공략하는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일탈은 구성의 훈련을 약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확실히 보장해 주는 겁니다. 저는 주제와 모티프를 구분합니다. 모티프라는 것은 주제나 이야기의 한 요소로서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항상 다른 맥락 속에서 여러 차례 반복되죠. 예를 들면 테레자의 삶으로부터 토마시의 생각 속으로 이어지는 베토벤의 사중주 모티프는 다른 주제, 가령 무거움이나 키치 같은 주제를 가로질러 가기도 합니다. 또사비나/토마시, 사비나/테레자, 사비나/프란츠의 장면에서 보이는 사비나의 중산모자는 “이해받지 못한 말들”의 주제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살몽     그런데 당신이 말하는 주제의 정확한 의미는 뭐죠?
쿤데라

주제란 실존적 질문이죠. 그리고 저는 점점 더 그런 질문이 결국은 특정 단어들, 주제어들에 대한 면밀한 검토라는 것을 깨닫게 돼요. 이런 생각에 따라 저는 소설이 우선적으로 몇몇 기본 단어 위에 기초한다고 주장합니다. 쇤베르크의 “음표들의 시리즈”와도 유사하죠.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 “시리즈”는 망각, 웃음, 천사, ‘리토스트’, 경계선 같은 것들이죠. 이 주된 다섯 단어들은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줄곧 분석되고 연구되고 정의되고 다시 정의되어, 마침내 실존의 범주로 변환됩니다. 이 소설은 마치 집 한 채가 몇 개의 기둥 위에 세워진 것과 마찬가지로 몇 개의 범주 위에 세워진 것이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기둥들이란 무거움, 가벼움, 영혼, 육체, 대장정, 하찮은 것, 키치, 동정, 현기증, 힘, 허약함 등입니다.


살몽

당신 소설의 건축적 구상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죠. 당신의 소설들은 한 편만을 제외하고 모두 일곱 부로 나뉘어 있지요.

쿤데라

『농담』을 쓰고 난 후 저는 그 작품이 일곱 부분으로 구성되는 게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이어서 『삶은 다른 곳에』를 썼습니다. 거의 끝마칠 무렵에 보니 여섯 부분으로 되어 있더군요. 조금 불만스러웠습니다. 이야기가 좀 맥이 빠진 것처럼 보였거든요. 문득 주인공이 죽은 지 삼 년 뒤에(다시 말해 소설의 시간 밖에서) 일어난 일들의 이야기를 끼워 넣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게 바로 끝에서 두 번째 부인 「사십 대 남자」가 된 겁니다. 그러자 모든 게 완벽해졌죠. 나중에야 저는 이 6부가 『농담』 6부(「코스트카」)와 신기할 만큼 흡사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농담』 6부 또한 소설에 외부 인물을 끌어들여 소설의 벽에 은밀한 창을 열어 놓은 것이거든요. 『우스운 사랑들』은 원래는 열 개의 단편이었습니다. 그랬다가 최종적인 구성을 결정할 때 세 개를 없애 버렸죠. 이리하여 전체적으로 아주 짜임새 있게 되었죠. 이미 『웃음과 망각의 책』 구성을 앞질러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에요. 같은 주제들(특히 신비화의 주제)이 일곱 이야기를 하나의 전체로 묶어 주는데, 그중 네 번째와 여섯 번
째 이야기는 하벨 박사라는 동일한 주인공에 의해 한층 더 긴밀하게 연관되지요. 『웃음과 망각의 책』에 있어서도 4부와 6부는 타미나라는 동일 인물로 연결되었습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쓸 때 저는 어떻게 해서든 7이라는 숫자의 숙명성을 깨뜨려 보려고 했어요. 오래전부터 그 소설은 여섯 부분으로 구상되었죠. 그런
데 첫 부분의 형태가 끝내 만들어지지 않는 거예요. 결국 저는 이 부분이 사실상 두 부분이라는 것, 섬세한 외과 수술을 통해 둘로 분리해야 할, 한 몸으로 붙은 쌍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제가 이런 이야기들을 모두 털어놓는 것은 그것이 제 입장에서 볼 때에는 마술적인 숫자를 둘러싼 미신적 장난도 아니고 면밀한 계산에 의한 것도 아니라는 것, 오히려 심오하고 무의식적이며 이해할 수 없는 절대적 명령, 저로서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형식의 원형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제 소설들은 7이라는 숫자 위에 세워진 동일한 건축술의 변형인 셈이죠.

 

살몽    이러한 수학 체계가 어디까지 갈까요?
쿤데라

『농담』을 보세요. 이 소설은 루드비크, 야로슬라프, 코스트카, 헬레나, 이렇게 네 인물들을 통해 이야기되죠. 루드비크의 독백은 책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다른 사람들의 독백들은 모두 합해야 전체의 3분의 1(야로슬라프 6분의 1, 코스트카 9분의 1, 헬레나 18분의 1)을 차지할 뿐입니다. 이러한 수학적 구성을 통해, 제가 인물의 조명이라 부르는 것이 결정됩니다. 루드비크는 가장 밝은 곳에 있으면서 안으로부터(자신의 독백에 의해) 조명받기도 하고 밖으로부터(다른 사람의 독백은 모두 그의 모습을 추적하니까요.) 조명받기도 하지요. 야로슬라프가 책 전체의 6분의 1을 차지하는 독백으로 그려 내는 자화상은 루드비크의 독백에 의해 바깥으로부터 수정됩니다. 다른 사
람들도 마찬가지예요. 각각의 인물들은 각기 다른 밝기, 각기 다른 방식으로 조명됩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인 루치에는 자신의 독백을 갖지 못하고, 그래서 그녀는 루드비크와 코스트카의 독백을 통해 오직 외부로부터만 조명됩니다. 내적 조명이 없는 까닭에 그녀는 신비롭고 이해할 수 없는 성격을 부여받는 겁니다. 말하자면 그녀는 유리창 저편에 있어서 사람들이 건드릴 수가 없는 거죠.

 

살몽    이 같은 수학적 구조는 미리 짜이는 건가요?
쿤데라

아녜요. 저는 이런 모든 것을, 『농담』이 프라하에서 출판된 후 체코의 한 비평가가 쓴 「『농담』의 기하학」이라는 글을 통해 알았습니다. 그 글은 제게 많은 것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이러한 ‘수학 질서’라는 것은 형식의 필요로부터 자연스럽게 오니 미리 계산할 필요는 없는 겁니다.


살몽

숫자에 대한 당신의 애착은 이런 데서 기인하는 건가요? 당신의 모든 소설에서 부(部)나 장에는 모두 번호가 매겨져 있는데요.

쿤데라

저는 소설을 부로 나누고, 부를 장으로 나누고, 장을 다시 단락으로 나누는 것, 다시 말해 소설의 분할을 명확하게 하려고 합니다. 일곱 부는 각기 그 자체로 하나의 전체입니다. 각각의 것들은 나름대로 고유한 서술 유형에 따라 특징지어지죠. 예를 들면 『삶은 다른 곳에』 1부는 (각 장 사이의 인과관계를 중심으로 한) ‘연속적’ 서술이고, 2부는 몽환적 서술, 3부는 (각 장 사이의 인과관계를 무시한) 비연속적 서술, 4부는 다성적 서술, 5부는 연속적 서술, 6부도 연속적 서술, 7부는 다성적 서술 등입니다. 또 이 각각에는 고유한 지평(이것은 다른 상상적 자아의 관점에서 이야기됩니다.)이 있습니다. 또한 각기 고유한 길이가 있지요. 『농담』의 길이 순서는 아주 짧음, 아주 짧음, 김, 짧음, 김, 짧음, 김이죠. 『삶은 다른 곳에』에서는 순서가 뒤집어집니다. 김, 짧음, 김, 짧음, 김, 아주 짧음이죠. 각 장도 그 자체로 하나의 조그만 전체가 되게 하고자 합니다. 제가 출판사 측에 숫자가 눈에 잘 띄도록 해 달라고 고집하는 것이나 각 장들을 아주 분명하게 구분해 달라고 고집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죠.(가장 이상적인 건 갈리마르 출판사의 방법입니다. 즉 각 장을 새로운 면에서 시작하게 하는 겁니다.) 한 번 더 소설과 음악을 비교해도 괜찮겠죠. 한 부는 박자예요. 각 장은 하나의 소절이고요. 이 소절들은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고, 또는 길이가 아주 불규칙하지요. 이것은 우리를 템포 문제로 이끌어 갑니다. 제 소설들의 각 부분에는 모데라토, 프레스토, 아다지오 등과 같은 음악적 지시가 있을 수도 있을 겁니다.


살몽    그러니까 템포는 한 부의 길이와 그 부가 포함하는 각 장들 숫자 사이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건가요?
쿤데라

이런 관점에서 『삶은 다른 곳에』를 봅시다.

1부 11장 71쪽 모데라토
2부 14장 31쪽 알레그레토
3부 28장 82쪽 알레그로
4부 25장 30쪽 프레스티시모
5부 11장 96쪽 모데라토
6부 17장 26쪽 아다지오
7부 23장 28쪽 프레스토

보시다시피 5부는 96쪽에 장도 겨우 열하나가 있어 조용하고도 흐름이 느리니까 모데라토이고, 4부는 30쪽에 장이 스물다섯 개가 있어 속도감이 매우 빠르니까 프레스티시모가 되는 거죠.


살몽

6부는 26쪽밖에 되지 않는데 장 수는 열일곱 개죠. 제가 잘 이해했다면 템포가 매우 빠른데 당신은 이걸 아다지오로 지시해 놓으셨군요.

쿤데라

왜냐하면 템포는 또 다른 것에 의해서도 결정되니까요. 다른 것이란 한 부의 길이와, 이야기되는 사건의 ‘실제적’ 시간 사이의 관계죠. 5부 「시인, 질투하다」는 일 년 동안의 생활을 보여 주는 것임에 반해, 6부 「사십 대 남자」가 실제로 다루는 시간은 불과 몇 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각 장의 길이가 짧은 것은 시간
을 천천히 흐르게 하고 한 위대한 순간을 고정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저는 이러한 템포의 교대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게 있어 그것은 소설을 쓰기 전에 떠올리는 최초 생각의 일부가 되는 경우도 자주 있지요. 『삶은 다른 곳에』 6부의 아다지오(평온과 동정의 분위기)는 곧 7부의 프레스토(흥분되고 난폭한 분위기)로 이어지지요. 저는 이 마지막 교대에 이 소설의 모든 정서적 힘을 집중하려 했던 겁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경우는 이와는 정반대죠.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저는 마지막 부분(「카레닌의 미소」)이 피아니시모와 아다지오(별 사건 없는 차분하면서도 우수적인 분위기)가 되어야 하리라는 것을 알았고 또 그것이 포르티시모와 프레스티시모(「대장정」,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 격렬하면서도 냉랭한 분위기)에 의해 이끌려야 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죠.

 

살몽    그러니까 템포 변화는 정서적 분위기의 변화까지도 내포하는 거로군요.
쿤데라

음악에서 배울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음악의 각 소절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우리에게 정서적인 느낌을 전달해 줍니다. 교향곡이나 소나타에서 박자들의 순서는 언제나 느림과 빠름의 교대라는 불문율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것은 거의 자동적으로 우울한 박자와 경쾌한 박자를 의미하지요. 이 같은 정서적 교대는 금방 강제적인 상투형이 되어 버려서 오직 위대한 대가들만이(이들도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잘 알려진 곡을 예로 들어 말하자면 저는 쇼팽의 소나타 중에서 세 번째 악장이 장송 행렬인 것을 높이 평가합니다. 과연 이처럼 위대한 작별 후에 무엇을 더 말할 수 있겠습니까? 통상 그런 것처럼 빠른 론도로 소나타를 끝내나요? 베토벤조차도 자신의 26번 소나타에서는 흥겨운 종장이 장송 행렬에 이어지게 하여 이런 상투형에서 벗어나지 못했죠. 쇼팽의 소나타 4악장은 전혀 색다릅니다. 빠르고 짧으면서 아무런 멜로디도 없어서 완전히 무감정한 피아니시모입니다. 먼 데서 들려오는 거센 바람 소리와 귀청이 터질 것 같은 소리는 완전히 잊히리라는 것을 예고하죠. 이처럼 감정적인 악장과 무감정적인 두 악장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우리를 목 메게 만드는 겁니다. 정말 독창적이죠.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소설을 구성한다는 것도 여러 다른 정서에 공간을 배열하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제 생각에 이것이야말로 소설가의 가장 섬세한 기술이라는 것을 알려 드리기 위해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