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구성에 관한 대담 -1

비평

예술의 구성에 관한 대담

살몽 - 쿤데라(『소설의 기술』 수록)

 

 

살몽

 헤르만 브로흐에 대해 당신이 쓴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 대담을 시작해 볼까요. 당신은 “모든 위대한 작품들에는 (바로 위대한 작품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브로흐는 그가 훌륭하게 이룩해 낸 모든 것들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그가 의도했음에도 이루지 못한 모든 것들을 통해서도 우리를 고무한다. 그의 작품에서 이루어지지 못한 것들은 다음과 같은 필요성들을 일깨워 준다. 첫째, (건축적 명확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현대 세계에서의 인간 실존의 복잡성을 포괄할 수 있게 해 주는) 발본적인 검사라는 새로운 기법의 필요성. 둘째, (한 음악에 철학과 이야기와 꿈을 한데 용해할 수 있는) 소설적 대위법이라는 새로운 기법의 필요성. 셋째,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가설적, 유희적, 역설적인 것으로 그치는) 전적으로 소설적인 에세이라는 새로운 기법의 필요성”에 대해서 말씀하셨지요. 이 세 가지 사항 속에서 당신의 예술적 프로그램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군요. 우선 첫 번째 것부터 시작하죠. 발본적 검사 기법이라는……

쿤데라

제가 보기에 현대 세계에서 인간 실존의 복잡성을 포착해 내기 위해서는 생략과 압축의 기법이 요구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끝없는장황함의 함정에 빠지고 말지요. 『특성 없는 남자』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완성되지 않은 그 소설의 엄청난 규모까지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너무나 커서 한눈에 전체의 윤곽을 볼 수 없는 성(城)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넘을 수 없는 인간적인 한계라는 게 있는 겁니다. 가령 기억력의 한계 같은 것이겠지요. 소설을 다 읽은 후에도 소설의 처음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설은 형식을 잃게 되고 소설의 ‘구성적 명확성’도 흐려지게 되지요.

 

살몽

『웃음과 망각의 책』은 일곱 부로 구성되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그 부들을 덜 생략적인 방식으로 다루었더라면 각기 다른 일곱 소설 일곱 권으로 쓰였을 수도 있었을까요?

쿤데라

하지만 제가 만약 독립된 소설 일곱 편을 썼더라면 책 한 권으로‘현대 세계에서의 인간 실존의 복잡성’을 포착하려는 희망을 품을 수가 없었겠지요. 그러니까 생략 기법은 제가 보기에는 반드시 필요한 거예요. 그것은 항상 사물의 본질로 곧장 갈 것을 요구하죠. 이런 점에서 제가 어렸을 적부터 존경해 온 작곡가인 레오시 야나체크가 생각나는군요. 가장 위대한 현대 음악가 중 한 사람이죠. 쇤베르크와 스트라빈스키가 아직 대형 오케스트라 음악을 만들던 시대에 그는 벌써 관현악을 위한 악보가 아무 필요도 없는 음표들의 부담에 짓눌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이러한 생략의 의지에 따라 그는 나름대로 혁신에 착수한 겁니다. 당신도 아시겠지만 작곡을 하는 데에는 많은 기법이 있습니다. 주제 제시, 전개, 변주, 간혹 매우 자동화되기까지 한 화성 작업, 관현악 편성을 위한 편곡, 전조 등. 오늘날 사람들은 컴퓨터로 음악을 만들 수 있지만 작곡가들의 머릿속에는 항상 컴퓨터가 있어 왔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들은 미리 구상하지 않고도 작곡 규칙들을 ‘인공 두뇌적’으로 전개하는 방식만으로도 소나타 한 편을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야나체크의 명령은 그 ‘컴퓨터’를 때려 부수라는 것이었죠. 전조가 아니라 느닷없는 병치를 통해, 변주가 아니라 반복을 통해 항상 사물의 핵심을 파고 들어가라는 것이죠. 오직 본질적인 무엇인가를 말하는 음표만이 존재할 자격이 있는 겁니다. 소설도 이와 거의 비슷해요. 소설에도 ‘기법’들만, 그리고 작가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해 버리는 관습들만 우글거리죠. 인물을 소개하고 환경을 묘사하고, 역사적 상황 속에 행동을 개입하고, 인물들의 삶의 시간을 불필요한 일화들로 채워 넣는 등. 매번 무대를 바꿀 때마다 새로운 소개, 새로운 묘사, 새로운 설명이 요구되지요. 제 지상명령도 야나체크와 비슷한 겁니다. 즉 기법의 자동성과 장황함을 제거해 소설을 압축하라는것이죠.

 

살몽

두 번째로 당신은 ‘소설적 대위법이라는 새로운 기법’에 대해 얘기했는데, 브로흐의 경우는 그리 만족스럽지 않은 모양이군요.

쿤데라

『몽유병자들』의 세 번째 소설을 보세요. 의도적으로 이질적인 다섯 요소, 다섯 ‘계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 파제노, 에슈, 후게나우라는 3부작 소설의 세 주요 인물 위에 세워진 소설적 이야기. 둘째, 한나 벤들링에 대한 내면 소설. 셋째, 군병원에 대한 르포. 넷째, 한 구세군 아가씨에 대한 시적 이야기.(이 일부는 운문으로 되어 있지요.) 다섯째, (학술적 언어로 쓰인) 가치들의 타락에 관한 철학적 논설 등이죠. 이 다섯 계열들 하나하나는 그 자체로는 대단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반복적인 교체를 통해 (다시 말해 ‘다성적(polyphonique)’이려는 분명한 의도에 따라) 동시적으로 다루어지기는 하지만 하나로 통합되지 못하고, 쪼갤 수 없는 하나의 전체를 이루지도 못합니다. 달리 말하면 기술적인 면에서는 작가의 다성적 의도가 성취되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거죠.

 

살몽

다성적이라는 용어가 문학에 적용되는 것은 비유적인 것인데 이때문에 소설이 충족할 수 없는 요구가 생겨나지는 않을까요?

쿤데라

음악에서 다성(多聲)이라는 것은 완벽하게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각기 나름대로 상대적인 독자성을 유지하는 둘, 혹은 그 이상의 여러 소리(선율)가 동시적으로 전개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소설적 다성이란 무엇이냐? 우선 반대되는 것을 말하자면 단선적(單線的) 구성이죠. 그런데 이야기가 시작되면서부터 소설은 단선적 성격에서 벗어나 이야기로 계속 이어지는 서사 속으로 가지를 뻗으려 합니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의 단선적인 편력담을 들려줍니다. 그러나 그가 편력하는 동안 돈키호테는 다른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또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1부에만도 이야기가 네 편 있지요. 이 네 개의 가지가 이 소설을 단선적 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는 거죠.

 

살몽    그렇지만 그건 다성적인 게 아니잖아요!

쿤데라

그건 여기에 동시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슈클로프스키의 용어를 빌려 말하면 소설이라는 ‘상자’ 속에 ‘포장’된 소설인 셈이죠. 17세기와 18세기의 많은 소설가들에게서 이 ‘포장’이라는 방법을 찾아볼 수 있어요. 19세기에는 단선적 성격을 넘어설 수 있는 다른 방식이 개발되었는데 이 방법을, 꼭 적절하지는 않지만 우선 그런 대로 다성적 방법이라 부를 수 있으리라는 거죠. 『악령(Besy)』을 순전히 기법 관점에서만 분석해 보면 이 소설이 동시에 전개되는 세 계열로 구성 되었다는 것과, 따라서 만일 필요하기만 했다면 독립적인 세 편의 소설로 만들어질 수도 있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 계열이란 첫째, 늙은 스타브로긴과 스테판 베르코벤스키 사이의 사랑에 대한 아이러니 소설. 둘째, 스타브로긴과 그의 애인들 사이의 낭만적 소설. 셋째, 혁명가 집단에 관한 정치 소설 등이죠. 모든 인물들이 서로 아는 사이이기 때문에 이 세 계열은 정교한 서사 기법을 통해 쪼갤 수 없는 하나의 전체로 어렵지 않게 연결될 수 있었던 겁니다. 이 같은 도스토옙스키적 다성적 방법에다 이제 브로흐의 방법을 비교해 보면, 브로흐의 경우가 훨씬 더 발전된 거예요. 비록 성격이 각기 다르기는 하나 어쨌든 『악령』에서는 세 계열이 세 편의 소설적 이야기라는 같은 장르에 속했음에 비해, 브로흐에게 다섯 계열은 소설, 단편소설, 르포, 시, 에세이라는, 근본적으로 다른 장르들에 속했지요. 이처럼 비소설적인 장르들을 소설의 다성적 특성 속에 통합한다는데에 브로흐의 혁신적인 면모가 있는 겁니다.

살몽

하지만 당신 말대로라면 이 다섯 계열들은 서로 충분히 잘 엮이지 않았다는 거죠. 사실 한나 벤들링은 에슈를 알지 못하고 젊은 구세군 아가씨는 한나 벤들링의 존재를 결코 알 수 없을 겁니다. 이처럼 서로 만나거나 교차하지 않는 다섯 계열을 단일한 전체로 묶어 줄수 있는 서사 기법은 없겠죠.

쿤데라

그것들은 단지 공통 주제에 의해서만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주제적 결합만으로도 얼마든지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분산의 문제는 다른 데 있어요. 다시 한 번 살펴봅시다. 브로흐에게 다섯 계열은 동시에 전개되지만 서로 만나지는 않고, 하나 혹은 여러 주제에 의해 결합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런 방식의 구성을 지칭하기 위해 저는 다성적 방법이라는 음악 용어를 빌려온 것이죠. 이렇게 소설을 음악과 비교하는 것이 전혀 터무니없는 일이 아니라는 건 당신도 잘 아실 거예요. 실제로 다성적 방법을 사용한 위대한 음악가들의 기본 원칙 가운데 하나는 바로 소리들의 등가성이었습니다. 어떤 소리도 지배해서는 안 되고, 어떤 소리도 단순한 부속물의 구실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거죠. 그런데 『몽유병자들』의 세 번째 소설의 결함으로 보이는 것은 다섯 ‘소리’가 동등하지 않다는 거예요. 첫 번째 계열(에슈와 후게나우에 대한 ‘소설적’ 이야기)은 나머지 다른 계열들에 비해 양적으로 훨씬 많은 자리를 차지하지요. 특히 에슈와 파제노의 중개를 통해 앞의 두 소설과도 연관되었다는 점에서내용적으로도 특별히 취급되었어요. 그래서 특별한 관심을 유도하면서 나머지 네 ‘계열’을 단순한 ‘부속물’ 역할에 국한시킬 우려가 있어요. 두 번째 사항은, 바흐의 푸가는 그 소리들 가운데 어떤 것도 없어서는 안 되지만, 반대로 독자적인 텍스트를 이루는 한나 벤들링에 대한 단편소설이나 가치의 타락에 대한 에세이는 그게 없더라도 소설의 전체적인 의미나 이해가 상실되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소설적 대위법의 필수 조건이란 첫째, 각 계열의 등가성, 둘째, 전체의 분리불가능성입니다. ‘천사들’이라고 제목을 붙인 『웃음과 망각의 책』 3부를 끝내던 날이 기억나는군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했다고 확신하고는 말할 수 없이 뿌듯했지요. 이 텍스트는 다음과 같은 요소로 구성되었어요. 두 여학생과 그들의 영매(靈媒)에 대한 일화, 자전적 이야기, 한 여성 운동 책자에 대한 비평적 논설, 천사와 악마에 대한 우화, 프라하 상공을 비행하는 엘뤼아르에 관한 이야기 등이죠. 이 각각의 요소들은 다른 것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천사란 무엇이냐?’라는 하나의 주제, 하나의 물음을 둘러싸고 서로를 조명하고 설명해 줍니다. 이 한 가지 물음이 그것들을 결합하는 것이죠. 또한 ‘천사들’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6부는 타미나의 죽음에 관한 몽환적인 이야기, 제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자전적 이야기, 음악에 대한 생각들, 프라하를 황폐하게 만드는 망각에 대한 생각들 등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 아버지와, 아이들에게 시달리는 타미나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겠습니까? 그건, 초현실주의자들이 즐겨쓰는 표현을 빌려 말하면, 동일한 주제라는 탁자 위에서의 ‘우산과 재봉틀의 만남’과 같은 겁니다. 소설적 다성이라는 건 기법이라기 보다는 시에 훨씬 더 가까운 거죠.


살몽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대위법은 훨씬 조심스럽군요.
쿤데라

다성적 특성은 6부에서 매우 뚜렷하게 나타나죠. 스탈린의 아들에대한 이야기, 종교적인 생각들, 아시아에서의 정치적 사건, 방콕에서의 프란츠의 죽음, 보헤미아에서의 토마시의 장례식 등은 끊임없이 제기되는 ‘키치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 다성적 문장이 모든 구성의 관건이지요. 건축학적 균형의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살몽     어떤 비밀이죠?
쿤데라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 부분이 스토리 차원에서 쓰인 것이 아니라 에세이(키치에 대한 에세이) 차원에서 쓰인 것이라는 겁니다. 인물들의 단편적 삶들은 하나의 ‘예(例)’, ‘분석되어야 할 상황’으로 이 에세이 속에 삽입된 것이죠. 이런 식으로 지름길을 통해 지나치면서 우리는 프란츠와 사비나 인생의 종말과, 토마시와 아들 사이의 관계가 풀리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생략법은 구성을 엄청나게 가볍게 만들어 줍니다. 둘째는 연대기적인 순서 바꾸기입니다. 6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마지막 7부에서 일어난 사건들 이후의 일들이지요. 이러한 순서 바꾸기를 통해 마지막 부분은 목가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어떻게 될 건가를 우리가 미리 알기 때문에 생겨나는 우수로 충만하게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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