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데라와 전율하는 자아

비평

쿤데라와 전율하는 자아

김미래(민음사 편집부)

 

 

     2011년 7월 14일, 《뉴욕 타임스》에서 발행하는 북리뷰 매체 《뉴욕 리뷰 오브 북스》에는 영국의 젊은 소설가 애덤 설웰(Adam Thirlwell)의 서평 「쿤데라의 실험실에서(In Kundera’s Laboratory)」가 실렸다. 『소설의 기술』, 『배신당한 유언들』, 『커튼』을 비롯하여 『만남』 등 쿤데라의 에세이를 주로 다루고 있었다. 이 일련의 에세이들은 밀란 쿤데라가 자신의 작품은 물론 라블레, 세르반테스, 카프카, 플로베르, 곰브로비치 등 이 시대 최고의 문학가와 그들의 작품은 물론, 야나체크와 베토벤의 음악, 프랜시스 베이컨의 회화에 이르는 예술을 폭넓게 조망하여 인간 실존에 대해 성찰하고 탐구한 작품들이다. 쿤데라가 “예술가가 다른 예술가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언제나 (간접적으로, 우회적으로)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며, 그 점이 예술가의 판단이 흥미로운 이유”(『만남』)라고 밝혔듯, 그의 에세이에 대한 탐구는 쿤데라 문학 전반에 관한 이해이자 비평의 시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수학이나 과학에나 어울릴 법한 “실험실”이란 제목은 절묘하다. 실제 쿤데라의 소설 대부분은 일곱 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작가는 “수학적 질서는 형식의 필요로부터 자연스럽게 오는 것”이며, 이러한 규칙은 “심오하고 무의식적이며 이해할 수 없는 절대적 명령”이고, 자기로서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형식의 원형”이라고 말한다.(『소설의 기술』) 『삶은 다른 곳에』도 초기에는 여섯 부로 구상했다가, 미완이라는 느낌을 지우지 못하고 결국 한 부를 쪼개어 총 일곱 부로 만들었다고 그는 밝혔다.
     서평의 제목처럼 구성 면에서 볼 때, 쿤데라가 문학을 통해 어떠한 “실험”을 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주제 면에서는 다르다. 애덤 설웰은 “쿤데라가 소설을 두고 연구실에서처럼 정치나 역사를 실험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이는 정치나 역사가 소재가 될지언정 주제는 되지 못한다는 말로 이해된다. 아나톨 프랑스에 관한 에세이에서 쿤데라는 “소설가가 소설을 쓴 것은 대혁명에 유죄를 선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혁명에 참여한 배우들의 미스터리를 살펴보기 위해서, 그리고 동시에 또 다른 미스터리들, 공포 속에 슬며시 끼워진 희극적인 것의 미스터리, 극적인 것에 동반되는 지루함의 미스터리, 목이 잘리는 것을 즐기는 감성의 미스터리, 인간 최후의 안식처로서의 유머의 미스터리 들을 살펴보기 위해서”(『만남』)라고 말한다. 아나톨 프랑스의 『신들은 목마르다』가 자칫 프랑스 혁명의 열정을 풍자하는 작품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실은 “일상의 평범함”에 주목하며,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극적인 역사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한 일상은 함께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의도에서 쓰였다는 것이다.


     『소설의 기술』은 소설의 전망에 대한 쿤데라의 견해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소설은 새로운 미래를 위해 사라지게 될 예술”이라는 뭇 전위주의자들의 예언처럼, 밀란 쿤데라도 현대 사회, 구체적으로는 체코의 전체주의 아래에서 출판 금지, 검열, 사상적 탄압에 의한 소설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소설의 존재 이유가 삶의 세계를 영원한 빛 아래 간직하고 우리를 ‘존재의 망각’으로부터 지키는 것이라면, 오늘날 소설의 존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필요한”(『소설의 기술』) 것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한다. 이데올로기가 축소되어 더 이상 논리적 사상 체계를 담지하지 못하고 일련의 이미지만 남게 된 “이마골로기(imagologie)”의 시대 속에서, 오히려 소설의 당위성은 더욱 커진다고 그는 역설한다. 그렇다면 현대의 소설은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는 걸까?

     그는 “원소설”이라고 대답한다. “원소설”은 쿤데라가 『만남』에서 소설의 모더니즘을 구축하려는 아방가르드의 시도(반소설)에 대항하여 언급한 개념이다. 쿤데라에 따르면 “원소설”은 “첫째, 오직 소설만이 말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고 “둘째, 소설 예술이 지난 4세기의 역사 동안 축적해 온 모든 가능성들, 등한시되고 잊힌 모든 가능성들을 되살린다”는 의무를 갖는다. 그는 또한 “원소설”의 근본적인 성격을 비진지성이라고 설명했는데, “진지하지 않은 것은 바로, 역사 내내 무시되어 왔던 소설 예술의 가능성들 중 하나”(『만남』)이며, 엄숙하지 않은 정신은 원소설이 결코 정치, 사회와 같은 세계의 외부적인 문제를 선형적, 정면적으로 다루지 않음을 의미한다. 대신에 “원소설”은 “권력에서 멀리 떨어졌고, 권력을 갈망하지 않으며, 역사를 늙은 장님 마녀 정도로 치부하기에 그런 마녀의 도덕적 평결에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들의 유머”(『만남』)의 길을 택한다. 이 책에서 쿤데라는 “원소설”의 모범으로 라블레와 세르반테스를 든다. 라블레의 유머와 아이러니, 세르반테스의 과장은 단지 웃기거나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나 상황을 애매하고 상대적인 것으로 다룬다. 이를테면 『농담』의 배경이 되는 지뢰투성이 베트남 접경 지역에서, 깡충깡충 뛰며 행진 대원들에게 플래시를 터뜨리는 기자들의 모습은 퍽 우스꽝스러운데, 이때 죽음은 엄숙한 것이 아니라 지천에 깔린, 심각할 것 없는 것으로 취급된다.
    

     역사적인 맥락과 자신의 소설관 사이에 직접적인 연결 고리가 놓이는 것이 작가에게는 달갑지 않겠지만, 애덤 설웰은 독자의 본능에 충실하여, 쿤데라의 국적과 언어 문제를 이야기한다. 그는 쿤데라가 제시했던 “원소설”의 요건, 즉 소설의 여러 가지 잠재적 가능성을 복원한다는 실험 지향적인 태도가, 쿤데라의 전기적 사실(쿤데라는 프라하의 봄 이후 프랑스로 귀화했고, 이는 그의 문학에서 점차적으로 프랑스어의 비중이 늘어 가는 계기가 되었다.)에서 명백히 관찰된다고 보았다. 이 세르반테스의 후손은 미지의 세계로 탐험을 나선 돈키호테 같은 자세로 소설이라는 불확실한 세계를 탐험해 왔고, 그 과정에서 언어의 운용과 대체, 창작과 번역(애덤 설웰은 이를 두고 “언어 자체에 가해진 문체 극단의 실험”이라고 말한다.)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이 사실이다.
     쿤데라는 『만남』에서 나고 자란 나라, 즉 체코가 “사형 선고”를 받은 순간 느꼈던 감정을 묘사했고(“나의 조국을 강타한 (그 결과가 백 년 동안 지속될) 대재앙이 불러일으킨 환멸은 단지 정치적 사건들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 환멸은 있는 그대로의 인간과 관련되었다. 잔인함 그리고 그 잔인함을 감추기 위해 사용되는 비열한 알리바이를 동시에 가진 인간, 언제든지 감정으로 자신의 야만성을 정당화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인간과 관련된 것이었다.”) 1989년 한 인터뷰에서는 선택한 나라, 즉 프랑스에서 이룬 소설가로서의 성공에 대해 “작가로서의 조국으로 프랑스를 선택했습니다. 내 책들이 먼저 나온 곳이 파리였고,나는 그 상징적 의미를 매우 귀중히 여겨요.”(Lois Oppenheim, “Clarifications, Elucidations: An interview with Milan Kundera”, The Review of Contemporary Fiction, 1989)라고 밝혔다.
     존재하는 듯 보이나 한편 금세 허물어질 수 있는, 그리하여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있는 세계 속에서 그가 실존의 문제에 천착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만남』 서두로 가면 프랜시스 베이컨이 그린 헨리에터 모레스의 초상화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쿤데라는 이 작품을 마주하고 “무한히 연약하며 몸 안에서 전율하는” 자아를 발견했다고 말한다. 아마 쿤데라가 헨리에터 모레스를 그렸더라도, 여러 가능성의 실험과 전복적인 시도의 결과로, 그녀의 겉모습은 알아볼 수 없게 뭉개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낱낱이 찢기고 생략되고 과장된 표현 속에서 한 실존은 비로소 고개를 내밀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