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적 지식’의 절제된 아름다움

비평

‘소설적 지식’의 절제된 아름다움

정여울(문학평론가)


 

자아의 유일성을 가꾸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덧셈 법과 뺄셈 법이다. 아녜스는 자신의 순수한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자신의 자아에서 외적인 것과 빌려온 것을 모두 추려 냈다. (……) 로라의 방법은 정확히 그 반대다. 자신의 자아를 좀 더 잘 보이게 하고, 좀 더 파악하기 쉽게 하고, 좀 더 두텁게 하기 위해서, 그녀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덧붙여 그것에 자기를 동화했다.(7, 164쪽)

 

 
      소설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지식이 있을까. 백과사전이나 학술 논문이나 역사책에서는 얻을 수 없는, 오직 소설에서만 얻을 수 있는 지식. 밀란 쿤데라는 내게 소설을 통해서만 다다를 수 있는 앎의 영역이 있을 것이라는 뜨거운 믿음을 준 작가다. 소설 속의 지식은 육하원칙의 프레임으로 정리할 수 있는 논리적 정보로 환원되지 않는다. 소설 속의 지식은 무엇보다도 그 지식을 발화하거나 실천하는 허구의 인물을 통해 구현된다. 허구를 통해 역설적으로 진실에 도달하는 소설의 마법은 ‘지식’이라는 단어에 묻어 있는 부담감을 누그러뜨린다. 객관적 통계나 과학적 실험, 논리적 분석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는 여타의 학문적 방법과 달리, 소설의 진실 건축법은 인간의 상상력과 감수성의 한계를 스스로 뛰어넘는 사유의 모험을 요구한다. 우리는 소설을 통해 교과서나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삶의 진실’에 진입할 수 있는 입장권을 선물받는다.
      예컨대 우리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통해 키치나 영원 회귀라는 철학적 탐구의 대상을 마치 친구와 옆에서 실제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현장감으로 사유할 수 있게 된다. 키치와 영원회귀는 토마시와 테레자와 사비나의 목소리와 생각과 몸짓을 통해 ‘철학적 사유의 대상’에서 ‘소설적 지식’의 일종으로 다시 태어난다. 사전적 정의나 학술적 연구와 달리 소설적 지식은 허구적 인물의 감정과 욕망, 꿈과 몽상 같은 비논리적이지만 현실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로 우리의 감성을 자극한다. 소설적 지식은 단지 철학이나 역사의 테마뿐 아니라 엄밀하게 범주화할 수 없는 지식, 우리 삶에 절실한 주제이긴 하지만 논리적 사유의 정제된 형태로 표현하기 어려운 지식을 구현하기도 한다. 테레자를 통해 우리는 배운다. 때로는 ‘나약함’이 강인함보다 더욱 치명적인 유혹의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토마시를 통해 우리는 느낀다. ‘에로틱한 우정’이라는 불가능한 이상을 꿈꾸는 것은 ‘무거운 연애’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불완전한 인간의 포기할 수 없는 열정이라는 것을. 무거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테레자와 태생적으로 가벼움에 집착하는 토마시와의 결합은 우주의 불균형을 스스로 회복하는 주체와 타자의 만남이 아닐까. 둘의 운명적인 조우는 ‘사랑은 단 하나의 은유에서 태어날 수도 있다’는 아름다운 깨달음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이런 깨달음은 소설이 아닌 다른 무엇에서 얻기 힘든 지극히 내밀한 소설적 지식이 아닐까.


그녀를 깨울까 두려워 그는 그 손아귀에서 차마 손을 빼지 못하고 그녀를 자세히 보기 위해 아주 조심스럽게 돌아누웠다. 이번에도 여전히 테레자가 송진으로 방수된 바구니에 담겨 강물에 버려진 아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기가 담긴 바구니를 난폭한 강물에 띄워 보낼 수 있다니!

파라오의 딸이 어린 모세가 담긴 바구니를 강물에서 건져 내지 않았다면 구약성서도 없었을 테고, 그러면 우리 문명은 어찌 되었을까! 수많은 고대 신화의 도입부에는 버려진 아기를 구하는 누군가가 있다. 폴리보스가 아기 오이디푸스를 줍지 않았다면, 소포클레스는 그의 가장 아름다운 비극도 쓰지 않았을 것을!
그 당시 토마스는 은유란 위험한 어떤 것임을 몰랐다. 은유법으로 희롱을 하면 안 된다. 사랑은 단 하나의 은유에서도 생겨날 수 있다.(6, 20~21쪽)


     밀란 쿤데라는 어릴 때부터 열광했던 체코 작곡가 야나체크의 음악을 통해 ‘생략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야나체크가 음악의 본질을 위해서 음악을 절제한 것은 가히 혁명적이었다고. 독창적인 아이디어 하나도 없이 오직 컴퓨터로 작곡을 할 수 있는 시대. 인공두뇌식 작곡의 전개 법칙만 알면 누구나 작곡을 할 수 있는 세상. 야나체크의 목적은 이런 컴퓨터를 파괴하는 것이었다고. ‘인공지능으로도 작곡을 할 수 있다’는 믿음과 투쟁하는 것. 그것은 모든 번거로운 기교와 과잉된 디테일을 지우고, 오직 작곡가의 핵심적인 창조적 영감만을 작품 안에 남겨 놓는 극한의 절제를 통해서만 가능한 이상이었다. 쿤데라는 야나체크의 ‘생략의 미학’을 자신의 작품 속에서도 구현하고 싶어 했다. 등장인물을 소개하고, 장소를 묘사하고, 행동을 역사적 세팅 속으로 끌어들이고, 소용없는 에피소드들로 등장인물들의 일생을 가득 채우는 어떤 익숙한 패턴도 사용하고 싶지 않다고. 쿤데라의 목적은 작곡가 야나체크처럼 ‘머릿속의 컴퓨터’를 폭파해버리는 것이었다.(11, 109쪽)

     쿤데라에게 소설은 인식의 자동화에 저항하는 행위, 자동화되고 패턴화된 모든 인식의 흐름을 폭파하는 글쓰기가 아닐까. 오직 작가의 가슴을 뒤흔드는 상상력의 전류를 통과하지 않는 어떤 클리셰도 허용하지 않는 것. 절제되지 않은 기교로 넘실거리는 허위의 문장은 한 문장도 소설의 문턱 안에 들이지 않는 것. 나는 심오한 철학적 사유조차 가벼운 농담처럼 툭 던질 수 있는 쿤데라의 ‘무거운 경쾌함’이 좋다. 그리고 다양성을 인정한답시고 모든 불의를 허용하는 세태를 거침없이 비판하는 쿤데라의 ‘차가운 분노’가 좋다. 그리고 비평가들이 차마 입을 떼기도 어렵게 자신의 소설에 대해 너무도 명쾌히 설명할 줄 아는 쿤데라식 ‘마음의 거울’이 좋다. 그 마음의 거울에는 자신에 대한 앎은 물론, 세상을 향한 지칠 줄 모르는 탐구열과 옳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투쟁의 의지가 번득이기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할 말은 하고 보는’ 쿤데라식 솔직함이 가장 좋다. 그 거침없는 솔직함이야말로 날이 갈수록 견고해지고 세련미를 더해 가는 거대 자본의 위협 속에서 ‘독창적이고 유일한 개인의 표현’을 지켜 나가는 예술가의 소중한 무기이기 때문이다.

 

텍스트 대부분은 소위 시청각 산업이라는 거대 산업과 관련된 내용이다. 물론 이 거대 산업은 완전히 새로운 게임 규칙들을 요구한다. 사실 상황이 변했다. 아직도 사람들이 예술이라 부르는 것은 날이 갈수록 ‘독창적이고 유일한 개인의 표현’으로 존중받지 못한다. 수백만 프랑이 드는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가 어떻게 자기의 도덕적 권리들(말하자면 자신이 쓴 것에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게 할 수 있는 권리)을 인정받을 수 있겠는가. (……) 저자가 아니면서도 분명 그 영화의 유일한 주인인 제작자의 의사에 반해 뭔가를 요구할 수 있겠는가.(12, 40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