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소설가보다 위대하다 - 1

비평

소설은 소설가보다 위대하다 _1 


박성창-쿤데라(《세계의 문학》 2000년 겨울호)



     11월의 파리. 파리에 살아 본 사람이라면 이 계절의 파리가 마음속에 불러일으키는 황량함을 기억할 것이다. 게다가 쿤데라를 만나기로 한 오늘 아침은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불고 비까지 내리기 시작해서 대담자의 마음을 더욱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릴케가 ‘회색 도시’라고 했던 파리의 모습이 지금의 파리의 모습은 혹시 아닐까. 약속 장소까지 버스를 타고 가면서 나는 변화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여기 와서 놀란 것 가운데 하나는 변한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사람들도 건물들도 가로수도 지하철도 모든 것이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심지어 가장 변화가 요구되는 텔레비전 속 출연자들도 거의 전과 똑같은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너무나도 빠른 변화의 속도 때문에 힘들어한다면 혹시 여기는 너무나도 느린 변화의 속도 때문에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변화란 기억과 망각의 문제다. 그것은 기억하는 것과 망각해 버린 것 사이의 함수 관계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나는 약속 장소인 파리 7구에 위치한 루테티아 호텔에 오 분 일찍 도착했으나 쿤데라는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인사를 하고 쿤데라가 예약해 둔 레스토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1929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치면 일흔두 살(편집자주 — 2000년 당시의 나이다.)인 쿤데라는 나이보다 족히 십 년은 젊어 보였다. 큰 키에 주름살이 없는 건강한 얼굴,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강한 체코어 억양이 섞인 프랑스어를 쓰고 있었다. 호텔 근처 식당에 도착하니 그의 부인인 베라 쿤데라가 반갑게 맞아 준다. 베라 또한 쿤데라처럼 친절하고 유쾌했으며 대담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식사를 하면서는 주로 신상에 관련된 이야기들과 다른 여러 화제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가운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만을 옮겨 보기로 하는데 다만 시간상으로 나중에 나눈 이야기들도 그 논리적 순서에 따라 위치가 바뀐 경우도 있음을 밝혀 둔다.



1 프라하와 파리 사이에서


박성창 

1975년에 체코를 떠나서 프랑스로 망명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제일 먼저 정착한 곳은 어디입니까?

쿤데라 

처음에는 렌이라는 브르타뉴 지방에 있는 도시에서 살았지요. 렌대학 비교문학과에서 강의를 맡을 수 있게 되었고 덕분에 망명객 대부분이 겪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부터 다소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처음 정착한 곳이 프랑스의 수도이자 대도시인 파리가 아니라 지방 소도시였던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인 것 같군요.


박성창 당신은 어느 글에선가 “프랑스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지방에서다.”라고 말했지요.

쿤데라 그렇습니다. 언어, 요리, 풍습, 대인 관계, 이 모든 것에서 프랑스적인 어떤 것을 음미할 수 있었습니다.


박성창 

그 후로 당신은 파리로 와서 지금 저희가 같이 점심 식사를 하고있는 이 식당 맞은편에 있는 ‘고등 사회 과학원’에서 강의를 하셨지요.(이야기하고 있는 도중에도 쿤데라는 식당에 들어오는 지인들과 악수를 하거나 눈인사를 보냈다.)

쿤데라 

물론 그렇습니다만 저의 본업은 교수가 아니라 작가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같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데리다는 언젠가 “학교 문턱을 넘을 때마다 매번 고통을 느낀다.”라고 했는데 특히 작품으로 말해야 하는 작가로서 저는 이러한 고통이 심했지요. 물론 지금은 작품에만, 오직 작품에만 전념하고 있습니다.


박성창 

그렇다면 좀 더 각도를 달리해서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작가인 쿤데라와 교사인 쿤데라 간의 갈등이 아니라 작가 쿤데라와 이론가 쿤데라 사이의 갈등 말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뿐 아니라 『소설의 기술』도 무척이나 흥미있게 읽었기 때문입니다. 『소설의 기술』에서 당신은 문학에 대한 무척 해박한 지식과 당신 나름대로의 견해를 펼쳤는데요.

쿤데라 

내가 이론가는 아닐지라도 그때는 좀 더 분명한 언술 형태로 나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로는 이론적인 표명으로부터 줄곧 거리를 유지하려고 했고,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박성창 

그렇다면 이 대담조차 어쩌면 모순일 수도 있고 당신 입장에서 볼때는 무척 어려운 결정이었으리라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작가가 동시에 비평가이기도 한 것이 프랑스 문학의 중요한 특징들 가운데 하나 아닌가요. 보들레르는 말할 것도 없고 발레리를 거쳐서 사르트르에 이르는 전통 말입니다.

쿤데라 저를 그러한 전통에 위치시키는 것은 다소 무리인 것 같군요.


박성창 그럼 그 후로는 계속 파리에 머물고 계십니까?

쿤데라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일 년의 반은 파리에서, 나머지 반은 지방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파리와 지방을 왔다 갔다 하는 셈이지요. 굳이 말하자면 제 삶은 파리와 지방 ‘사이’에 있다고 할까요.


박성창 

그 ‘사이’라는 말은 예사롭지 않게 들립니다. 왜냐하면 잠시 후에 같이 이야기해 볼 기회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당신 삶 또한 파리와 프라하 ‘사이’에 있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쿤데라 

그 ‘사이’에서 어느 하나로 귀착되거나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서 생길 수 있는 실존의 가능성 모두를 받아들이고 향유하는 것이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그 외에도 나는 그의 생활과 관련된 몇 가지 질문을 던졌으나 쿤데라는 여전히 개인 삶의 일화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기를 꺼리는 기색이 완연했다. 어려서부터 개인적으로 프랑스어를 배웠으며 프랑스 문학을 원서로 탐독했는데 그 당시 프라하와 프랑스 문화는 매우 긴밀한 관계였다고 말하고는 더 이상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다. 대신 그는 한국어와 한국 문화,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해 궁금한 듯 내게 몇 가지 질문들을 했다. 그가 어느 글에서 개인적인 삶의 고백으로서의 소설을 거부하는 입장을 표명했던 것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인간 실존의 탐구로서의 소설, 나는 결단코 소설을 고해 성사의 형태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 여기에 담겨 있다. 인생에서든 문학에서든 고백하는 것에 나는 저항감을 느낀다. 나의 삶은 나의 비밀이며 그 누구와도 상관없다.” 이렇듯 자기 삶을 작품 뒤에 감추고자 하는 작가에게서 대담을 통해 무엇을 끌어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대담 분위기를 바꾸어 보기 위해 쿤데라가 가장 예민한 문제라고 여길 번역 문제에 대한 질문을 꺼내기로 했다.



박성창 

당신은 번역 문제에 몹시 민감합니다. 특히 당신은 체코어로 쓰인 당신 소설들이 서구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생긴 엄청난 오역문제에 부딪혔지요. 혹시 당신이 프랑스어로 작품을 쓰게 된 것도 이와 관련 있지 않은가요?

쿤데라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체코어는 정말 소수 언어였지요. 그리고 체코어는 예를 들어 대학교에서는 슬라브어과에 속했는데 그것도 러시아어가 제1언어였고 체코어는 제3 또는 제4의 언어 정도로 인식되었습니다. 훌륭한 체코어 번역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체코어가 러시아어와는 분명히 다른데도 제1언어인 러시아어에 맞추어 번역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프랑스어를 잘 알기 때문에 프랑스어 번역본은 마치 제가 체코어로 소설을 쓸 때처럼 한 자 한 자 꼼꼼하게 교정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체코어로 쓰인 원본보다 프랑스어 번역본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불멸』의 경우에는 프랑스어 번역본이 제 원본과 가치가 동일하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겨난 것입니다. 저는 아무튼 체코어 번역본을 교정하고 고치고 다듬느라고 정말로 너무나도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작가는 작품을 써야 하는데 이렇게 번역본을 수정하느라고 시간을 보낸 것이지요. 아무튼 저는 1975년부터 프랑스에 거주하게 되었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불멸』 이후로는 프랑스어로 작품을 쓰게 되었지요.


박성창 그렇다면 당신의 문학적 주제를 표현하는 데 있어 프랑스어가 만족스럽습니까?

쿤데라 

그렇습니다. 원래 체코어로 작품을 쓸 때부터 장식이 없는 분명한 글을 쓰는 편이었지요. 저는 수사적 장식으로 현란한, 자기과시적 문체를 싫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교적 분명하고 지적인 언어인 프랑스어는 제 문체와도 어울린다고 할 수 있는 거지요.


박성창 

하지만 체코어로 쓰인 초기작인 『농담』의 문체는 프랑스어로 쓰인 최근 작품인 『정체성』의 문체와는 다르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게다가 당신은 원래 시인이셨지 않습니까?

쿤데라 

저는 거의 느끼지 못하는 차이입니다. 작가가 한 언어를 고집하지 않고 두 언어를 쓰는 것은 유럽 문화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합니다. 


박성창 

특히 자국 언어에 숙명적으로 연결된 우리 경우와 비교해 보면 그렇기는 합니다. 우리의 경우 자발적으로 두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거의 상상하기가 힘듭니다. 베케트의 경우는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쿤데라

유럽에서도 두 언어를 쓰는 작가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만 특히 베케트는 성공적입니다. 그는 영어와 프랑스어 모두로 훌륭한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가 동석한 부인 베라와 가끔씩 체코어로 신명나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쿤데라에게는 프랑스어와 체코어가 공존하는 셈이었다. 사회 생활과 창작에 사용되는 프랑스어와 부인과의 대화에만 사용되는 체코어. 프랑스어로 같이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두 사람만 체코어로 이야기하니까 마치 나를 따돌리는 것 같다고 농담을 하자 쿤데라는 정말 신명나게, 배꼽을 잡고 웃을 수 있게 떠들 수 있는 건 체코어라고 하면서 자기들이 쓰는 체코어는 삼십 년 전의 체코어, 너무나도 변해 버린 지금의 체코어와는 다른 언어임을 강조했다. 흥미로운 것은 가끔씩 체코 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하면 서로가 너무나 다른 체코어를 쓰고 있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모국어에 대한 쿤데라의 어쩔 수 없는 ‘향수’가 아닐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