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구성에 관한 대담 - 4

비평

예술의 구성에 관한 대담 - 4

살몽-쿤데라 (『소설의 기술』 수록)

 

살몽     음악적 교양이 당신의 글쓰기에 많은 영향을 끼쳤나요?
쿤데라

스물다섯 살까지만 하더라도 저는 문학보다 음악에 더 끌렸죠. 그 당시 제가 작곡했던 것 중에 가장 괜찮았던 것은 피아노, 비올라, 클라리넷, 북, 이렇게 네 가지 악기를 위한 작품이었습니다. 제 소설의 건축술을 단순화해서 미리 보여 주죠. 그때만 하더라도 제가 소설을 쓰리라는 것은 거의 생각지도 못했어요. 이 「네 악기를 위한 곡」은 일곱 부분으로 나누어진 것이었습니다.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형식에 있어 서로 완전히 다른 부분들(재즈, 왈츠 변주곡, 푸가, 합창 등)로 구성되었고, 또 각각은 다른 악기(피아노와 비올라, 피아노 독주, 비올라, 북 등)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같은 형식적 다양성은 아주 큰 주제적 통일성에 의해 균형을 이루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A와 B 두 주제만이 만들어졌으니까요. 마지막 세 부분은 당시 제가 아주 독창적이라고 생각했던 다성적 기법에 바탕을 둔 것이었습니다.즉 서로 다르고 정서적으로 서로 어긋나는 두 주제를 동시에 전개해 나가는 것이었지요. 마지막 부분을 예로 들면 녹음기에는 3악장(클라리넷, 비올라, 피아노를 위한 장중한 합창으로 구상된 A주제)이 반복되고 동시에 북과 트럼펫(클라리넷 연주자는 클라리넷을 트럼펫으로 바꿔야 합니다.)이 B주제를 (‘바르바로’ 스타일로) 변용해서 끼어드는 겁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신기할 정도로 닮은 점이 있습니다. 즉 6부에 가서 새로운 주제 C가 딱 한 번 나타나는데 『농담』에서 코스트카가, 그리고 『삶은 다른 곳에』에서 사십 대 남자가 출현하는 것과 같죠.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소설 형식, 소설의 ‘수학적 구조’라는 것이 미리 계산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그것은 무의식적인 명령이고 하나의 집착이라는 것을 보여 드리기 위해서예요. 옛날에는 이렇게 저를 사로잡는 형식이 저 자신에 대한 수학적 규정의 일종이라고까지 생각할 정도였죠. 그러다가 몇 년 전 베토벤의 사중주 곡 「op. 131」을 유심히 연구하다가 형식에 대한 이런 자기중심적이고 주관적인 생각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보세요.


1악장 느림 푸가 형식 07분 21초
2악장 빠름 분류할 수 없는 형식 03분 26초
3악장 느림 한 주제의 단순한 제시 00분 51초
4악장 느리고 빠름 변주곡 형식 13분 48초
5악장 매우 빠름 케르조 75분 35초
6악장 매우 느림 한 주제의 단순한 제시 71분 58초
7악장 빠름 소나타 형식 76분 30초

 

아마도 베토벤은 바흐 이후 음악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가일 겁니다. 그가 물려받은 소나타는 네 악장이 한 사이클을 이루도록 구상된 것으로서 그 조합은 어떤 때는 아주 자의적인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중 (소나타 형식으로 쓰인) 첫째 악장은 항상 (론도나 미뉴에트 형식으로 쓰인) 다른 악장들보다 큰 중요성을 지니기 마련이었죠. 베토벤의 예술적 진보는 이러한 조합을 진정한 통일성으로 바꾸고자 한 의지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납니다. 이리하여 그는 피아노 소나타에서 비중의 중심을 첫 악장에서 마지막 악장으로 서서히 이동시켰고 종종 소나타를 단 두 악장만으로 줄이기도 했고(이 두 악장은 「op. 27, No. 2」와 「op. 53」에서처럼 간주곡에 의해 분리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op. 111」에서처럼 나란히 배열되기도 하지요.) 같은 주제를 다른 악장에서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 통일성에 최대한 다양한 형식을 부여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소나타에 푸가를 삽입하기도 했는데 대단한 용기를 의미하는 겁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푸가는 아주 이질적으로 여겨졌으니까요. 어느 정도로 이질적이냐 하면 브로흐의 소설에서 가치 타락에 대한 에세이가 주는 느낌만큼이나 이질적이죠. 사중주곡 「op. 131」은 건축적 완성도의 극치에 도달했죠. 지금까지 우리가 말한 것 가운데 한 가지 세부적 사실, 즉 길이의 다양함에만 집중해서 이야기해 보도록 할까요. 이것의 3악장은 다음 악장에 비해 길이가 15분의 1밖에 되지 않아요. 바로 이렇게 기이할 정도로 짧은 두 악장(3악장과 6악장)이 서로 길이가 다른 일곱 악장들을 하나로 묶어 주고 지탱해 주는 겁니다! 만일 모든 악장들의 길이가 거의 다 같다면 전체적인 통일성은 깨져 버릴 거예요. 그 이유까지 설명드릴 수는 없지만, 아무튼 그렇게 되어 있는 거예요. 길이가 같은 악장 일곱 개라는 것은 마치 커다란 장롱 일곱 개가 나란히 놓인 거나 다를 바 없지요. 이와 흡사한 또 하나의 예가 있어요. 제가 생전 처음으로 샀던 음반은 피아노 네 대를 위한 비발디 풍 바흐의 콘체르토였지요. 당시 저는 열 살이 갓 넘은 나이밖에 되지 않았는데, 2악장 ‘라르고’에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도대체 뭐가 그토록 대단했던 걸까요? 그 형식은 A–B–A지요. A 주제는 피아노와 오케스트라 사이의 간단한 대화로서 연주 시간은 70초고, B 주제는 오케스트라 반주 없이 피아노 네 대로만연주하는 것으로서 아무 멜로디도 없는 단순한 화음이 잔잔한 수면을 연상시키면서 105초 동안 연속적으로 연주되죠. 그런 다음 A 주제가 반복되는데 단 하나 혹은 두 주제만 10초 동안 연주되죠. 이 ‘라르고’가 A–B의 두 부분만으로 되어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이 10초 동안의 반복이 없으면 지탱이 안 될 거예요. 또는 A 주제가 몽땅 반복되었다고 상상해 보세요. 70초–105초–70초. 지루하기만 한 균형이죠. 그러니까 전체(A–B–A) 균형은 길이의 파격적인 불균형에 의해 보완되어야 하는 겁니다. 이 ‘라르고’에서 어린 저를 매혹했던 것은 바로 이 같은 비례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수학적 아름다움이기도 하고요. 70–105–10이 의미하는 것은 10×7 : 15×7 : (10×7)÷7이고 이것은 다시 2 : 3 : (2÷7)을 의미하는 거죠. 이 정도만해 두죠.


살몽      『이별의 왈츠』에 대해서는 거의 말씀이 없으신데…….
쿤데라

어떤 의미에서 그 작품은 제게 가장 소중한 소설이죠. 『우스운 사랑들』과 마찬가지로 저는 그 작품을 다른 소설들보다 더 즐겁고 흥겹게 썼어요. 다른 기분으로 쓴 거죠. 또 훨씬 빨리 쓰기도 했고요.

 

살몽    이 소설은 다섯 부밖에 안 되는군요.
쿤데라

『이별의 왈츠』는 제 다른 소설들의 원형적 형식과는 전혀 다릅니다. 아주 동질적이지요. 일탈도 없고요. 한 가지 소재를 대상으로 같은 템포로 이야기해 나가는 거예요. 매우 극적이고 간단해졌고 통속 희극에 바탕을 두었죠. 『우스운 사랑들』에는 「콜로키움」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체코어로는 심포지엄이라고 하는데, 플라톤의 『심포지온(Symposion)』(『향연』)의 암시적 패러디죠. 사랑에 대한 긴 토론인데, 이 「콜로키움」이 『이별의 왈츠』와 똑같은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5막 통속 희극(vaudeville)인 거죠.

 

살몽    당신이 말하는 ‘통속 희극’의 의미는 뭔가요?
쿤데라

플롯과 그 모든 장치들, 즉 기대하지 않은 과장된 일치라는 장치를 엄청나게 부각하는 형식이죠. 소설에서 희극적으로 과장된 플롯보다 더 의심받고 우스꽝스럽고 낡아 빠지고 나쁜 취미가 되어 버린 것은 없어요. 플로베르 이후로 소설가들은 플롯의 인위성을 없애려 애쓰게 되었고 이렇게 해서 소설은 종종 삶의 지루함보다 더 지루해져 버리고 말았죠. 그러나 최초의 소설가들은 그럴듯하지 않은 것에 대한 이런 경계심이 없었죠. 『돈키호테』 1권에는 스페인 한 가운데 어딘가에 술집이 있어서 사람들이 모두 우연히 여기서 만나지요. 돈키호테, 산초 판사, 그들의 친구인 이발사와 신부, 돈페르난도라는 사람에게 약혼자 루신다를 빼앗긴 청년 카르네니오, 조금 뒤에는 돈페르난도에게서 버림받은 약혼녀 도로타, 그리고 나중에는 돈페르난도와 루신다, 모르족의 감옥에서 탈출한 사관, 몇 년 전부터 이 사관을 찾아다니던 동생, 그의 딸 클라라, 그리고 그녀를 쫓아다니면서 한편으로는 자기 아버지가 보낸 시종들에게 쫓기는 클라라의 애인……. 그야말로 우연의 연속이고 모두가 전혀 그럴듯하지 않은 만남이지요. 그러나 세르반테스에게서는 이것을 유치함이나 서투름으로 생각해서는 안 돼요. 그 당시 소설은 아직 독자들과 그럴듯함의 약속을 맺지 않았으니까요. 당시 소설은 현실을 모방하려 한 것이 아니라 즐겁게 해 주고 놀라게 해 주고 솔깃하게 해 주려는 것이었지요. 유희적인 것이었고 소설의 묘미 또한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19세기가 시작되면서 소설 역사에 엄청난 변화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거의 충격적이라고까지 할 만한 변화였죠. 현실을 모방해야 한다는 요구가 절대적이 되어 버리면서 세르반테스의 술집은 졸지에 우스꽝스러워지고 말았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간혹 이러한 19세기적 유산에 반항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세르반테스의 술집으로 간단히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것과 우리 사이에는 19세기 리얼리즘의 체험이 가로놓여있어서 그럴듯하지 않은 것들 사이의 일치라는 유희가 더 이상 순진할 수 없어져 버린 것이죠. 그 유희는 의도적으로 우스꽝스러워지든가 역설적, 패러디적인 것이 되든가 혹은 환상적, 몽환적으로 되어 버리는 겁니다. 카프카의 첫 소설 『아메리카(Amerika)』의 경우가 바로 그렇죠. 첫째 장에서 카를 로스만과 그의 아저씨가 만나는 전혀 그럴듯하지 않은 장면을 보세요. 마치 세르반테스의 술집에 대한 향수 어린 추억과도 같죠. 그러나 이 소설에서 그럴듯하지 않은 (심지어는 불가능한) 상황들은 아주 정교하게, 현실에 대한 환상을 통해 환기되어서 우리는 전혀 그럴듯하지 않기는 하지만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걸 잘 알아야 합니다. 즉 카프카는 세르반테스의 술집을 통해, 통속 희극의 문을 통해 그의 첫 번째 ‘초–현실’의 세계(그의 첫 번째 ‘꿈과 현실의 결합’)로 들어간 것이죠.

 

살몽    통속 희극이라는 말은 재미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군요.
쿤데라

그 시초에 있어 유럽의 위대한 소설들은 재밋거리였고 진정한 소설가들은 모두 그에 대한 향수를 지니고 있습니다! 재미라는 것이 진지함을 없애는 것도 아니고요. 우리는 『이별의 왈츠』를 통해 인간은 이 땅 위에서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들인가, 이 지구를 ‘인간의 발톱으로부터 해방’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지극히 무거운 문제를 지극히 가벼운 형식과 결합하는 것이 바로 제가 줄곧 매달렸던 문제죠. 순전히 예술적 야망만의 문제는 아니에요. 가벼운 형식과 무거운 주제의 결합이라는 것은 (우리의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들과 함께 역사라는 커다란 무대에서 우리가 연출해 내는) 우리의 드라마를 그 끔찍한 무의미를 통해 드러내 보여 주는 것이죠.

 

살몽

그러니까 당신의 소설에는 두 가지 원형적 형식이 있는 것이군요.
첫째, 7이라는 숫자에 바탕을 둔 건축술을 통해 이질적인 요소들을 결합하는 다성적 구성. 둘째, 희극적, 동질적, 극적이면서 그럴듯하지 않음과 맞닿아 있는 구성.

쿤데라

저는 항상 뜻밖의 위대한 배반을 꿈꿉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 두 형식과의 이중혼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