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의 천사

비평

의심의 천사


정혜윤(CBS 라디오 PD)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을 교과서에서 처음 배울 때 나는 이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말인지 전혀 몰랐다. 인간은 누구나 생각하지. 암, 그렇고 말고. 데카르트란 사람 좀 싱겁군! 이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이 생각이 나의 정신적 암흑기를 오래오래 지배했고 그때 나는 여러 모로 매사에 굳건한 인간이었다.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든지 굳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시절의 나는 어떤 면에서는 맥베스와도 닮았다. ‘내 둔한 머리는 잊힌 것들에 사로잡혀 있다.’라고 맥베스가 토로했다면 나는 ‘내 둔한 머리는 주입된 것들에 사로잡혀있다.’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결과는 맥베스와 다르지 않았다. ‘명예, 사랑, 순종, 한 무더기의 친구들 같은 것을 가지리라 나는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나에겐 명예도 사랑도 한 무더기의 친구들도 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했다. 나는 필연적으로 어느 날인가는 내가 생각하고 믿고 있던 것들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운명이었다. 믿음도 합리성도 없고, 데카르트의 후예가 아니란 것도 알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죽어 가는 레플리칸트가 데카르트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당겨 주었다. 그는 빗속에서 이렇게 절규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최초로 생각과 존재에 대해 진지해졌다. 나는 생각하는가? 나는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가?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생각하지 않고 판단하고 나는 생각하지 않고 말하고 나는 생각하지 않고 선택한다. 그렇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인가? 혹시 존재하는 척하는가? 존재한다고 믿는가? 나는 좀비적 인간인가? 나는 인간의 이성이란 것이 뭔지 잘 몰랐다. 학습이나 교과 성적과 어디선가 들어서 입력된 정보들의 무더기 비슷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 뒤로 오랫동안 나의 책읽기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 바쳐진 것이었다. 나는 생각한다 앞에 여러 가지 단서 조항들이 필요했다. ‘나는 읽는다. 나는 생각한다.’ 혹은 ‘나는 쓴다.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읽고 쓰고 듣는다. 나는 생각한다.’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생각하고 선택하고 판단하기는 늘 어려웠다. 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란 걸 알수록,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적다는 것을 알수록,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처럼 보여도 또 그렇게만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알수록, 세상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모를수록, 합리적으로 행동하려고 발버둥 칠수록, 옳고 그름이 더 모호할수록, 타인이 심연일수록, 내게는 ‘더 더 더’가 필요했다. 물론 이때의 더 더 더는 더 많은 음식, 더 많은 돈, 더 많은 옷, 더 많은 인정은 아니었다. 더 많은 생각이라고 일단 해 두자. 인간에 대한, 인간 삶에 대한, 인간의 신비에 대한, 인간의 이해에 이르는 더 많은 생각들을 들어 보고 알고 싶었다. 쿤데라는 내게 완전히 새로운 데카르트였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그런 의미의 데카르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쿤데라의 소설 모두가 내게는 ‘나는 따져 보고의심한다. 나는 생각한다.’ ‘나는 조롱한다. 나는 생각한다.’라고 읽혔다. 그는 확신과 안심과 타협의 왕국에서 이단자였다. 의심의 천사인 그는 환멸감을 결코 숨기지 않았다. 그는 뭔가를 위해서 끈질기게 따져 묻는다. 그는 대체 왜 그러는가? 마침 그가 『소설의 기술』 서문에서 데카르트에 대해 쓴 것을 나는 발견했다.


일찍이 데카르트가 말한 바처럼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로 성장했던 인간은, 이제 자연을 초월하고 능가하며 소유하는 (기술과 정치, 역사의) 힘들에 쓰이는 단순한 사물이 되어 버렸다. 이 힘들에 비해 인간의 구체적 존재, 그 삶의 세계는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않으며 아무런 관심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가려지고 잊힌 것이다.(11, 12쪽)


     그는 물론 잘못된 데카르트주의자들도 의심했다. 즉 그가 무엇보다 견디지 못한 것은 자기만족, 자기기만, 자기 합리화 같은 허위의식들과 타인을 이해하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자신을 안심시키고 치장하는 데, 서로 같은 영토에 속하는 것을 확인하는 데 주로 쓰이는 값싼 감정들이었다. 그는 인간에 대해서 환상을 품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환상을 품지 않았던 이유는 인간은 끝장난 존재가 아니라 끝없이 발견되고 발견되는 존재라고 생각해서였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는 환멸에서만 끝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이 사물이 되는 것을 결단코 원치 않았고 소설은 ‘커튼’을 열어젖히듯 인간을 드러내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어떤 것이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지 그 가치를 드러내 보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렇게 하기 위해서 아주 우아하고 유머러스하고 굳세게, 멈추지 않고 의심하고 조롱했다. 그는 ‘나는 추구한다. 나는 존재한다.’였다. 그는 희망이나 낙관, 긍정 같은 말은 쓰지 않았다. 대신 그는 ‘참을 수 없는’, ‘향수’, ‘망각’, ‘에로스’, ‘우연’, ‘변주’, ‘은유’, ‘저 너머’ 같은 단어들을 썼다. 쿤데라는 나에게 사전 편찬자이기도 하다. 나는 그에게서 말의 가치들을 발견했다. 그 말들을 그는 우리의 애매모호한 삶 안에서 끄집어냈다. 쿤데라를 읽는다는 것은 나의 비합리적인 면, 감상적인 면, 나의 취약한 면, 나의 안일한 면에 확대경을 들이대는 것과도 같다. 그는 시시한 것은 시시하다고 알려 주고 하찮은 것은 하찮은 것이라고 알려 준다. 그는 인간과 사물 사이의 경계가 너무나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간이 얼마든지 사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의 이단적인 사고에 호감을 느낀다. 그는 유용성으로 빚어낸 이 세상을 보니 차라리 무용한 인간이 되는 것이 도덕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결코 냉소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인간 삶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싶어 했다. 나는 가끔 소설을 읽다가 그의 슬픔을 느낀다. 이를테면 『불멸』을 읽다가 나는 그가 불멸해야 함에도 처참할 정도로 사라져 버린 것에 대해 말하고 싶어 했다는 것을 눈치챈다. 쿤데라가 애잔한 음색으로 그렸던 『농담』의 마지막 문장이 있다.


“산들이 종이로 되어 있다면 — 물이 잉크로 변한다면 — 별들이 서기가 된다면 — 드넓은 이 세상 전체가 그 이야기를 쓰고 싶어 한다면 — 결국은 이르지 못하리 — 내 사랑의 유언으로.” (……) 거기에서는 슬픔이 가볍지 않고, 웃음이 비웃음이 아니고, 사랑이 우습지 않으며, 증오심이 맥없지 않고, (……) 그러니까 사랑이 사랑으로, 고통이 고통으로 머물고, 아직 가치들은 유린되지 않았다.(1, 528~529쪽)


     우리는 가치들이 맘껏 유린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쿤데라는 우정이 우정이 아니고 사랑이 사랑이 아니고 고백이 고백이 아닌 것에서 집요하게 눈을 떼지 않았고 그것을 소설로 그렸다. 왜냐하면 사랑이 사랑이고 고통이 고통인 것을 우리 안에서 끄집어내고 싶어 했으니까. 그것을 인간 가능성으로 생각했으니까. 이런 가능성을 추구하는 것을 인간 역사로 생각했으니까.


     나는 지금 그가 쓴 책의 첫 장을 펼치면 어느 책에나 있는 저자 소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났다. 1975년 프랑스에 정착하였다.’를 즐거운 마음으로 떠올릴 수 있다. 한 사람의 일생에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언젠가 내 친구와 나는 쿤데라의 저자 소개를 읽으면서 시원하게 폭소를 터트렸다. 학벌도 수상 내역도 역대 저서들의 제목도 없이 자신이 정착한 곳만 알리는 자기소개는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 무엇이고 중요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만 같았다. 쿤데라는 모두에게 이미 있는 인간 가능성을 발견하고 싶어 했고 나는 쿤데라를 발견했다. 발견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의심하는 인간인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삶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형식은 슬픔, 내용은 기쁨. 그런데 나는 가끔 생각한다. 인간은 바로 이런 식으로만, 사물이 아니라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온당한 방식을 찾는 것. 이것이 쿤데라 읽기고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