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데라 소설의 핵심어들: 『우스운 사랑들』에서 『향수』까지 (2)

비평

 

2 모순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2-1 가벼움과 무거움: 토마시와 테레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1968년 ‘프라하의 봄’과 소련의 체코 침공을 배경으로 네 지식인(토마시, 테레자, 사비나, 프란츠)의 삶과 사랑, 성을 다룬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프라하의 유능한 외과의사 토마시는 여자에게서 이상향을 추구하는 “낭만적 집착”이 아니라 여성의 다양성에 천착하는 “바람둥이형 집착”(6, 324~325쪽)을 가진 남자다. 그는, 작가가 애용한 다른 표현으론, “서정적 바람둥이”가 아니라 “서사적 바람둥이”(11, 188~189쪽)로서 이혼과 함께 아들 시몽까지 자신의 삶에서 가뿐히 지워 낸 다음 “관능의 욕구(……)가 아니라 세계를 정복(……)하려는 욕망”(6, 323쪽), 더 정확히는 견본 수집의 욕망에 따라 꾸준히 여자 사냥에 몰입한다. 이런 식으로 가벼움을 지향하는 토마시 앞에 한 여자-아이가 나타난다.

     테레자가 사는 도시에 편도선 환자가 발생했고, 병원의 과장이 좌골신경통으로 꼼짝할 수 없는 상태여서 토마시가 왕진을 갔고, 돌아올 때 열차 시각이 애매해 들렀던 술집에서 테레자를 만났고, 얼마 뒤 그녀가 사실상 무작정 프라하에 왔고, 그날 그와 동침한 그녀가 감기에 걸려 그의 침대를 차지해 버렸다. 방수포에 싸인 채 (어린 오이디푸스처럼!) 강을 떠내려 온 아이. 테레자를 거두는 순간, 분석적이고 강건한 서사성이 감정적이고 섬약한 서정성에 자리를 내주고, 섹스는 하되 동침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과 ‘에로틱한 우정의 불문율’이 와해된다. 여느 때와 달리 어서 빨리 정사를 끝내려는 토마시를 보며 그의 애인(사비나)은 “바람둥이 토마시의 그림자 뒤에 낭만적 사랑에 빠진 연인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하고 반대로 “오직 테레자만을 생각하는 트리스탄의 모습에서 바람둥이의 아름다운 세계가 언뜻 엿보이기도”(6, 40~41쪽) 한다고 말한다. 깃털처럼 가볍던 돈 후안이 ‘동정-연민’으로 고통 받는 트리스탄으로, 가벼움이 무거운 굴레로 바뀌는 순간이다.

      토마시의 개인사는 그의 조국의 삶(역사-정치)과 평행선을 이룬다. 체코 공산주의자들에게 자신들의 죄를 통감하고 요컨대 오이디푸스 왕처럼 제 눈을 찌를 것을 촉구한 그의 기사가 문제가 된 것이다. 공범자들의 은근한 조롱이 담긴 웃음에 철퇴를 날리듯, 그는 외과 과장으로의 승진이 거의 확실시되는 상황임에도 전락의 길을 선택한다. 그러자 반대파(하필이면 그의 아들이다.) 쪽에서 그의 선택을 옹호, 또 다른 정치적 행동을 촉구하는데 이번에도 그의 입장은 단호하다. “그녀는 늙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그녀만이 중요했다. 여섯 우연의 소산인 그녀, 외과 과장의 좌골신경통에서 태어난 꽃 한 송이, 모든 ‘es musssein!’의 피안(彼岸)에 있던 그녀, 유일하게 그가 진정으로 애착을 갖는 그녀.”(6, 352~353쪽) 굳이 사랑 때문만은 아니지만, 아무튼 한 번 시작된 추락은 도시 외곽 병원의 허름한 의사로, 유리창을 닦는 노동자로, 급기야 시골의 트럭 운전사로 가속도의 법칙을 따라 충실히 진행된다.

     한편 테레자는 유년 시절부터 각종 이분법, 특히 ‘영혼과 육체’의 모순에 사로잡혀 있다. 어머니는 너의 몸뚱어리도 남들과 전혀 다를 바없고 때문에 벗은 몸을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테레자는 자기만의 고유성을 지키고자 하고, 영혼을 조롱하는 육체(가령 생리혈이나 배 속의 꾸르륵 소리)에 대한 혐오감, 적어도 거부감을 버리지 못한다. 이렇게 가벼움 대신 무거움을 지향하는 그녀에게는 토마시 역시 우연이 아닌 필연의 존재다. 즉 다름 아닌 그가 내가 일하는 곳에 왔고 다름 아닌 내가 담당하는 테이블에 앉았고 다른 것도 아닌 책을 갖고 있었고…….(상승 욕구를 가진 그녀는 책을 숭배한다.) 따라서 그녀가 그에게 반한 것은 당연하다. 프라하에 나타난 그녀가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책이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라는 사실도 시사적이다. 안나와 브론스키가 모스크바의 기차역에서 처음 만난 날 한 남자가 기차에 치여 죽는다. 그리고 기나긴 시간이 흐른 다음 안나가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아귀가 너무 잘 맞는 이 ‘소설적인’ 구성이 삶의 실제 모습이라고 테레자는 생각한다. 육체(섹스)와 영혼(사랑)을 별개로 여기며 결혼 후에도 끊임없이 다양한 정부를 두는, 심지어 다른 여자의 성기 냄새를 머리카락에 묻히고 오는 토마시를 참기 힘든 것은 당연하다. 토마시 아닌 다른 남자(기술자)와의 정사도 당연히,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사랑도, 삶도 단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감동적인 것은 이런 차이와 모순에도 불구하고 토마시와 테레자가 십오여 년의 세월을 함께한다는 점이다. 보헤미아의 한적한 시골에서 처음 만난 그들은 함께 프라하의 봄을 맞았으며 소련의 체코 침공 때 함께 스위스로 떠났고 다시 체코로 돌아온 뒤에는 역시나 함께 ‘매장의 시기’를 보냈으며 죽음의 순간도 공유한다. 한 개인의 삶도, 또 개개인의 관계도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의 길항, 모순들의 공존임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2-2 가벼움 대 무거움: 사비나와 프란츠

 

     무거움과 가벼움을 오가는 두 연인의 삶에 가뿐히 개입된 사비나는그녀 나름의 멋진 이야기를 갖는다. 아름다운 알몸과 중산모자의 조합이상징하듯 그녀는 가벼움의 육화처럼 보이는데, 그 근원에 자리 잡은 것은 (테레자의 육체와 영혼의 이분법처럼) ‘배신(배반)’에 대한 집착이다. 열네 살 때 동갑내기 사내아이와 사랑에 빠진 딸을 보고 기절초풍한 아버지가 일년 동안 그녀 혼자 외출하는 것을 금지하더니 어느 날은 피카소의 그림을 보여 준다. “같은 또래 남자 아이를 사랑할 권리는 없었지만 적어도 입체파를 사랑할 수는 있었다.”(6, 156쪽) 고등학교를 졸업, 가족을 떠나 프라하로 가면서(화가가 된다.) 그녀는 배신의 진정한 매력을 알게 된다. “배신한다는 것은 줄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다. 배신이란 줄 바깥으로 나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이다. 사비나에게 미지로 떠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었다.”(6, 156쪽) 배신의 궁극의 지점은 “자기 자신의 배신을 배신하기”(6, 157쪽)이고 “언젠가는 배신과 결별해야만 했다!”(6, 165쪽) 그녀에게는 프란츠 역시 배신의 한 대상일 뿐이다.


한 인생의 드라마는 항상 무거움의 은유로 표현될 수 있다. (……) 그런데 사비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무 일도 없었다. 그녀는 한 남자로부터 떠나고 싶었기 때문에 떠났다. 그 후 그 남자가 그녀를 따라왔던가? 그가 복수를 꾀했던가? 아니다. 그녀의 드라마는 무거움의 드라마가 아니라 가벼움의 드라마였다. 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6, 201쪽)


     이 소설에서 두 번 나오는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라는 어구는 모두 사비나와 관련돼 있고(6, 415쪽) 그것은 보다 난해하고 자극적인 개념인 ‘키치’로 이어진다. 그에 앞서 스탈린의 장남(야코프 쥬가슈빌리)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그는 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 포로로 잡혀 영국군 장교와 같은 감옥에 수감됐는데 공동 변소를 사용하다가 불거진 문제로 이중의 모욕을 겪고 수용소를 둘러싼 고압 철조망으로 달려가 자살한다. 요컨대 “스탈린의 아들은 똥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다.”(6, 392쪽) 작가는 이 죽음이 “전쟁의 광범위한 바보짓 중 유일한 형이상학적 죽음”(6,392쪽)이었다고 말한다. “똥은 악의 문제보다 더욱 골치 아픈 신학 문제”로서 전쟁을 비롯한 각종 범죄는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 탓도 있지만 “똥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을 창조한 신, 오직 신”(6, 395쪽)에게 있다. “말하자면 키치란 본질적으로 똥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다. 문자적 의미나 상징적 의미에서 그렇다.”(6, 399쪽) “나의 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키치예요!”(6, 412쪽)라고 외치는 만큼 사비나의 저항은 정치적, 심지어 윤리적 성격 이전에 미학적인 성격을 띤다. 온갖 아름다운 기호로 덧칠된 공산주의, 혹은 공산주의 위에 덕지덕지 붙은 기호에 대한 적의(敵意) 말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날카롭게 지적한 사비나의 내적 모순이다. “그녀는 일생 동안 자신의 적은 키치라고 단언했더랬다. 그러나 그녀조차도 자신의 존재 깊숙한 곳에 키치를 품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6, 413쪽) 마찬가지로 사비나야말로 무거움을 진정 두려워했고 그 때문에 가벼움의
강박에 시달렸던 것은 아닐까. 혹은 무거움의 깊이와 행복을 몰랐고(그럴 ‘우연’이 주어지지 않았고) 그 때문에 끊임없이 가벼움을 소유하기 위한 배신을 반복한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키치에 대한 혐오가 그녀를 키치의 화신으로 만드는 묘한 역설을 작가는 이렇게 변호한다.


키치는 거짓말로 인식되는 순간, 비-키치의 맥락에 자리 잡는다. 권위를 상실한 키치는 모든 인간의 약점처럼 감동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우리 중 그 누구도 초인이 아니며 키치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6, 415쪽)

    

     사비나와 프란츠 사이에는 ‘이해받지 못한 말들’이 오갈 수밖에 없다. 스위스 출신의 이 미남 교수는 사비나의 가벼움은 물론 그녀 속에 투영된 체코의 역사에 또한 매혹된다.(“그녀의 모습에서 그녀 나라의 고통스러운 드라마가 투명하게 드러났기에 그녀는 한결 아름다웠다.”(6, 173쪽)) 반면 그는 무거움 속에 푹 빠져 사는 존재, 진지함과 지루함의 동의어로서의 무거움의 육화다. 고심 끝에 부인(마리클로드)에게 불륜 사실을 고백한 프란츠가 부인을 떼 내기는커녕 애인을 놓쳐 버리는 난감한 상황에 처함으로써 ‘무거움의 농담’이 본격화된다. 사비나의 이미지를 모방하는 차원에서 (그러니까 키치!) ‘대장정’(캄보디아 여행)을 감행한 그는 괴한의 습격을 받는다. 의식이 명멸하는 찰나 진정한 사랑의 대상은 사비나가 아니라 그와 동거하던 못생긴 안경잡이 여학생임을 깨닫고, 바로 그 순간 죽는 것이 농담의 클라이맥스다. 그리고 그의 장례식에서 엉엉 우는 여학생과 유산 정리를 비롯하여 장례식을 성공적으로 치름으로써 예의 교수 부인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내는 부인의 대조가 농담을 완성한다. 프란츠 이야기는 키치의 가장 범속한 버전처럼 읽히기도 한다.

 


2-3 영원 회귀와 「카레닌의 미소」


     프란츠를 배신할 무렵 사비나는 토마시의 아들에게서 편지 한 통을 받고 오랜 친구와 그의 아내가 교통사고로 사망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은 가끔 이웃 마을에 가서 호텔에 묵었다. (……) 그것은 그들이 행복했다는 것을 증명했다. 마치 그녀 그림의 한 점처럼 토마시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마치 전경에 서툰 화가가 그린 가짜 무대장치처럼 돈 후안의 모습이 있다. 무대장치 틈 사이로 트리스탄이 보였다. 그는 돈 후안이 아니라 트리스탄으로 죽은 것이다.”(6, 204~205쪽) 3부에서 이미 주인공들의 죽음을 알고 난 다음 소설의 남은 부분을, 특히 그들의 마지막 삶의 풍경을 읽는 기분이 쓸쓸하다. 쿤데라의 독특한 시간 사용법이 이 서사의 품격을 더해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7부에 작가는 ‘카레닌의 미소’라는 제목을 붙였다. 카레닌은 누구인가. 테레자와 결혼한 거의 직후 토마시는 친구의 개(세인트버나드)가 옆집 개(울프)와 교미하여 낳은 잡종 한 마리를 사형의 운명에서 구출, 집으로 데려온다. 그녀가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책이 생각나 처음엔 ‘톨스토이’라는 이름을 생각하지만 암컷인지라 ‘안나 카레니나’를 제안한다. 그러나 테레자는 “이렇게 얼굴이 조그맣고 우습게 생긴 여자가 어디 있어?”(6, 44쪽) 라며 ‘카레닌’이라는 이름을 택한다. 남자 이름을 가진 탓인지 카레닌은 암컷임에도 여자 주인을 더 잘 따른다. 토마시가 예의 그 강박적인 외도를 즐길 때도 항상 테레자 곁에 머물고, 프라하에서 취리히를 거쳐 다시 프라하, 급기야 시골에서도 함께다. 이 서글픈 전원시의 마지막, 작가의 시선은 암에 걸려 수술을 한 노년의 개에게 고정된다.


내 눈 앞에는 여전히 나무둥치에 앉아 카레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인류의 실패에 대해 생각하는 테레자가 있다. 이와 동시에 또 다른 이미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토리노의 한 호텔에서 나오는 니체. 그는 말과 그 말을 채찍으로 때리는 마부를 보았다.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마부가 보는 앞에서 말의 목을 껴안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그 일은 1889년에 있었고, 니체도 이미 인간들로부터 멀어졌다. (……)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인 반면 동물은 자동인형, 움직이는 기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데카르트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던 것이다. 그의 광기(즉 인류와의 결별)는 그가 말을 위해 울었던 그 순간 시작되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니체가 바로 그런 니체이며, 마찬가지로 내가 사랑하는 테레자는 죽을병에 걸린 개의 머리를 무릎에 얹고 쓰다듬는 테레자다.(6, 471쪽)

 

카레닌-테레자와 함께 등장한 니체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여는 이름이기도 했다.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6, 9쪽)

 

     이어, 영원 회귀 속에 담긴 사상은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6, 9쪽)이라는 아포리즘이 나온다. 언제 읽어도 아리송한 이 도입부에서 분명한 것은 영원성(반복/회귀)과 일회성의 모순이다.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뿐”이며 어느 독일 속담(einmalist keinmal)대로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6, 17쪽) 베토벤의 마지막 4중주와 관련된 희극적인 일화(“그래야 한다!(Es muss sein!: 6, 315~319쪽)”)에 압축된 필연성과 우연성의 모순, 진지함과 우스움, 상승과 하강, 영혼과 육체의 모순, 모든 모순 중에서 “가장 신비롭고 가장 미묘”(6, 13쪽)한 무거움과 가벼움의 모순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것은 모순 자체인 것 같다. 단순한 가치론적 이분법(옳고 그름, 좋고 나쁨 등)에 종속되는 않는 모순들의 긴장이 우리 개개인의 삶과 역사, 심지어 자연의 삶을 이끌고 가는 동력인 것이다.
     테레자는 여타 인물들과 달리 꿈을 자주 꾸는데, 마지막 꿈이 유달리 모순적이다. “카레닌은 작은 크루아상 두 개와 벌 한 마리를 낳았다. 그는 놀란 눈으로 자기의 괴상한 자식을 바라보았다. 크루아상은 얌전히 있는데, 놀란 벌은 뒤뚱거렸다. 곧이어 벌은 날갯짓을 하며 사라져 버렸다.”(6, 472쪽) 결국 아픈 카레닌을 집에 두고 테레자는 혼자 장을 보러 갔다가 빵가게 주인이 카레닌을 위해 따로 챙겨 둔 크루아상을 받아 온다. 마지막, 안락사한 카레닌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테레자는 다시 이 꿈을 생각하고 첫 문장을 비문(碑文)으로 삼는다. 이 요령부득의 문장이 선사하는 복잡한 정조가 보다 사실적인 장면을 통해 표현된다. 토마시가 감추던 편지의 발신자가 숨겨 놓은 애인이 아니라 그의 아들임을 알고 난 다음 테레자는 흥겨운 기분으로 농부들의 파티를 즐긴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며 연인 같은 부부가 나누는 마지막 대화는 이렇다.

 

“토마시, 당신 인생에서 내가 모든 악의 원인이야. 당신이 여기까지 온 것은 나 때문이야.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을 정도로 밑바닥까지 당신을 끌어내린 것이 바로 나야.” (……)

“테레자, 내가 이곳에서 얼마나 행복한지 당신은 모르겠어?”
“당신의 임무는 수술하는 거야!”
“임무라니, 테레자, 그건 다 헛소리야. 내게 임무란 없어. 누구에게도 임무란 없어. 임무도 없고 자유롭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얼마나 홀가분한데.”(6, 505~506쪽)

     끝으로 작가는 테레자의 ‘이상한’ 행복과 슬픔에 대해 얘기한다.

 

“이 슬픔은 우리가 종착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6, 506쪽) 삶에 바치는 ‘이별의 왈츠’로 끝나는 이 희(비)극이 일정 부분 『안나 카레니나』에 바치는 오마주인 것은 그것이 사랑과 성을 다루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개인사와 역사를 지배하는 인과론(필연!)과 우연론의 변증법을 소설화했기 때문이다. 한편, 소련의 체코 침공 때 쿤데라는 갑자기 도스토옙스키가 싫어졌다고, “모든 것이 감정이 되는, (……) 감정이 가치와 진리의 수준으로 승격된 세계”의 분위기 자체가 거슬렸다고(15, 9쪽) 고백한 바 있다. 쿤데라의 소설이 톨스토이보다는 도스토옙스키에 더 가깝기 때문에 더더욱 그의 한결같은 톨스토이 사랑과 ‘느닷없는’ 도스토옙스키 혐오가 대조를 이룬다. “1968년 러시아 군대가 내 작은 조국을 점령”(15, 9쪽)했음에도,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그 사건을 배경으로 함에도 『안나 카레니나』가 이 소설의 밑 텍스트 중 하나가 된 것이다. 정치와 역사를 아우르되 그것을 초월하는 문학, 그 미덕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모순이다.

 

 

쿤데라 소설의 핵심어들: 『우스운 사랑들』에서 『향수』까지 전편 보기

 

 

 

쿤데라 소설의 핵심어들: 『우스운 사랑들』에서 『향수』까지 (1)

비평

쿤데라 소설의 핵심어들:
『우스운 사랑들』에서 『향수』까지


김연경(소설가, 서울대 강사)

 

1 웃음, 농담, 희극
1-1 『우스운 사랑들』

 

 

 

    1959년에서 1968년 사이 삼십 대의 쿤데라가 쓴 중단편은 모든 첫 소설들이 그렇듯 상당히 선언적이다. 가령 『우스운 사랑들』(1963)의 처음에 실린 「누구도 웃지 않으리」의 내용은 이렇다. 대학에서 미술사 강의를 하는 ‘나’는 엉터리 논문을 발표한 자투레츠키에게서 자기를 옹호하는 글을 써 달라는 난감한 부탁을 받는다. 완곡한 거절이 통하지 않자 외국에 나간 것처럼 해 놓고서 실은 바뀐 시간표로 강의를 하는 식의 술수를 써가며 계속 자투레츠키를 피한다. 그러나 상대방은 포기하기는커녕 ‘나’가 모델 지망생 애인(클라라)과 함께 사는 은신처를 찾아오기에 이른다. 그것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이용, 성범죄 관련 스토리를 꾸몄다가 남편의 학적 재능을 철석같이 믿는 자투레츠키의 ‘투사형’ 부인까지 끌어들이는 형국이 되고, 설상가상으로 학과 측과도 문제가 생긴다. 우여곡절 끝에 모든 말썽이 해결된 순간에는 모델 자리를 찾아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클라라가 다른 남자(칼루세크 박사)에게 가 버린다. “잠시 후에야 나는 내 이야기가 (나를 둘러싼 얼음 같은 침묵에도 불구하고) 비극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희극이라는 것을 깨달았다.”(2, 62쪽) 심지어 그 사실에서 ‘위안’을 받는다.
    소설집 마지막에 실린 「에드바르트와 신」도 재미있다. 대학 졸업 후 시골에 사는 형의 소개로 보헤미아 한 소도시의 교사가 된 에르바르트는 신앙심이 깊은 한 아가씨(알리체)에게 반한다. “신에 대한 믿음으로 예쁜 목마를 만들어” “그 배 속에 숨었다가 아가씨 마음속으로 살그머니 들어갈”(2, 301쪽) 속셈으로 열심히 믿는 척하다가 그만, 알리체와 함께 성당 앞을 거닐거나 성호를 긋는 장면을 목격당한다. 위원회는 “오늘날, 달에다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시대”에 “선생님 같은 젊은이가 신을 믿게”(2, 316쪽) 된 경위를 설명하라고 요구한다. 결국 교장(체하츠코바)이 재교육을 맡는 선에서 일은 마무리되는 한편 이번 일로 영웅이 된 에드바르트는 알리체에게서 밀회 약속을 받아 낸다. 그러나 정신 재교육을 위해 교장과 만난 순간, 문제는 성당 사건이 아님이 밝혀진다. 에드바르트는 “육체의 태업”(2, 338쪽) 때문에 곤란을 겪다가 ‘하느님’의 힘으로 이 노처녀와 정사를 치르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주말에는 형의 시골집에서 알리체와 첫 관계를 갖는데 이내 환멸을 느끼고, 돌아가는 길에 역시나 ‘하느님’ 운운 ‘신학적 궤변’을 늘어놓아 그녀를 떼 놓는다.
     형이상학적인 것(철학과 종교)과 형이하학적(성(性)과 배설)을 뒤섞고 또 뒤집는 희(비)극이야말로 쿤데라 소설의 핵심적인 요소가 아닌가 싶다. 그가 직접 만든 소위 ‘쿤데라 소설 사전’에는 ‘웃음(유럽적인)’은 물론이거니와 ‘희극’ 항목이 따로 있다. “우리에게 인간의 위대함이라는 멋진 환상을 줌으로써 위안을 제공”하는 비극과 달리 희극은 “가혹”하게도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폭로”(11, 212쪽)한다. ‘진정한 희극의 천재’로서 쿤데라가 구축한 희극의 새 영역은 『농담』에서 보다 또렷한 형상을 갖는다.

 

 

1-2 『농담』


     쿤데라의 첫 장편 『농담』(1967)은 서른일곱의 남자(루드비크 얀)가 모종의 목적을 갖고 오랜만에 고향 땅(모라비아)을 밟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현재의 사흘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십오 년 쯤 전의 전사(前事)이다. 대학생 루드비크는 여자 친구(마르게리타)를 골려 주려고 쓴 엽서 한 장 때문에 사회주의의 적으로 몰려 당과 대학에서 제명당하고 오스트라바 근교의 탄광에 떨어진다.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루드비크.”(1, 59쪽) 이 문구의 함의도 문제겠지만 그것이 농담이라는 사실 때문에 1948년 혁명 이후의 ‘승리감과 역사적 낙관주의’, ‘금욕적이고 장엄한 기쁨’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된다. 덧붙여 당(전체)은 당원(개인)이 어떤 사람이며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권리가 있다. 세 명의 대학생 앞에서 진행되는 ‘심판’은 진지함(무거움)의 폭력 앞에서 우스움(가벼움)이 희생양으로 전락하는 (역시나 우스운!) 과정을 여실히 보여 준다. 죄가 죄인과 죄의식과 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유죄 선고 및 벌에서 죄가 생겨나는 식이다. 한 번 선고된 죄는 철회될 수도 없다. 쿤데라가 카프카의 『소송』을 분석하며 전개한 논리인바 “농담의 내장”, “코믹한 것의 무서움”(11, 150쪽)은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다. 죄인 루드비크는 거듭된 자아비판 끝에 대학생이라는 신분, 지적 오만과 냉소주의 등 모든 것이, 숫제 존재 자체가 죄임을 깨닫는다.

 

나는 인간의 운명을 심판하는 최고재판소에 비치된 나라는 사람의 이미지를 도저히 바로잡아 볼 도리가 없다는 것을 차츰 깨닫기 시작했다. 이 이미지(아무리 나와 비슷하지 않다 해도)는 나 자신보다 비교할 수 도 없이 더 실제적이며, 그것이 나의 그림자가 결코 아니라 나, 바로 나자신이 내 이미지의 그림자였다. 왜 나를 닮지 않았느냐고 그 이미지를 탓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며, 이미지와 다른 것은 내 잘못이었다. 그리고 이 다름은 바로 나의 십자가, 그 누구에게 떠넘길 수도 없고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것으로 선고받은 십자가였다.” (1, 89~90쪽)


     실상 농담 한 마디 때문에 유형살이를 하게 된 정황이야말로 한 편의 농담 같다. 병영 생활 중 우연히 만난 ‘느림’과 ‘안개의 소녀’(루치에)와의 낭만적인 사랑이 농담의 밀도와 깊이를 더한다. 그러나 진짜 농담은 그가 자신의 인생을 망쳐 놓은 제마네크를 상대로 펼치는 복수극이다.

     루드비크는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방송국 기자(헬레나)가 제마네크의 부인임을 알게 되고, 마침 취재차 모라비아에 가야 하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었다. 그러나 해묵은 원한을 설욕하기 위한 정사를 전후하여 그를 지배하는 정조는 역시 웃음(농담)이다. 더 우스운 것은 그들이 딸 때문에 마지못해 같이 사는 명목상의 부부가 된 지 오래라는 사실이다. 젊고 발랄한 애인까지 있는 제마네크에겐 헬레나가 오히려 성가신 존재이고, 또 복수의 표적이 되기엔 그가 너무 약해졌다. 이쯤 되면 복수는 ‘환상’이자 ‘자기만의 종교’이자 ‘신화’, 즉 또 다른 농담에 다름 아니다. “이제 예전의 얀이 아닌 다른 얀이 역시 예전의 제마네크가 아닌 다른 제마네크 앞에 서 있는 것이며, 내가 그에게 날려야 하는 따귀는 다시 되살릴 수도 다시 복구할 수도 없이 영원히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
다.”(1, 491쪽) 증오의 대상을 무너뜨리기 위해 감행한 귀향이 쓰러진 옛 친구(야로슬라프)를 부둥켜안는 것으로 끝난다. 헬레나와는 달리 ‘비물질적이고 추상적인’ 존재인 루치에와 재회했으나 그녀가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혹은 않는다)는 사실도 상징적이다. “내가 복수하고자 했던 나의 과거, 그러나 여기서 마주쳤는데도 마치 나를 알지도 못한다는 듯이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가 버린 나의 과거, 그 과거 전체가 나에게 보여 준 것과 동일한 그런 차가운 무관심.”(1, 475쪽)
     『농담』은 주인공뿐만 아니라 그를 에워싼 다른 인물들에게도 자기만의 목소리와 스토리가 있는, 쿤데라식 다성악 소설의 첫 시도다. 가령 우스꽝스러운 복수극의 희생양이 된 헬레나는 열아홉 살의 조수(인드라)에겐 흠모와 숭배의 대상이다. 사건의 전말을 알고서 절망한 그녀가 자살하기 위해 복용한 인드라의 진통제가 변비약으로 밝혀짐으로써 ‘호모 센티멘탈리스’(12, 24쪽)와 ‘낭만적 열정’을 둘러싼 한 편의 농담이 완성된다. 야로슬라프는 민중 애호가를 자처하는 프라하 출신의 제마네크와는 달리 뼛속까지 전통을 숭배하는 모라비아 출신의 음악가다. ‘왕들의 기마 행렬’ 행사와 관련해 아들과 부인이 공히 자신을 기만했음을 깨닫고 좌절하는 순간, ‘민속-가부장적 과거’를 재건하려는 욕망(12, 24쪽)이 눅눅한 농담으로 바뀐다. 루치에를 매개로 다시 루드비크와 엮인 코스트카 박사는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대학을 떠나야 했지만 여전히 “복음서에 접목된 공산주의 유토피아”(12, 24쪽)를 구현하고자 한다. 한편, 소설 속에서 적잖은 비중을 띰에도 루치에만은 자기만의 장(章)과 말을 갖지 못한 채 루
드비크와 코스트카의 독백을 통해 외부에서만 조명된다. 덕분에 그녀는, 애초 작가의 의도이기도 한바, 자신의 음습한 과거와 함께 “유리창 저편”(11, 127쪽)에, 그녀가 철조망 사이로 루드비크에게 건넨 장미꽃 한 송이의 이미지로 남는다.

     『농담』의 주인공들은 모두 농담의 희생양이지만,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그 자체로 희극적인 요소를 내포한 인간과 시간의 보편적인 속성(11, 212쪽)이다.


 

사람들 대부분은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 있다. 기억(사람, 사물, 행위, 민족 등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행위, 실수, 죄, 잘못 등 을) 고쳐 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이것은 둘 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믿음이다.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다. 모든 것은 잊히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 (복수에 의해서 그리고 용서에 의해서)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힐 것이다.(1, 493쪽)

 

     과거를 회상하며 루드비크는 자신을 심문하던 자들 또한 “자신들이 가장 탁월하다고 믿는 가면, 즉 금욕적이고 강직한 혁명가의 가면 아래 자신들의 완성되지 않은 얼굴을 감춘 어린아이들”이었음을, 그리고 그 자신도 “이 역할 저 역할을 왔다 갔다 하던 끝에, 결국 어디로 도망쳐야 하나 어쩔 줄 모르다가 붙잡힌 것”(1, 151~152쪽)이었음을 인정한다. 그렇다고 죄와 벌의 근원, 즉 윤리와 도덕에 관한 물음이 불필요하거나 무의미하다는 소리는 아니다. 죄는 있으나 죄인은 없는 상황, 이 총체적 혼돈 앞에서 특정한 정체(政體)도, 종교도 더 이상 답이 될 수 없다. 그의 소설은 혁명 이후의 세계를 포착하고 또 니체 이후 신의 귀환은 바랄 수 없는 까닭이다. 모순들을 어찌할 것인가.

 

 

밀란 쿤데라 전집을 펴내면서

비평

밀란 쿤데라 전집을 펴내면서

 

 

 

     모험과 도전, 도약과 상승, 책의 세계에서는 가끔 이런 일이 벌어진다. 한 작가가 아주 먼 곳에서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고 그가 공들여 써 낸 작품 속 세계가 불현듯 육체가 놓인 이곳의 현실, 한국어로 구축된 현실과 하나로 합쳐져 새로운 세계 자체를 만든다. 기적이다. 번역된 작품은 모두 이러한 가능성 속에 놓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반드시 그런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많은 작품들은 주변을 둘러싼 어둠을 이기지 못하거나 대개 성냥불처럼 순식간에 타올랐다 꺼져 버려 한국어 작품들의 흐름에서 희미한 잔물결 또는 일시적 유행으로 표시되고 만다. 오직 특
이한 몇몇 작품만이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한국어 작품의 역사 그 자체가 된다.
     체코 출신의 프랑스어 작가 밀란 쿤데라와 민음사의 만남을 우리는 수많은 모험이 중첩된 하나의 역사로서 기념하고 싶다. 그 모험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었다. 대학입학시험 출제위원으로 선발된 중년의 한 교수가 출제 장소에 수용되기 전에 우연히 한 소설을 접했고, 나중에 그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 가방에는 소설의 번역 원고 뭉치가 들어 있었고, 며칠 후에는 그 상태 그대로 한 편집자의 책상 위에 놓였다. 전혀 낯선 작가였고 완전히 특이한 작품이었다.
     망설임과 불안이 혀들 사이를 옮겨 다녔다. 어쩌면 이 작품은 편집부에서흔히 그런 일이 일어나듯, 일상적으로 잊힐지 모를 운명이었다. 한 편집자가 어느 날 읽을거리를 찾다가 손에 들고 전철을 탈 때까진. 대학에서 한국 문학을 전공한 소설가 지망생이자 미문의 비평가였던 그 편집자는 단숨에 이 작품에 빠져들었다. 시적이고 아름다운 문장들, 집단의 역사가 개인의 일상을 파고드는 장면들의 정확한 디테일, 관념적 사유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도 명랑성과 유머를 결코 잃지 않는 흔치 않은 재능, 이 모든 것이 그의 심장을 쉴 새 없이 두드려 댔다. 문학의 새로운 경지였다. 그는 밤이 빨리 지나기만을 기다렸다.
     1988년 가을, 민음사에서 발간하는 계간 《세계의 문학》에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실렸다. 서울대학교 독문학과 송동준 교수의 번역이었다. 나는 그때 대학생이었다. 위에 언급한 편집자는 같은 과 선배이자 공부 모임 멤버였다. 함께 문학 지망생이었고 공부를 같이했다. 작품을 읽는 순간 나는 거대한 충격에 빠졌다. 학내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헛된 투쟁, 민족문학론의 우악스러움에 지쳐서 실의에 빠졌던 한 청년의 가슴에 쿤데라의 이 작품은 세련된 문학에 대한 희망의 불꽃을 심어 주었다. 그러고 나자 갑자기 시야가 열렸다. 도스토옙스키와 카프카와 베케트가 내 문학의 중심으로 들어서고, 프루스트와 마르케스와 보르헤스가 새롭게 다가왔다. 감수성의 중대한 변환이 일어난 것이다. 이 책에 실린 김연경 선생의 말처럼, 1980년대의 마지막 몇 해는 문학을 하려는 이들에게는 오로지 ‘쿤데라 시대’로 기억되었던 것이다.
     1994년 나는 민음사에서 문학 편집자로 일하는 중이었다. 프랑스에서 쿤데라의 『느림』이 출간되어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당시 쿤데라는 체코를 떠나 프랑스로 망명해 있었고, 이 작품은 그가 프랑스어로 처음 쓴 소설이었다. 문학적 자유를 확보하려고 과감하게 모국어인 체코어를 버리고 프랑스어를 택한 것이다. 1993년 한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고 그에 따라 개정 저작권법이 발효됨에 따라서 저작권 계약 없이도 출판이 가능했던 이전과는 달리 『느림』을 펴내려면 계약이 필요했다. 당시에는 민음사에 저작권 담당자가 없었기에 이 일을 외국어 실력도 짧은 내가 맡아서 잠시 처리하게 되었다. 나는 저작권을 대행하던 쿤데라의 아내 베라에게 쿤데라 작품을 읽었던 소견을 솔직하게 써 보냈다. 그중에는 쿤데라의 문장이 서정시적(lyrical) 품격을 갖추었다고 한 부분이 있었는데, 베라는 쿤데라가 그 편지를 읽고 무척 기뻐했다면서 민음사에 출판권을 주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이 일을 기점으로 쿤데라와 민음사가 정식 계약을 맺고 한국어 판을 출간하는 시기로 접어든 것이다. 그의 작품에 대한 나의 진심이 짧은 외국어로도 전달되었구나 싶어서, 문학의 세계는 한국과 외국이 별로 다르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밤새 기뻐했던 생각이 난다.
     편집 후기에 자세히 나와 있듯이, 그 후 쿤데라는 자신의 모든 책을 프랑스 어에서 번역해 줄 것을 요청했다. 결국 송동준 선생이 번역한 판본은 수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그 후 신작인 『향수』, 『정체성』을 비롯하여 『농담』, 『불멸』 등 이전에 번역된 모든 작품이 민음사로 서서히 모이기 시작했다.
     2011년 나는 교정, 디자인, 체제 등이 제각각이었던 밀란 쿤데라의 작품들을 모아서 일관성 있는 편집 원칙 아래 출판할 것을 결심하고, 회사의 프랑스 문학 담당 편집자와 상의하면서 이 작업을 위한 계획을 세워 나갔다. 쿤데라는 우리 계획을 듣고 승인해 주었고, 외국에서 출판되기를 원하지 않는 몇몇 작품을 지정해주는 등 주의 사항을 전해 주었다. 그해 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비롯한 다섯 작품을 출간함으로써 밀란 쿤데라 전집이 프랑스 바깥에서는 최초로 간행되기 시작했으며, 올해 마지막으로 그의 유일한 희곡인 「자크와 그의 주인」이 출간됨으로써 현재까지 출간된 작품을 모두 한국어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사이 밀란 쿤데라는 한국 문학이 가장 사랑하는 외국 문학 작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작품에서 나온 뿌리들은 수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고 한국어 속으로 넓게 펴져 나가면서 한국 문화 속에서 새로운 싹들을 틔우고 있다. 사유, 감각, 이야기, 스타일 등 모든 게 새로워졌다. 만남들이 수없이 겹치면서, 땀들이 섞여 흐르면서, 한국어 속에서 새로운 길들이 표시되고 나타났다.
     이 모든 것이 지난 25년 동안 편집자들과 호흡을 맞추었던 여러 번역자 선생님들과 그동안 그의 작품들을 사랑해 주셨던 독자들 덕분이다. 전집 완간의 모든 기쁨을 그분들께 돌린다.


장은수(민음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