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 밑줄 긋기 by 손글씨 쓰는 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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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에 손글씨를 뽐내주신 캘리그라퍼를 소개합니다.

 

 

 

 

캘리그라피 작가

서울 출생

 

Jason Mraz의 Bella Luna를 너무도 좋아해서 루나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최근엔 스웨덴세탁소의 From. Paris에 등장하는 루나처럼 달달한 사랑을 하고 싶다고

 

자신의 손글씨가 그 누군가의 마음에 닿아 작은 위로를 건네기를, 꿈꾼다.

쿤데라 소설의 핵심어들: 『우스운 사랑들』에서 『향수』까지 (4)

비평


4 쿤데라, 망명, 소설(가), 카프카, 불멸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났다. 1975년 프랑스에 정착하였다.”

    

     아무리 작품의 독자성을 고집한다고 할지라도 너무 인색한, 심지어 무례한 소개가 아닐 수 없지만 한편으론 저 두 줄에 소설가 쿤데라의 정체성이 압축된 셈이다. 첫째,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이라는 점. 둘째, 이주-망명의 이력과 (언급이 안 된 출생년도와 대조되는데) 그 연도(1975년) 및 국가(프랑스)를 밝혔다는 점. 두 항목 사이가 쿤데라 창작의 첫 시기(체코-어 시기)를 마감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1970년대 초에 『이별의 왈츠』를 끝낸 후, 나는 작가로서의 내 행로가 완결됐다고 여겼다. 당시는 러시아 점령 치하였고 우리, 즉 아내와 나는기를 별 열정 없이 다시 시작한 것(프랑스 덕분에)은 프랑스에 온 지 일년이 지나서였다. 잔뜩 주눅이 들어 있던 나는 다시 한 번 발밑에서 단단한 지반을 느끼기 위해 과거에 이미 만들었던 것을 되살려 보고자 했다. 『우스운 사랑들』의 후속편 같은 것을 써 보는 것 말이다. 엄청난 퇴보 아닌가!(12, 249쪽)


     그러고 쓴 것이 연작 소설 형식의 장편소설 『웃음과 망각의 책』(1979)인데, 여기부터가 창작 2기, 즉 체코-프랑스 과도기다. “잔뜩 주눅”과 “엄청난 퇴보”는 아무래도 새로이 형성된 그의 정체성과 무관하지 않겠다. 이제 그는 프랑스 안의 “동유럽 사람”(13, 67쪽), 즉 ‘작은 나라’에서 온 ‘작은 말’을 쓰는 작가다. 그가 이주 작가의 계보(콘래드, 곰브로비치, 나보코프 등)를 작성하며 지적한 “향수의 고통”보다 더 “고약”한 “소외의 고통”(12, 136쪽)이 마냥 엄살만은 아니었을 법하다. 체코 작가의 눈에 비친 프랑스는, 또 다른 걸작 『불멸』의 일절을 빌면 (“러시아가 감정의 나라”인 데 반해) “형식의 나라”(7, 322쪽)다. 반면 슬라브(러시아) 문화의 전통에 속한 그는 완곡하면서도 강력한 부정(13, 67쪽)에도 불구하고 ‘형식’보다 (혹은 그만큼) ‘감정’을 중시하고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라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감정을 느낄 수 있으므로) 감정을 가치로 정립한 사람”인 “호모 센티멘탈리스”(7, 314쪽)에 주의를 기울인다. ‘감정’과 (철학적 사유를 포함한) ‘형식’의 소설적 결합에 음악 교수의 아들로 태어나 작곡과 음악 공부에 몰입한 이력도 한몫했을 터이다. “무엇을 통해 내 고국이 내 미학적 유전자에 영속적으로 각인되었는지를 내게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할 것이다. 야나체크의 음악을 통해서라고.”(14, 179쪽) 영화 속 장면(동시에 그것에 대한 해석)의 느낌을 주는 문체는 또한 그의 영화 관련 이력과 무관하지 않겠다.
     그럼에도 쿤데라는 인생의 전반(前半)을 채운 여러 공부와 활동을 포함, 무엇보다도 작가, 특히 (시인이나 희곡 작가가 아니라) 소설가다. 소설은여타 산문과, 소설가는 그냥 산문 작가와 구분(11, 193쪽)된다. 때문에 그는 평소 탐독한 사르트르의 “소설의 개념에 대한 불신”(14, 213쪽)에 놀라움을 보이기도 한다. 톨스토이의 이름을 들을 때면 “그 어느 소설과도 닮지 않은 그의 위대한 소설 두 편을 상상”하는 반면 사르트르나 카뮈에 관한 한 “그들의 전기, 그들의 논쟁과 투쟁, 그들의 견해 표명”(14, 214쪽)이 먼저 환기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소설가는 그 무엇보다도 소설로서 존재해야 한다. 고리키나 솔제니친처럼 작품이 작가의 “동상” 뒤로 사라진다든지(12, 87쪽) 작가가 작품 속 인물의 명성을 능가하는 것(“카프카가 요제프 K보다 관심을 끌게 되는 순간부터 죽은 카프카는 또다시 죽게 된다.”(11, 193쪽))은 소설가로서는 모두 불행한 일이다.
     대체로 그의 소설 관련 에세이는 르네상스와 18세기(세르반테스, 라블레, 스턴), 19세기-근대(발자크, 플로베르,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끝으로 그의 스승-선배격 거장들(프루스트, 카프카, 무질, 브로흐)을 아우르며 어지간한 소설론을 무색케 할 정도로 정치하다. 이른바 쿤데라 사전이 정의하는 ‘소설’은 “작가가 실험적 자아(인물)를 통해 실존의 중요한 주제를 끝까지 탐사하는 위대한 산문 형식”(11, 191쪽)이다. 인간 존재의 네 영역 혹은 요구(“유희”, “꿈”, “사고”, “시간”)를 담아내는 장르(11, 29~31쪽)이기도 하다. 근대의 역사와 평행선을 이루는 소설의 행로가 다음과 같이 요약되기도 한다. “돈키호테, 바로 그자가 세 세기에 걸친 여행 끝에 측량 기사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마을에 돌아온 것은 아닌가? 예전에 그는 스스로 모험을 택해 떠났지만, 이제 성 밑에 있는 마을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 (……) 소설의 위대한 첫 번째 주제였던 모험은 세 세기가 지난 후 (……) 자신의 패러디가 되어 버린 것인가?”(11, 20쪽)

     거시적 맥락에서 쿤데라는 고전적인 서사보다는 사유의 기록(아포리즘)과 맞물린 모던한(!) 서사, 무엇보다도 대단히 학구적인 소설(‘에세이 소설’, ‘철학 소설’)을 선보이는데, 그 계보의 수장은 물론 카프카다. “내가 카프카의 유산에 이토록 열렬히 집착하는 것이나 그것을 내 개인적 유산으로 옹호하는 것은, 모방할 수 없는 것을 모방하는 것(……)이 유용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의 소설들이 바로 소설(……)의 근본적인 자율성의 모범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11, 168쪽) 열렬한 카프카 숭배는 카프카에게 『소송』의 K가 마지막 순간에 겪은 ‘수치’(치욕)를 안겨 준 막스 브로트에 대한 분노를 낳기도 한다. “자기 인생 최대의 작품, 즉 카프카 신화를 창작”하던 중 자신의 모든 작품을 없애 버리라는 “역사상 유례 없는 그 의사(意思)”를 “그 신화의 주된 부품”으로 사용(12, 407쪽)하는 ‘만행’을 범했다는 것이다. 정작 수취인만 빼고 모든 사람들이 다 읽을 수 있게 된 카프카의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는 ‘배신당한 유언’(혹은 ‘유언의 배신’)의 정점이다. 아무튼 쿤데라와 카프카의 명백한 친연성은 단순히 소설 차원의 문제만은 아니다. 체코 안의 유대인(다수 안의 소수)으로서 독일어로 소설을 쓴 카프카는 ‘내적 망명’의 작가였던바, 망명과 소외의 정황이 그들을 한 범주로 묶는다. 완전한 ‘소멸’(원고를 불사르라!)을 꿈꾼 카프
카와 쉼 없이 ‘불멸’을 논하는 쿤데라가 데칼코마니 같은 대조-일치를 보이는 것도 같다. 쿤데라의 입장(『불멸』)에서 말하자면, 소설가는 대놓고 (‘작은 불멸’이 아닌) ‘큰 불멸’을 지향하고(7, 82쪽) “불멸에 대한 욕망의 몸짓” (7, 267쪽)을, 그것이 허망한 것임을 잘 알고 있음에도, 혹은 그렇기에 더더욱, 멈출 수 없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저주받은 숙명인 까닭이다.

 

그중에서도 예술가의 영광이 가장 끔찍하다. 왜냐하면 그 영광이 불멸할 것이라 생각하니까. 그것은 악마가 파 놓은 함정이다. 예술가의 마음 속에 불멸을 바라는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한 과대한 야심이 반드시 있어야 예술가는 예술가로서의 사명을 성실하게 수행할 수 있으니 말이다. 진정한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설이라면 너무도 당연하게 영구적인 미학적 가치를, 즉 작가의 사후에도 여전히 살아남을 수 있는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한다. 이러한 야망 없이 글을 쓰는 것은 파렴치한 일이다. 왜냐하면 평범한 배관공은 사람들에게 유익한 존재이지만, 일부러 덧없고, 진부하고, 판에 박힌, 그래서 무익하고, 결국 성가시고, 마침내 해를 미치는 책들을 만들어 내는 평범한 소설가들은 경멸당해 마땅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소설가의 성실함이 그 지나친 야망이라는 고약한 기둥에 묶여 있다는 것, 그것이 소설가에게 내려진 저주다.(13, 133쪽)


     살아생전에 전집 규모의 작품집이 발간되는 작가임에도 검색되는 인터뷰 동영상은 고작 두 개뿐이다. 말쑥한 슈트 차림을 하고 풍선 같은 의자에 껄렁한 자세로 앉아 『농담』에 관한 농담을 즐기는 장년 쿤데라, 그리고 듬성듬성한 머리카락마저 은발이 된, 가벼운 스웨터 차림에 찌푸린 양미간이 눈에 띄는 진중한 중년-초로의 쿤데라. 체코에서 스위스로 이주한 한 연구자의 물음대로(M. Rizek, 『Comment devient-on Kundera?』) ‘작은’ 언어를 쓰는 ‘작은’ 나라 출신의 작가가 어떻게 세계의 독자를 사로잡았을까.
     2013년 현재 84세인 그는 1990년대 우리 독서 목록의 맨 윗자리를 점했던 작가다. 쿤데라의 소설은 생활-생계에 대한 의식의 부재, ‘쿨-쉬크’를 표방한 삶의 양태, 각종 문화예술 코드의 적절한 배치(키치!), 이데올로기에서 ‘이마골로기’로의 이행 등을 특징으로 하되 주된 방점은 인간실존의 두 영역과 그것의 상호작용에 찍힌다. 그는 ‘육체’(성과 배설)를 형이하학의 극단까지 끌어내림과 동시에 그 과정에서 오롯이 드러나는 형이상학의 극단(‘영혼’), 심지어 “영혼의 이상 팽창”(7, 326쪽)을 그려 보인다. 여기서 인간이 (정육점의 고깃덩어리처럼!) 구강과 항문을 가진 살덩어리임을 폭로하는 “화가[프랜시스 베이컨]의 난폭한 몸짓”(14, 9~33쪽)과, 정반대로 인간이 형이상학적 모순의 집적체임을 강조하는 르네 마그리트의 붓놀림이 조우하기도 한다.
     끝으로, 각종 소비재와 문화 콘텐츠의 범람 속에서 책, 특히 소설책은 여전히 우리의 생활 자장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선 것, 잉여적이고 그 때문에 지적인 것이다. 그리고 동유럽(변방/사회주의)이든 중유럽(중심/민주주의)이든(즉 체코 출신의 프랑스 작가이든 프랑스로 이주한 체코 작가이든)어쨌거나 우리에게 쿤데라는 유럽 작가이고, 유럽 문학은 여전히 어딘가 낯설고 그 때문에 매혹적인 것이다. 현재로선 유럽 소설의 최첨단이자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작품이 새로이, 두루 출간되어 반갑다.

 

 

 

쿤데라 소설의 핵심어들: 『우스운 사랑들』에서 『향수』까지 전편 보기

 

쿤데라 소설의 핵심어들 : 『우스운 사랑들』에서 『향수』까지 (3)

비평

 

3 느림, 정체성, 향수

 

     한 시인의 잉태, 탄생, 성장, 죽음을 다룬 『삶은 다른 곳에』(1973)의 마지막 7부에서 작가는 주인공 야로밀과 레르몬토프를 병치한다. 후자는 해묵은 질투와 사소한 말다툼 때문에 동기생(마르티노프)과 결투를 벌이다 스물일곱의 나이에 어이없이 사망한 러시아 낭만주의의 최고 시인이다. “그렇지만 야로밀이 레르몬토프의 패러디일 뿐이라고 해서 우리가 그를 비웃어야 할까? 화가가 가죽 코트를 입은 앙드레 브르통을 모방했다고해서 우리가 화가를 비웃어야 할까? 앙드레 브르통 역시 자기가 닮고 싶어 했던 어떤 고귀한 것의 모방이 아니었는가? 패러디란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아닌가?”(3, 494쪽) 이 ‘서정적 청춘’의 내적 근간을 이룬 패러디가 환갑을 훌쩍 넘긴 쿤데라의 소설에서는 문학적 형식(패러디 문학)이 된 것같다. 『느림』, 『정체성』, 『향수』는 애당초 프랑스어로 쓴 소설로서 전성기의 걸작에 비하면 거의 소품처럼 보이지만 삶과 인간관계의 본질에 대한 그의 통찰은 더 날카롭게 표현된다. 정치와 성의 긴장도 약해져 ‘건전’해졌다는 느낌도 준다.
     가령 『느림』은 18세기 작가(비방 드농)의 단편소설 한 편(「내일은 없다」)을 자기 식으로 다시 풀어쓴 소설이다. 18세기의 한 성(城), T 부인은 남편에게 자기 정부(후작)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 젊은 기사를 이용, ‘멋진 하룻밤’을 보낸다.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를 연상시키는 질문인바, 과연 무엇이 진실인가. 작가의 답은 간명하다. “그녀(T 부인)는 남편에게 거짓말했고, 정부인 후작에게 거짓말했고, 그 젊은 기사에게 거짓말했다. 그녀야말로 에피쿠로스의 참 제자다. 쾌락의 사랑스러운 친구. 다정한 거짓말쟁이 여성 호위병. 행복을 지키는 여인.”(8, 159쪽) 이 소설이 이백 년의 세월을 거슬러 호텔이 된 똑같은 공간에서 여러 남녀를 통해 다시 반복되면서 ‘실존 수학’의 느림과 빠름, 기억과 망각의 방정식(“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강도에 정비례하고,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강도에 정비례한다.”(8, 49쪽))을 환기한다.
     『정체성』의 여주인공 샹탈은 다섯 살 된 아이를 잃은 아픈 기억이 있다. 아이를 잊으려면 어서 빨리 다른 아이를 가져야 한다는 가족의 위안 섞인 충고에 발끈하고, 다름 아닌 남편이 그런 말을 했을 때 그를 떠날 결심을 한다. 현재 그녀는 네 살 연하의 장마르크와 같이 사는데, 혼자 바닷가(노르망디 해안)를 거닐다가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닫고는 좌절한다.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더라.”(8, 29쪽) 이 말에 장마르크도 좌절(“당신을 찾아 해변을 수킬로미터씩 헤맸고 (……) 당신을 따라 지구 끝까지라도 뛰어갈 수 있는 나는 뭐지?”(8, 29쪽))하고는 노화와 매력 상실로 슬퍼하는 연인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의 시선이 아니라 천박하고 음탕한 익명의 시선”(8, 46쪽)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한편, 어느 날 샹탈은 주소도 우표도 없는, 누군가가 직접 갖고 온 것이 분명한 편지 두 통을 받는다. 처음에는 ‘구애’가 아닌 ‘조롱’이라는 생각에 불쾌감을 느끼지만 어느덧 어딘가에 숨어 있는 ‘그’의 시선을 의식, 여자로서의 자의식과 자신감에 불이 붙음과 동시에 ‘그’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온갖 ‘희극적 상상’을 동원한다. 독자는 이내 편지의 발신자가 장마르크임을 알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사랑을 지키려는 갸륵한 마음에서 쓰기 시작한 편지가 강한 질투와 분노를 유발한다는 점이다. 길을 걷다가 얼굴을 붉히기도 하고 “불륜의 약속을 떡잎부터 잘라 버리지 않고 이름 모를 숭배자의 편지를 곱게 간직”(8, 124쪽)하는 것은 뭔가. 장마르크가 마지막 편지를 쓰기로 결심할 무렵에는 샹탈도 이미 사실을 짐작한다.
     재미난 희롱 같은 그들의 싸움은 유럽 대륙과 영국 사이의 해저 터널을 건너온 다음 화해로 끝난다. “나는 조그만 머리맡 스탠드 불빛을 받고 있는 그들 두 사람의 옆머리를 보고 있다. 베개 위에 목덜미를 기댄 장마르크의 머리, 그 위로 십 센티미터쯤 숙인 샹탈의 머리.”(8, 183쪽) 스탠드의 불을 끄겠다는 장마르크를 만류하며, 심지어 연인의 키스마저 조용히 물리치며 샹탈은 “아니, 그냥 당신을 보기만 할 거야.”(8, 183쪽)라고 말한다.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을 밑 텍스트로 한(장마르크가 서명할 때 쓴 C. D. B.는 「시라노」의 주인공 ‘시라노 드 베르제라크’의 이니셜이다.) 이 소설의 주제가 사랑임을 강조하는 장면이다. 군데군데 등장하는 쿤데라 특유의 아포리즘(“권태에는 세 가지 범주가 있다. 수동적 권태. 춤을 추고 하품하는 소녀. 적극적 권태, 연 애호가. 반항적 권태. 자동차에 불 지르고 창유리를 깨는 젊은이들.”(8, 22쪽))이 독서의 흥미를 더한다.
     현재로선 쿤데라의 마지막 소설인 『향수』에서는 십 년은 전쟁, 십년은 (칼립소와 함께한 ‘돌체 비타’의 칠 년을 포함) 방랑에 보낸 뒤 이타카로 귀향한 오디세우스의 운명이, 오래전 각기 다른 이유로 체코를 떠나 외국(프랑스/덴마크)에서 살다가 귀향한 이레나와 조제프를 통해 반복된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대한 작가의 화답이란 “오랜 부재 끝의 귀향은 이 세계와 실존의 본질적인 낯섦을 드러낼 수 있다”(12, 136쪽)는 것이다. 두 주인공의 동침도 소통의 결렬을 확인하는 것으로 끝난다. 대체로 ‘영원회귀’가 ‘영원불귀’로 탈바꿈하는 것인데, 이 지점에서 소설의 바깥, 작가의 삶을 엿보자.

 

 

쿤데라 소설의 핵심어들: 『우스운 사랑들』에서 『향수』까지 전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