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소설가보다 위대하다 - 4

비평

4 소설의 지혜 — 소설가의 지혜

박성창-쿤데라(《세계의 문학》 2000년 겨울호)


박성창

당신은 ‘소설가’와 ‘작가’를 분명하게 구분합니다. 소설가란 작품 뒤로 사라지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당신은 진정한 소설가들은 ‘소설의 지혜’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귀기울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소설의 지혜’라는 용어에 대해 보다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쿤데라

예전에 어느 대담에서 그러한 구분을 제시한 적이 있었지요. 하지만 오늘날 작가가 아니라 소설가로 남기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중요한 것은 매스미디어의 무대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데 매스미디어에서 원하는 것은 소설가가 아니라 작가거든요. 서점에 가서 진열된 소설책들을 보세요. 표지에 전부 작가들의 사진이 마치 배우 사진처럼 실려 있어요.


박성창

소설가와 작가를 구분하려는 뜻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당신이 언젠가부터 대담을 하지 않겠다고 밝힌 것도 소설가로서만 발언하려는 의도에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소설가의 지혜’라고 하지 않고 ‘소설의 지혜’라고 하셨나요?

쿤데라

글쎄요, 제 생각에는 소설가보다 위대한 것은 소설인 것 같습니다. 소설은 소설가의 편견까지도 극복하게 해 준다고 말할 수 있어요. 소설을 쓰기 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문제를 소설가는 소설을 쓰면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헤르만 브로흐라는, 제가 좋아하는 소설가는 “소설이 열어 주는 세계관”이라고 표현했지요.『안나 카레니나』를 집필하던 당시의 톨스토이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박성창 소설이 열어 주는 지평 또는 소설이 확장하는 지평에 대한 일종의 은유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쿤데라 그렇습니다.


박성창

그런데 당신은 소설이 사라져야 한다면 그것은 소설이 힘이 다해서가 아니라 소설의 것이 아닌 세계 속에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는데 혹시 소설의 미래에 대해서 비관적인 것은 아닌가요?

쿤데라

저는 무엇이든지 미래에 대해 예언하지도 않고 또 그럴 수도 없습니다. 이번 소설에서 쇤베르크의 예를 통해 제가 말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그 점입니다. 인간이 그의 미래에 대해서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그러면서 그는 이번 소설 제목을 프랑스어로 또박또박 발음했다.) 이뇨랑스(ignorance, 무지).


박성창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소설을 쓰고 계시고 또 앞으로도 소설을 쓰실 것 아닙니까?
쿤데라

저는 소설이, 아직 천착되지 않은 많은 형식적 가능성들을 열어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중들이 그것들을 지각할 수만 있다면 소설의 형식적인 가능성들은 무한하다고 확신합니다.

 


     그가 걸려 온 전화를 받는 동안 그가 문명의 이기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이메일을 사용하느냐고 묻자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그것에는 전자 우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편지’와는 다른 것이라고 대답했다. 자기가 시대에 뒤떨어진 것 같지만 속도를 추구하는 현대 문명 속에서는 ‘느림’의 전략도 유효하며 사르트르도 죽을 때까지 카페에 앉아 펜으로 글을 쓰지 않았느냐고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다시 소설에 관한 질문으로 넘어갔다.

 


박성창 소설사 속에서 당신 소설을 어디에 놓을 수 있을까요?
쿤데라

매우 단순화된 구분이지만 저는 소설이 세 단계를 거쳐 전개되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서술, 묘사, 성찰. 처음에 소설은 주인공의 모험과 행동에 대한 서술로부터 출발했고 19세기에 이르러 묘사 중심의 이른바 사실주의 소설이 융성했으며 20세기에는 성찰을 목표로 하는 소설이 나타납니다. 저는 20세기의 위대한 소설들은 이른바 ‘성찰적 소설’에 속한다고 봅니다. 물론 서술적 소설이나 묘사적 소설이 성찰적 소설에 비해 열등하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저는 서술적 소설을 열었고 유럽 소설의 위대한 순간을 장식하게 한 세르반테스의 소설과, 또한 서술적 소설에서 묘사적 소설로의 결정적인 이행을 가능하게 한 플로베르의 소설을 매우 높이 평가합니다. 소설가에게 있어 새로운 형식의 실험은 그 생명과도 같습니다.


박성창 ‘성찰적 소설’이란 무엇이며 그 대표적 소설가들은 누구입니까?
쿤데라

이미 『소설의 기술』에서 설명했습니다. 저는 소설이란 자아의 고백과는 분명히 구분된다고 믿습니다. 소설은 소설가 자신의 사적 이야기를 털어놓는 장소가 아니라 인간 실존에 관한 물음을 던지고 이에 관해 성찰하는 계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철학처럼 개념적이고 추상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인물들의 유희를 통해 실천해 가는 것이죠. 무질이나 카프카, 브로흐나 곰브로비치 같은 작가들은 그 훌륭한 예입니다.


박성창

브로흐나 곰브로비치 같은 작가들은 한국 독자들에게 매우 생소한데요. 혹시 그들 작품들 가운데 추천해 주고 싶은 작품이 있나요?

쿤데라

브로흐의 『몽유병자들』이라는 작품은 정말 뛰어납니다. 그는 이외에도 다른 작품들을 남겼지만 이 작품 하나만 읽어도 좋을 듯 싶군요. 1968년에 죽은 곰브로비치의 작품으로는 『페르디두르케』라는 훌륭한 소설이 있습니다.


박성창 흔히 당신 소설에 대해 ‘철학 소설’이라고 평가하는 데 대해서는 부정적이십니까?
쿤데라

그렇습니다. 제 소설은 철학이 아닙니다. 예컨대 실존의 상황을 끝까지 탐색한다고 해서 제 소설이 실존주의의 예증은 결코 아닙니다. 소설은 소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성찰합니다.


박성창

소설이 소설 나름의 방식으로 성찰한다고 했을 때 이를 소설의 정신이라고 부른다면 이는 성찰하지 않으려고 하는 시대 정신과는 대립되는 것인가요?

쿤데라

글쎄요, 하지만 이렇게 말을 바꿔 봅시다. 소설은 ‘소설 나름의 방식으로’ 성찰을 하고 사람들은 ‘사람들 나름의 방식으로’ 성찰하지 않는다.(이렇게 말을 바꾸어 놓고 보니 그 표현이 재미있고 기발해서 우리는 한동안 껄껄거리며 함께 웃었다.) 소설은 철학 그 자체는 아니지만 ‘나름대로의’ 철학을 반드시 내포하지요. 제가 누보 로망 계열의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는 묘사만 있을 뿐 작가가 던지는 질문이나 성찰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소설이 사고의 획일화 — 요즘 점점 더 심해지는 — 에 맞설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까닭에서입니다.


박성창 앞서 현대 작가들 가운데 좋아하는 작가 몇 명을 말씀하셨는데 20세기 이전 작가들 가운데는 또 누가 있을까요?
쿤데라

저는 라블레와 디드로, 특히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을 쓴 디드로를 좋아합니다. 언젠가 프랑스에서 디드로의 이 소설을 연극으로 만들어 본 적도 있지요.(쿤데라는 이 소설을 「자크와 그의 주인」이라는 3막 희곡으로 만들었는데, 그 작업이 단순한 각색 차원이 아니라는 것을 그 서문에서 분명하게 밝힌다.) 이 소설에서는 모든 것이 유희이고 모든 것이 자유이며 형식의 즐거움입니다. 그래서 저는 『소설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지요. “프랑스에서 이 책은 엄청나게 과소평가되었다. 이러한 과소평가에는 프랑스가 잃어버렸고 다시 찾기를 거부하는 모든 것이 집약되어 있다.” 아무튼 프랑스 문학에 대한 저의 입장과 선호도는 일반 사람들의 생각과는 많이 다릅니다. 저는 프랑스 사람들이 빅토르 위고를 좋아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요. 그리고 라블레 같은 훌륭한 작가를 많이 읽지 않는 것도요.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저는 누보 로망 계열 소설들, 예를 들어 로브그리예의 소설을 싫어합니다.(그러고 보니 그의 소설들에서는 유난히 묘사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인물들은 그들이 사는 실존적 상황에 맞추어 제시되지 흔히 그렇듯이 그들의 과거, 사회 환경, 그들이 받은 교육 등에 의해 제시되지 않는다. 예컨대 우리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토마시가 바람둥이라는 사실만 알지 그의 외모나 신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인물 그 자체는 인물들의 실존적 삶 앞에서 지워져 버린다고나 할까.)


박성창

언젠가 라블레에 대해 말하면서 라블레에게서는 재미와 더불어 심각한 질문이, 다시 말해서 형식상의 가벼움과 실존적 질문의 무거움이 결합되었다고 지적하셨지요. 이와 똑같은 지적이 당신 소설에도 유효한가요?

쿤데라 글쎄요, 모르겠어요. 비평가들이 열심히 따져 볼 문제겠죠.

 

박성창 마지막으로, 당신이 쓰신 소설들 가운데 특별히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습니까?
쿤데라 모두 다 내 자식들입니다. 발표를 한 이상 모두 다 절대적으로 똑같은 내 분신들입니다.


박성창 한국 독자들에게 잘 소개되지 않은 당신 작품들에 관해서 더 말씀해 주신다면?
쿤데라

그것도 결국 독자의 몫입니다. 다만 『삶은 다른 곳에』는 약간 어려울지도 모르겠고 『이별의 왈츠』는 반대로 쉬울지도 모르겠어요. 즉 전자는 무거움이 가벼움과 결합되지 못했고 후자는 가벼움이 무거움을 만나지 못했어요. 『웃음과 망각의 책』은 형식의 자유분방함이 두드러진 작품이지요. 『불멸』도 어렵게 느껴질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전 세계적으로 반향을 일으켰기 때문에 오히려 그 작품에 대해 거리감을 느낍니다.

 

 

     이렇게 해서 쿤데라와의 대담은 끝났다. 밖은 어두워지고 있었고 시계를 보니 5시가 넘었다. 반나절을 그와 함께 보낸 셈이다. 나는 쿤데라에게 한국 전통주와 인삼차를 선물했다. 그는 인삼차는 먹어 본 적 있지만 한국 전통주는 맛이 어떨지 몹시 궁금하다며 병마개를 열어 냄새를 맡았다. 나는 그것이 포도주와는 달리 아주 독한 술이므로, 되도록이면 조금씩 오래오래 마시는 것이 좋다고 말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한국에 있는 당신 독자들을 위하여 한국에 올 계획은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자신은 반나절의 비행을 참아 낼 수 있을 것 같지만 그의 부인은 두 시간 이상 비행기를 탈 수 없기 때문에 힘들 것 같다고 대답했다. 아내를 사랑하는 심정이 그의 표정에서 묻어 나왔다. 아닌게 아니라 그는 아내의 건강이 썩 좋지 않다고 하면서 아까 처음 만났을 때보다 아내 표정이 많이 지쳐 보이지 않느냐고 내게 물었다.
     이제 정말로 헤어져야 할 때가 된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나는 그에게 추억으로 사진을 한 장 같이 찍을 수 있겠느냐고 청했다. 그의 대답과 표정은 단호했다. 자기는 십 년 전부터 그 어떤 사진도 찍어 본 일이 없으며 일종의 ‘사진 공포증(photophobie)’에 걸렸노라고, 그 누구와도 사진을 찍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그는 방으로 들어가 귤을 하나 들고 와서는 내게 사진 대신 이걸 선물로 들고 가는 게 어떻느냐고 말하면서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가 작가가 아닌 소설가로 남기를 선택한 순간부터, 매스미디어의 횡포와 왜곡에 저항하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사진 대신에 귤을 준 소설가.’ 아마 쿤데라는 내게 상당 기간 이런 이미지로 기억될 것이다. 사진 속에 자신의 개성을 박제화하고 그것을 상업화하는 것을 거부하고 귤의 ‘향기’로 남기를 원했던 소설가로. 아마도 나는 오랫동안 그 귤의 향기를 맡을 것이다.
     밖으로 나오니 빗줄기가 제법 굵어져 있었다. 아파트 밖까지 배웅을 나온 쿤데라는 파리의 이런 날씨를 견디려면 트렌치코트 같은 긴 외투가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내 어깨가 추워 보인다면서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그때의 모습은 영락없는 이웃집 할아버지였다. 우리는 굳게 악수를 하고, 나는 비 오는 파리의 거리로, 그는 자신의 소설의 집으로 각각 걸어 들어갔다.

 

 

 

『이별의 왈츠』한 인간의 마음을 송두리째 앗아 가는 것에는 질투만 한 것이 없다.

밑줄긋기

 

 

 

 

 

한 인간의 마음을 송두리째 앗아 가는 것에는

질투 만한 것이 없다.

 

- 밀란 쿤데라 『이별의 왈츠』

 

 

소설은 소설가보다 위대하다 - 3

비평

소설은 소설가보다 위대하다 - 3

 

박성창-쿤데라(《세계의 문학》 2000년 겨울호)

 

3 쿤데라의 소설 형식

 

박성창

그다음으로 저는 특히 이번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꿈’에 관해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특히 한국 독자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오는 테레자의 꿈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쿤데라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이러한 꿈 이야기 덕분에 독자들은 테레자의 감추어진 부분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제가 이번 작품에서 묘사했던 ‘망명의 꿈’은 이러한 개인 차원의 꿈이 아닙니다. 일종의 집단 무의식에 관련된 것입니다. 제가 픽션으로 꾸며 낸 것도 아니고 순전히 제 개인적인 환상의 소산도 아닙니다. 한국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지만 프랑스어의 경우 이는 두 단어로 이루어진 복합어입니다만 독일어에는 한 단어로 존재합니다. 이 ‘망명의 꿈’은 실제로 저를 포함해서 모든 망명객들이 꾸었던 꿈이며 이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현상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박성창

마지막으로 이번 작품의 형식에 관해 질문드리겠습니다. 이 작품은 53개의 장들로 구성되어 있고 가장 긴 장도 당신이 제게 준 원고 상태로는 A4 용지로 4~5페이지를 넘지 않습니다. 특별히 이런 식으로 작품을 구성하신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리고 이번 작품에서 형식의 변화를 시도하셨나요?

쿤데라

소설가에게 형식이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를테면 자발적인 것이고 소설가는 ‘그 후에야’ 자신의 형식에 대해 깨닫지요. 실제로 이 작품은 『불멸』 이후에 제가 시도했던 형식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을 수 있는 텍스트, 전혀 분절되지 않고 전체가 한 덩어리로 뭉쳐진 긴 텍스트를 싫어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소설을 ‘소비’하게 만들지요. 빨리, 그리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읽고 난 후에는 남는 게 없습니다. 저는 이와는 반대로 제 소설을 이루는 각 장들을 거의 독립적인, 마치 한 편의 ‘시의 힘’을 지닌 것으로 읽어 주었으면 합니다. 비록 독자들이 전후 스토리의 맥락을 모르는 경우일지라도, 어느 장을 펼치더라도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지향합니다. 각각의 장이 충분한 미학을 지닌, 전체의 구성이 중요합니다.


박성창

그러니까 당신 작품을 설명하는 데 흔히 동원되는 소나타니 푸가니 하는 음악적 비유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신은 소설과 음악 간의 긴밀한 관계를 여러 번 강조했습니다. 당신 부친께서는 유명한 피아니스트셨고 당신도 스트라빈스키로 대표되는 현대 음악에 조예가 상당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당신 소설의 ‘대위법적 구성’도 이러한 맥락에서 생겨난 것이지요. 실제로 저는 『불멸』을 읽으면서 마치 음악 작품처럼 구성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알기로는 당신은 일찍부터 영화에 관심을 두었고 실제로 프라하에서 영화를 가르치기도 했지요. 당신작품과 영화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쿤데라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흔히 그렇게들 생각하는데 내 글쓰기는 영화에서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습니다. 문학적 글쓰기와 영화적 글쓰기는 전혀 길이 달라요. 물론 제가 영화를 가르친 건 사실이지만(쿤데라는 정확히 말해서 이미지로서의 영화가 아니라 글쓰기로서 시나리오를 가르친 것이라고 정정해 주었다.) 그 후의 제 삶은 영화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박성창 전혀 뜻밖의 대답이군요. 그런데 소설의 길과 영화의 길은 어떻게 다른가요?
쿤데라

글쎄요, 소설은 길이와 속도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삶은 정말로 너무나도 짧습니다. 항상 똑같은 일에만 매달려 있다면 얼마나 슬픈 일일까요! 저에게는 이전의 실존과는 다른 실존을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박성창

혹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영화로 만든 것에 실망해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아닌가요? 또 당신은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를 영화로 만든 것을 두고 미학적 키치라고 비판한 적도 있었지요. 그래도 좋아하는 영화는 있지 않나요?

쿤데라 거의 없어요. 단, 예외로 펠리니의 영화들은 무척 좋아합니다. 거의 유일한 예외지요.

 

박성창 일 년에 몇 번 정도 영화를 보십니까?
쿤데라 한두 번 정도.

 

박성창

정말입니까? 저는 늘 당신이 상당한 영화광일 거라고 상상해 왔는데 지금 그 상상이 깨지는군요. 그렇다면 금년에 보신 영화 중에 기억 남는 작품은 무엇입니까?

쿤데라 글쎄요, 금년에 본 영화라곤 단 한 편밖에 없어요. 그것도 제 친구가 만들었다고 해서 반의무적으로 보았지요.

 

     

     시계를 보니 오후 4시가 넘어 있었다. 12시 30분에 만났으니 제법 시간이 흐른 셈이다. 사실 질문을 하는 나는 조금씩 지쳐 가고 있었는데 쿤데라에겐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쿤데라의 부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쉬엄쉬엄 하라는 말을 건넨다. 담배도 피우고 차도 마셔 가면서 하라고. 이제 신상 관련 질문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중요한 질문은 이제부터인데. 대담을 할 때는 중요한 질문을 대담 한 가운데 배치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달았다. 너무나도 미안한 마음으로 소설에 관한 보다 일반적인 질문들을 해도 괜찮겠느냐는 질문에 쿤데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서둘러 질문 보따리를 풀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