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에 대하여 _ 04 이별의 왈츠

비평

04 이별의 왈츠
불륜의 통속극에서 자아 발견의  실존적 드라마로


권은미(이화여대 교수)

 

     가을이 시작되는 어느 월요일 오후, 체코의 서유럽 국경 근처 한 온천 도시에서 걸려 온 루제나의 전화 한 통으로 사건은 시작된다. 불임 치료로 유명해 온통 여자들로 우글대는 그곳 온천장에서 벗어나기만을 고대하는 젊고 육감적인 간호사 루제나. 두 달 전 이곳으로 공연 왔던 수도의 유명한 트럼펫 주자인 클리마와 하룻밤을 보낸 그녀에게 임신이라는 요행이 찾아왔다. 물론 연하 남자 친구가 있으나, 그 아이가 클리마의 아이일 거라는 희망은 확신으로 변한다. 하지만 바람둥이 클리마에게 바람은, 아름다움의 화신인 아내 카밀라에 대한 극단적인 사랑을 역설적으로 확인하는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클리마는 임신 사실을 알려 온 루제나를 떼어 버릴 궁리를 하며 전전긍긍한다. 한편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에서 다른 여자의 냄새를 맡는 카밀라는 질투로 괴로워하나 이를 드러낼 수도 없어 더욱 고통스럽다. 신경이 예민한 클리마는 당장 루제나를 만나 해결을 보지 않고서는 병이 날 것 같다. 화요일 아침, 아내에게 거짓 핑계를 대고 온천 도시에 도착한 클리마는 루제나에게 거짓 사랑을 고백하고 그 사랑의 이름으로 낙태를 설득하는 작전을 펼친다. 불임 치료 온천장에서 낙태를 강요해야 하는 상황부터 아이러니컬하다.
     이 소설은 작가가 말했듯이 ‘5부로 구성된 희극’적 구성을 통해, 연극의 특성인 공간과 시간의 한정, 그리고 곁가지 없는 단일한 이야기의 통일성을 보여 준다. 임신을 알리는 루제나의 전화 목소리에 클리마의 대꾸와 카밀라의 질투로 시작된 통속적인 불륜의 삼중주는 월요일 오후부터 금요일 저녁까지 단 닷새 동안 온천 도시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다른 목소리가 하나씩 덧붙으며 퍼져 나가는 7인조 실내악으로 발전된다. 정확하게 바톤을 이어받으며 등장하는 인물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며 서로 대꾸하고 화답하는 이야기 전개 방식은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정교하다.

 

     두 달 전 클리마와 루제나를 엮게 된 하룻밤 파티를 열었던 베르틀레프, 그는 고향으로 돌아온 미국 국적의 부유한 사업가다. 기독교적 성자의 모습을 보여 주나 과도한 자비심과 타인에 대한 사랑을 엉뚱하게도 여인에 대한 섹스로 베푸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불임 치료 전문 의사 슈크레타는 아마추어 드럼 주자이자 몽상가다. 조국에 아무리 불쾌한 점이 많다 해도 “우리는 이 나라에 대해 책임이 있다.”라고 말하는 그는 공허한 정치가 아니라 의학을 통해, 즉 자기 정액을 불임 여성에게 주입함으로써 진짜 피를 나누는 형제들의 나라를 만들겠다는 기상천외한 몽상을 실현시키는 괴짜다. 이 두 인물이 내는 음색은 이야기를 유쾌하고 환상적으로 만들어 줄 뿐 아니라 ‘인간이란 태어날 가치가 있는가’, ‘정치란 무엇인가’, ‘인간의 삶을 추동하는 욕망의 실체는 무엇인가’ 등 철학적 질문을 유도하는 저음의 콘트라베이스와 같다. 클리마, 루제나, 카밀라와 함께 날카로운 핵심 멜로디를 이끌어 갈 사람으로 수요일 아침, 온천 도시에 야쿠프가 도착하고 그와 함께 그의 피후견인인 올가가 합류한다. 야쿠프는 정치 투쟁으로 평생을 행동의 핵심부에서 살았노라 자부하는 신념의 사나이다. 동지로부터 배신도 당하고 감옥에도 다녀왔으며 이젠 출국 허가를 얻어 영원히 이 나라와 작별하려고 한다. 그 전에 파란 독약을, 자신의 삶과 죽음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인간 존엄의 보증서 마냥 엄숙하게 품고 다니던 그 독약을 그 제조자인 슈크레타 의사에게 돌려주려고, 또 내심 위대한 행위라 여기며 돌봐 왔던 배신자 동지의 딸 올가와 작별을 하려고 이 온천 도시에 들른 것이다. 올가는 자신의 아버지, 즉 정치 투쟁 과정에서 처형당했으나 이젠 복권된 자기 아버지의 진실에 회의를 품은 지적인 여성이다. 육체는 볼품이 없으나 섬세한 자의식의 소유자로, 타인뿐 아니라 자신의 모든 행위를 차갑게 응시하며 상황을 주도하고자 하는 은밀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카밀라는 남편의 진실을 알기위해, 즉 그의 부정을 확인하기 위해 목요일 이곳 온천 도시로 와서 합류하게 된다. 이제 모든 등장인물들이 무대 전면에 등장했다. 루제나의 애인 프란티셰크와 영화인 그룹은 우스꽝스럽고도 처절한 이 멜로디를 더 자극적으로 돋보이게 하는 장식음이라고나 할까?

 

     목요일, 인간 존엄의 보증서 같았던 야쿠프의 독약이 우연히 루제나의 진정제 약통 속으로 들어가면서 불륜의 통속극은 ‘동기 없는 살인’이라는 실존적이고 철학적인 드라마로 심화된다. 이 소설에 대한 한 해설은 이 소설의 핵심 테마로 ‘속임수’를 들고 있다. 서로에 대한 속임수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속임수가 핵심 주제라는 것이다.
     클리마와 그의 아내 카밀라, 클리마와 루제나, 야쿠프와 올가는 서로 속이고 속으며 또 속는 척한다. 또 독약도 가짜가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가장 심각한 속임수는 자신에 대한 속임수, 즉 자신에 대한 착각과 오해로, 이는 일상에서는 결코 깨달을 수 없는 가장 은밀한 속임수다. 쿤데라는 소설의 존재 이유란 숨겨져 있던 ‘인간 본성’의 한 단면을 발견하는 것, 이런저런 예외적인 우연의 조합인 ‘상황의 정수(精髓)’가 없었더라면 결코 만날 수 없는 ‘실존적 성찰과 본질의 발견’이라고 그의 소설론에서 수차례 반복했다. 개 사냥이라는 상징적 에피소드로 암시된 이 소설의 정치적, 역사적 분위기는 그 자체로서의 의미보다는 인간 실존의 비밀을 드러낼 수 있도록 밀도 있게 집약된 첨예한 ‘상황의 정수’로서의 틀로 읽혀야 할 것이다.

     낙태 문제와 독약 사건을 중심으로 사랑과 질투, 권태와 탈출, 신념과 좌절, 죽음과 삶의 이야기가 교묘하게 엮이면서 핵심 인물들은 자기 존재의 근원적인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 이 문제들이 서로 충돌하며 마치 폭죽이 터지듯이 파열음을 내며 대단원의 파국이 시작된다. 속임수의 세계로부터 자기 발견과 자기 폭로로 나아가는 순간이다. 따라서 목요일 후반부터는 ‘깨달았다’는 표현이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무지가 철철 넘치던’ 루제나는 베르틀레프와 예상하지도 못한 사랑의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 클리마와 프란티셰크 이외 자기 삶에 다른 가능성이 있음을 깨닫는다. 오직 남편만을 바라보았던 카밀라는 그동안의 자기 삶이 눈먼 상태였음을 깨닫고 남편 없는 세계의 새로운 지평을 보게 된다. 야쿠프와 올가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오해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발견은 이 소설의 핵심 인물인 야쿠프를 통해 드러난다. 정치적 신념을 위해 평생을 바친 야쿠프는 아름다운 여인 카밀라를 본 순간, 자기 인생에는 근원적인 오류가 있지 않았나 자문한다. 모든 것을 알았노라,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소진하며 살았노라 자부했으나, 자신은 눈이 먼 채, 또 모든 걸 거꾸로 보고 산 게 아닌가, 그리하여 오직 아름다움을 위해 모든 걸 포기하고 달리 살 수도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저속함과 잔인함, 어리석음이 온갖 거짓으로 치장되는 행태를 저 혼자서 고고하게 내려다보았던 그, 모든 인간은 살인자지만 자신만은 섬세하고 고매한 정신의 소유자라고 자만했던 그가, 모르는 한 여자에게 독약을 주고도 그녀를 구하러 나서기보단 끊임없이 자기변명에 빠져드는 자기 모습에서 자신의 도덕적 오만과 자기 내부에 숨어 있던 살인자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소설 이론가 M. Z. 쉬로더는 그의 글 「아이러니와 소설」에서 소설을 “천진무구의 상태로부터 경험의 상태로, 무지로부터 세계의 실태에 관한 충분한 인식으로의 통과 과정을 기록”한 것이라 보았다. 그리고 이 무지에서 인식으로의 과정, 즉 환멸의 과정을 통해 외양과 실상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아이러니라며 소설이란 “본질적으로 아이러니에 의존하는 허구의 형식”이라 했다. 쿤데라도 이와 일맥상통하게 소설가의 탄생을 “미성숙에서 성숙”으로 가는 과정의 결실로 보며, “소설 창작은 인식의 행위”라고 보았다. 세계의 이면을 드러내고 실존의 비밀을 폭로하는 아이러니는 이 소설 마지막에도 끝나지 않는다. 드디어 모든 것을 깨달았노라 여기는 인물들의 오해와 착각이 소설 마지막 너머까지 여전히 계속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의 삶이 그러하듯이.

     쿤데라, 그의 시선은 칼날처럼 날카롭기에 그의 인간 실존 해부는 잔인하다. 인간 실존의 잔인한 비밀을 밝히는 이 무거운 소설을 한없이 가볍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아이러니컬한 진실의 폭로가 불러일으키는 쓰디쓴 웃음과 함께, 간결한 문체와 짤막한 장 구성, 허를 찌르는 정확한 비유, 인물 각자가 매몰된 진실의 상대성을 폭로하며 상황의 반전을 빠른 템포로 이어 가는 경쾌한 전개 과정일 것이다.


     1972년 쓰인 이 작품은 1975년 쿤데라가 체코를 떠나 프랑스로 정착하기 전 체코에서 쓴 마지막 소설이다. 그는 이 책에 원래 ‘에필로그’라는 제목을 붙이며 자신의 마지막 책이 되리라 여겨 그 속에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 썼다고 한다. ‘가을이 시작하는 어느 날’로 문을 연 이 소설은 특수하긴 하나 또한 보편적인 인간 실존 상황 속에서 인간이 살고 있는 거짓과 그 거짓에 대한 폭로라는 작가의 결산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작가가 자신의 소설론 『커튼』에서 인용한 프루스트의 말처럼, “작품은 일종의 광학기구에 불과하다. (……) 독자가 책이 말하는 것을 자기 자신 안에서 인정하는 일은 진실과 대면하는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쿤데라 책을 읽으며, 빠르게 전개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책을 내려놓고는 깊은 상념에, 자기 진실과의 대면에 빠져드는 것이리라.

 

 

『자크와 그의 주인』젊은 시인, 자네에게 경고하겠네.

밑줄긋기

 

 

"젊은 시인, 자네에게 경고하겠네.
신들도, 인간도, 표지판조차도 시인의 평범함은 용서한 적이 없었어."

 

- 밀란 쿤데라 『자크와 그의 주인』중에서

작품에 대하여 _ 03 삶은 다른 곳에

비평

03 삶은 다른 곳에
서정의 시대


방미경(가톨릭대 교수)

 

     삶은 다른 곳에 있는가? 그렇다면 그곳은 어디인가? 어떻게 해야 찾을 수 있는가?
    

     보들레르는 무엇엔가 취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포도주에 취하든 시에 취하든 미덕에 취하든, 자기 취향대로 하여간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삶은 그 도취 속에 있다. 『삶은 다른 곳에』의 주인공 야로밀에게 도취 대상은 자기 자신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바깥세상으로 나가며 성장하고 어른이 되어 가지만 야로밀은 혼자 자기 방에서, 지금 여기가 아닌 상상의 시간대 저기 어딘가에서 삶을 시작한다.
    

     이 작품은 주인공의 어머니가 연인을 만나 사랑을 하고 아이를 가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임신으로 인해 결혼을 하지만 아이 아버지는 가정에 충실하지 않고, 이른 죽음으로 이야기에서 일찍 사라져 버린다. 아이는 어머니와 할머니 등 여인들의 지극한 돌봄 속에 귀하게 자란다. 어여쁘고 총명하며 여리고 감성적인 아이는 늘 집안 여인들의 숭배와 사랑을 받으며 큰다.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자기 말이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상대의 시선 속에서 확인한다. 그가 세상으로 나가려 할 때 가장 먼저 부딪히는 장벽이 바로 이 감탄의 시선의 부재다. 너무 익숙해서 세상의전부이자, 자기 자신 속에 완전히 체화된 그 시선 없이 그는 숨쉬기가 힘들다. 이때 야로밀이 선택하는 것은 그 시선을 스스로 회복할 수 있는 다른 세상을 찾는 일이다.
    

     사춘기 무렵의 야로밀이 처음 겪는 에로틱한 상황이 이러한 그의 선택을 잘 대변해 준다. 식구들이 모두 집을 비운 날, 하녀 마그다가 목욕을 하는 장면을 그가 훔쳐보는 장면이다. 욕실 열쇠구멍으로 몰래 들여다보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를 했지만 마그다에게 들켰다고 생각되는 순간 그는 얼른 도망치고 만다. 방으로 도망쳐 들어와 그는 자신의 유약함과 소심함을 치욕스럽게 여기고 혐오감을 느낀다.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혐오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괴로워하던 야로밀은 다시 도피처를 모색한다. 바닥으로 처박힌 한심한 자기 자신을 벗어나 야로밀은 저 위 어디로 도망치기로 한다. 그는 시를 쓴다. 욕조에 몸을 담근 마그다를 훔쳐보다 들켜서 곧장 도망쳤다는 현실의 상황이 시에서는 “물로 변하는 슬픔”이라든가 “내 심장의 박동은 수면에 동그라미를 만드네” 같은 서정적 이미지로 변화한다. 야로밀은 자신이 쓴 시를 소리 내 읽으며 열광한다. 이로써 이전의 한심한 자기 모습은 ‘저 아래’에서 사라지고, 야로밀은 체험의 울타리를 벗어나 ‘저 위’의 만족스러운 자기도취의 세상으로 둥실 떠오른다. 이제 그는 현실의 체험에 종속되지 않고 오히려 체험이 그가 쓴 것에 종속된다.


     자기도취는 서정적 태도의 근본이다. 이 작품에서 “시인이란 시의 영사막에 포착된 자기 얼굴이 사랑받고 찬미받기를 바라는 의도로 세상에 자신의 자화상을 내보이는 자”라고 정의되어 있다. 그 자화상을 그리기 위해 그는 우선 자기 자신을 오래도록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는 거울을 본다. 볼수록 혐오스럽다. 멋있게 바꾼다. 황홀해진다. 이렇게 해서 실은 거울 자체가 변화되는 것이며, 시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도취하는 나르키소스가 태어난다. 자신의 내면을 향한 극도의 집중에 뒤이어 실제는 사라지고 상상의 거울로 변화한다. 현실의 자신을 그대로 대면하여 치열하게 맞서는 태도는 야로밀의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며 성찰하고, 비판하고, 격려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영원히 서정의 나이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쿤데라가 원래 제목으로 생각했던 ‘서정의 시대’가 어떤 의미에서는 이 작품에 더 어울리는 제목이었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 작품을 프라하의 봄 시기에 집필하기 시작하여 1968년 러시아 침공 이후에 끝마쳤다. 투쟁의 바리케이드와 불타오르는 분신의 장작더미 등을 통해 작품 속에 이 시기 혁명의 광기가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혁명은 미래에 대한 그 어떤 의심도 허락하지 않으며 확고한 믿음과 열정을 부르짖는다. 서정시는 그 열정의 파도에 함께 올라타기를 독려하는 목소리의 역할을 담당한다. “혁명은 연구되거나 관찰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혁명과 하나가 되길 원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혁명은 서정적이며 서정시가 혁명에게 필요한 것이다.” 자신에 도취한 시인과 마찬가지로 확신에 찬혁명은 자기 비판적 성찰을 하지 않는다. 이 시대에 발맞추어 야로밀은세상에 자기 자화상을 보여 주고 감탄의 시선을 얻기 위해 시를 쓰고 혁명의 구호를 외친다.


     그러나 이 소설이 체코의 특정한 역사적 상황과 그 시대 한 시인의 이야기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쿤데라는 작중인물을 현실 속 인물의 재현이 아니라 상상의 존재이며 ‘실험적 자아’라고 했다. 그에게 소설이란 세상이라는 함정에 빠진 인간의 삶에 대한 탐구이다. 소설은 이미 일어난 일이 아니라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들의 영역이며 소설가는 역사가가 아니라 존재의 탐구자인 것이다. 『삶은 다른 곳에』에서 소설가는 젊음이라는 함정, 혁명이라는 함정에 빠진 존재를 탐구한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는 특정 시대와 장소를 넘어서서 유럽과 러시아를 가로지르며 랭보, 푸시킨, 보들레르, 레르몬토프, 네즈발 등의 인생과 중첩된다. 아니, 실은 이 함정은 인생의 어느 길목에 놓인 덫이며 그러므로 우리 모두의 함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서정 시인의 이야기에 얼핏 모호해 보이는 엉뚱한 이야기가 끼어들어 있다. 쿤데라는 이 작품의 2부 전체를 새로운 인물 자비에에게 할애하고 7부에서 이 인물을 다시 등장시킨다. 몽환적인 분위기로 서술된 2부의 자비에는 야로밀의 상상이 만들어 낸 인물이다. 자비에는 야로밀이 현실 속에서 될 수 없었던, 그래서 더 선망하는 꿈속의 인물이며, 야로밀이 머릿속에서 써 나가는 소설의 인물이다. 야로밀의 꿈인 자비에는 다시 꿈을 꾼다. 자비에는 여자를 사로잡을 줄 알고, 위험에 빠진 여자를 구해 내기도 하고 냉혹하게 배신하기도 하며, 목숨을 걸고 혁명의 과업을 수행하는 영웅이다. 야로밀은 정확히 자신과 반대되는 이 인물을 상상함으로써 현실에 상처 입고 피 흘릴 때 얼른 자신의 방으로 도망쳐 이 상상의 거울을 바라본다. 나르키소스가 헬리콘산 샘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보며 황홀경에 빠졌다면, 야로밀은 단어로 된 시의 샘에 비친 자기 모습에 도취했을 뿐 아니라 자비에라는 인물이 활약하는 자기도취의 동영상까지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자기도취의 불모성과 비극성은 야로밀이 여자 친구의 오빠를 고발하는 상황에서 극에 달한다. 야로밀의 추궁에 시달리다가 여자 친구는 오빠가 몰래 국경을 넘으려 해서 마지막으로 만나느라 늦었다고 핑계를 대는데 야로밀은 혁명 정신에 투철하게 당국에 그를 고발한다. 연인간의 사소한 거짓말이 비극으로 이어지게 되지만 야로밀은 자기 연인까지 구속될 때에도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인식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대견해하며 순수한 혁명의 이상에 들뜬 시를 짓고, 자기 인생 최고의 시라며 열광한다. 한 개인과 시대가 자기도취의 황홀경에 사로잡혀 있을 때 얼마나 스스로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불가능하며, 그리하여 얼마나 끔찍한 괴물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이 대척점에 6부의 사십 대 남자가 있다. 6부는 『삶은 다른 곳에』에서 여러 의미로 섬처럼 따로 떨어져 있다. 우선 이름조차 없는 사십 대 남자가 갑자기 중심인물로 등장한다. 이 인물은 자신이 속해 있던 사회와 역사로부터 배척당하고 이전에 생각도 못 했던 삶을 살아간다. 쿤데라의 여러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 유형으로, 『농담』의 루드비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토마시 등의 계보에 속한다. 그는 자기운명의 바깥으로 물러나 단지 사랑의 영역에서만 자유로움을 누리는 삶을 이어 간다. 현실의 혹독한 시련을 겪었고 자신이 속했던 사회에서 내쳐지는 체험을 통해 역사에 등을 돌리는 냉소적 태도를 체득했으며, 누릴 수 있는 인생의 한 부분을 만끽하며 조용히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했다. 현실의 표면을 스쳐 가며 거울만을 바라보는 야로밀과 정반대다. 야로밀이 여자 친구를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지배하려 했던 것과 반대로, 이 사십 대 남자는 열일곱 살의 그 애처로운 아가씨를 보듬어 주고 이해해 준다. 우리가 야로밀의 연인으로만 알고 있던 이 빨간 머리 아가씨의 이중 생활이 여기에서 밝혀진다. 야로밀이 그녀의 오빠를 고발하려 한다며 고민하는 아가씨에게 사십 대 남자는 조언을 해 주고, 아가씨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체포되어 자취를 감춘다. 6부의 이야기는 삼 년 후 출소한 아가씨가 이 남자를 찾아오는 데서 시작한다.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이 아가씨를 남자는 인간이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부드러움으로 보듬어 위무한다. 6부는 이렇게 한 서정 시인의 탄생으로부터 죽음으로 이어지는 일대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이전까지 우리가 이해했던 이야기가 전부가 아니었다는 새로운 깨달음을 가져다준다.


     작품 전체의 이야기 속도와 완연히 다른 서술이 이루어져 야로밀의 죽음까지 다 말해진 6부 이후에 다시 7부에서 원래 이야기로 돌아와 야로밀이 죽음을 맞는다. 그의 죽음은 죄책감으로 인한 자살도 아니고 혁명의 화염에 휩싸인 분신도 아니다. 그는 어떤 파티에 모인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어 우스꽝스럽게 발코니에 갇혔다가 혹독한 추위 속에 밤을 보낸 다음 심한 감기에 걸려 회복하지 못하고 죽는다. 임종의 순간에 그는 자기 눈앞에 어린 어떤 이미지를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마지막 순간에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괴물 같은 모습을 발견할 것일까? 가차 없이 냉혹한 쿤 데라의 시선 아래 인생이라는 함정에서 고군분투한 우리의 서정 시인은 이렇게 죽음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