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에 대하여 _ 14 만남

비평

14 만남
예기치 않음으로 가득 찬
쿤데라의 상상 갤러리

한용택(교수)

 


     최대한 간략하게 비유해서 말한다면, 한 저작물의 제목은 문장의 주어에 해당되고, 그 내용은 주어에 대한 술어라고 할 수 있다. 쿤데라의 『만남』은 그러니까 ‘만남’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 만남은 몇 줄의 글로 정의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다. 프랑스어 제목에는 단수형 부정 관사가 명사 ‘만남’을 수식하지만, 그 내용은 다양성과 이질성이 혼재된 복수의 만남들이다. 책은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 그리고 1972년 프라하에서 겪은 쿤데라 자신의 경험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되어, 쿤데라가 ‘원(原)-소설’이라고 말하는 말라파르테의 소설 『가죽』에 관한 이야기로 끝맺는다. 이 1부와 9부 사이에 음악, 미술, 소설, 시, 영화, 오페라, 역사와 개인, 추방과 망명, 향수, 아이러니, 망각, 공포, 사랑, 키치, 참여 등 다양한 주제들이 섞여 있다. 한편에는 16세기 프랑스 작가 라블레에 관한 언급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아이슬란드의 현대 소설가 구드베르구르 베르그손의 작품이 소개된다. 마르티니크 출신 에르네스트 브를뢰르의 그림과 체코 출신 야나체크의 오페라가 나란히 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과거와 현재, 주변부와 중심부, 역사적 사건과 개인적 경험, 전통과 전위, 소설과 미술과 음악이 시대와 공간, 장르 구분을 넘어서 서로 어울리는 이러한 만남은 쿤데라가 인용한 로트레아몽의 표현이 상기시키듯 “해부대 위에서 이루어진 재봉틀과 우산의 뜻밖의 만남처럼” 아름답다.


     몽테뉴 이래로 에세이라는 장르는 무엇보다도 자유로움과 가소성을 특징으로 한다. 다양한 재료를 버무려 하나의 작품을 빚어내는 에세이에서 영원히 발기 중인 우산과 제복을 만드는 재봉틀이 한 해부대 위에서 조우한다 한들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궁금증까지 말끔히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만남’은 도대체 무엇이며, 그 이질적인 요소들의 공존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문장의 주어는 분명한데, 술어는 단숨에, 일목요연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만남’은 문장의 주어인 동시에 하나의 화두가 된다. 쿤데라는 베이컨에 관한 글에서, “예술가가 다른 예술가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언제나 (간접적으로, 우회적으로)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묻는다. “베케트에 대해 말하면서 베이컨은 자기 자신에 대해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그러면 쿤데라는 해부대와 재봉틀과 우산처럼 이질적인 요소들의 만남을 통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쿤데라의 만남을 관통하는 것은 예기치 않음이다. 우선 행위 자체는 돌발적으로 일어난다. 앙드레 브르통과 에메 세제르의 교류는 1941년 미국으로 향하던 브르통이 마르티니크의 한 잡화점에서 세제르가 발행하던 잡지 한 권을 우연히 보게 됨으로써 시작되며, 알렉시와 드페스트르 같은 아이티의 젊은 작가들과 브르통의 교류도 프랑스 귀국 길의 포르토프랭스 강연이 계기가 된다. 그 만남은 “스파크고 섬광이고 우연”이다. 야나체크 사후 일 년 뒤에 태어난 쿤데라가 야나체크의 음악을 만난 것은 피아니스트였던 그의 아버지가 같은 도시 브르노에 살던 야나체크의 지지자 그룹에 속했다는 “전기적인 우연” 덕분이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삶, 인생 자체가 우연으로 점철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쿤데라가 말하는 만남의 예기치 않음은 이러한 행위 차원의 돌발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전혀 상관없어 보이거나 이질적인, 때로는 상반되기까지 하는 요소들이 하나의 “해부대” 위에 나란히 놓여 있음으로써 유발되기도 한다. 유럽 문화에 대한 항의, 세계주의, 청년이 키워드인 프랑스의 68혁명과, 유럽 문화에 대한 찬양, 한 나라의 독창성과 독립, 성인들의 포스트-혁명적 회의주의로 규정되는 프라하의 봄이 1968년 봄에 우연히 조우하거나,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라틴 아메리카와 중부 유럽이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바로크적 상상력에 의해 동질성을 갖고 서로 마주보게 되는 예기치 않음, 또는 라블레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과 샤무아조의 『훌륭한 솔리보』가 네 세기의 시차와 문화의 차이를 넘어 구술 문학과 기록 문학의 전환점이라는 공통분모로 이해되는 예기치 않음 등이 그 예다. 이러한 “경이로운 우연”은 원래부터 당연히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고 찾아지는 것이다. 시공간적으로, 문화적으로,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현상, 사물, 인물, 사상 들을 “뜻밖의 유사성”으로 묶는 것, 다시 말해, 우산과 재봉틀을 하나의 해부대 위에 올려놓는 것은 쿤데라의 성찰이며, 『만남』은 바로 이러한 성찰의 결과다. 우연은 인간 삶을 조건 지우기도 하지만, 우연에서 경이로움을 찾는 것은 인생의 의미를 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만남이 초래하는 예기치 않음은 궁극적으로 소설 미학의 핵심을 이룬다. 이때 예기치 않음은 주로 이야기되는 내용이나 주제가 상반되는 형식 또는 상황과 모순적으로 어울림으로써 야기된다. 아울러 이 상반적 요소들의 만남은 쿤데라가 즐겨 쓰는 모순 어법 즉, 서로 대척적인 위치에 있는 의미소들의 결합 사용을 설명한다. 희극성이 없기에 희극적인 도스토옙스키의 『백치』, 호화로움이 배제되었기에 가장 쓸쓸하지만 그래서 가장 아름답고 충실한 한 암캐의 죽음이 이야기되는 셀린의 『성에서 성으로』, 파렴치해 보이지만 가슴 뭉클한 다정함을 부여하는 로스의 『욕망의 교수』, 지극히 순정적인 사랑이 극심한 공포의 발현임을 암시하는 비엔치크의 『트보르키』, 대혁명 공포정치 시대의 무거움을 가벼운 문체로 다루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극적인 역사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한 일상의 동거”가 이루어지는 아나톨 프랑스의 『신들은 목마르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사실임 직하지 않은 기괴한 에피소드들이 공존하는 말라파르테의 『파멸』과 『가죽』 등이 그러하다. 쿤데라가 말하는 의미 있는 소설이 내용과 형식, 주제와 상황의 예기치 않은 동거를 특징으로 하는 이유는 비교적 명료해 보인다. 인간 자신이 미스터리하고 모순적이며 불가사의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모순과 아이러니에 기반을 둔 소설만이 인간의 그러한 실존적 수수께끼에 접근할 수 있고, 또 그것을 총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에 의해서, 시대에 의해서 인간 실존에 변화가 온다면, 이러한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 새로운 소설 형식이 등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된다.


      쿤데라가 명확하게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실존적 본질의 추구가 오로지 소설만의 고유한 영역은 아닐 것이다. 예술이 인간에 대해 표현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예술의 본질적 미학도 여기서 벗어날 수는 없다. 음악이나 미술에서의 새로운 형식의 시도가 그것을 암시한다. 인간이 우발적이고 무의미한 존재임을 실감하고, 유일하게 명백하고 비장하며 구체적인 몸을 통해 이 우연성과 유희성을 즉물적으로 표현한 베이컨의 그림이 그러하고, 단성음악의 시대에 다성음악의 풍부함을 성공적으로 삽입하여, 감정과 형식의 이질성으로 이채로움을 부각한 베토벤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 그리고 줄거리와 극적 요소 중심의 서사적 요소를 포기하고 음악적 요소를 전면에 내세운 야나체크의 오페라가 그러하다. 

 

     소설이나 예술이 고정화된 메시지로 인간과 인생을 표현하려고 할 때, 또는 소설과 예술을 단순화된 절대적 체계 안에서 파악하려고 할 때, 그 본질은 사라진다. 대표적인 예가 모더니즘의 독단성이다. 20세기 아방가르드는 현대 예술이 마치 고유하고 독자적인 미의 기준을 가진 것처럼 전통과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을 만들었지만, 그 장벽은 역설적으로 인위적이고 틀에 박힌 분류, 클리셰, 키치, 무의미한 수다만을 양산했을 뿐이다. 이러한 것들 앞에서 쿤데라는 묻는다. “브레히트, 그대에게서 무엇이 남을 것인가?” 기실 인간의 삶과 관련해서 영원불변한 것은 없다. 글라바니크의 소설 『밤 일』의 주인공 요나스가 깨달았듯, 그리고쿤데라 자신이 깨달았듯,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골드리스트는 언제든지 블랙리스트로 바뀔 수 있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20세기라고 해서 우리가 셰익스피어에게 진 빚을 면제해 주지는 않는 것이다.”

 

     결국 예기치 않음은 맹신적, 획일적 교조주의에 대한 거부이며, 우발적이고 무의미할 수 있는 삶에 자기만의 질서를 부여하는 창조성을 내포한다. 그것은 또한 예술의 본질적인 것에 대한 복원이다. 앙드레 말로는 과거의 예술 작품을 기능의 맥락에서 추출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시간과 죽음의 풍화 작용과 무의미화 압력에 저항하는 ‘상상 박물관’을 주장했다. 『만남』은 현대 지식인과 대중의 허영과 자기 과신에 의해 망각되고 무시된 소설의 본질, 예술의 본질에 대한 복원이 예기치 않게 이루어지는 쿤데라의 상상 갤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