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에 대하여 _ 12 배신당한 유언들

비평

12 배신당한 유언들
다시, 소설의 길을 묻다


김병욱(성균관대 겸임 교수)

 


     『배신당한 유언들』은 쿤데라가 소설 『불멸』(1990년)을 발표한 후부터 『느림』(1994년)을 발표하기 전까지, 필리프 솔레르가 주관하던 계간지 《무한》에 발표한 글들을 모은 에세이집이다. 당시 이 에세이들은 한 편 한편 잡지에 발표될 때마다 이런저런 울림들을 낳았고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예컨대 이 책 9부에서 통합된 글(「이보시오, 여긴 당신 집이 아니오」)에서, 쿤데라가 자신이 속한 유럽 소설사 제3기의 미학적 전통을 옹호하기위해 곰브로비치의 선구적 작품을 예로 들어 편 주장(“『페르디두르케』는 『구토』가 발표되기 일 년 전인 1937년에 간행되었으나, 곰브로비치는 무명이요 사르트르는 유명하다. 어찌 보면 『구토』는 소설사에서 곰브로비치가 차지해야 할 자리를 빼앗은 것이라 할 수도 있다.”)은 프랑스 문단의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특히 1992년 《무한》 가을호에 게재된 글, 「파뉘르주가 더는 웃기지 않는 날」(이 책 1부)은 유럽 문화계 전체를 뒤흔들며 지식인들의 자성(自省)을 자극했다. 이 글에서 쿤데라가 살만 루슈디의 『악마의 시』를 옹호하면서 소설 예술에 무감각한 유럽 지식인들에게 가한 일침(“이 모든 슬픈 이야기에서 가장 슬픈 것은 호메이니의 선고가 아니라, 소설 예술이라는 가장 유럽적인 예술을 옹호하고 설명할 수 없는” 달리 말해서 “자기 고유의 문화를설명하고 옹호할 수 없는 유럽의 무능이다.”)이 거대한 논쟁거리가 되어 그해 내내 유럽 전체를 들썩이게 한 것이다. 물론 이제 많이 흐려지긴 했지만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본 당시 일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호메이니가 선고를 언도한 루슈디를 위시하여 피에르 부르디외, 자크 데리다, 토니 모리슨, 앙리 레비 등 많은 작가, 철학자, 심지어 정치가 들까지 참여하여, 호메이니의 평결을 비판하면서 뭔가 돌파구를 마련해 보고자 하던 크고 작은 많은 회합들. 당시 루슈디는 어느 텔레비전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쿤데라에게 공개적으로 감사를 표명했다. 그 일 년 전, 이 텍스트가 잡지 《무한》에 실린 직후 이미 루슈디는 《리베라시옹》 독점 인터뷰(1992년 10월 15일)에서, 전혀 쿤데라의 이름을 들먹이는 일 없이 “우리 제3세계 작가들은 유럽 형식으로 글을 쓴다. 유럽 문화의 토대는 소설이다. 나의 경우를 통해 제기된 물음, 그것은 바로 유럽이 자신을 정의하는 그 형식들을 옹호할 준비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라며 쿤데라의 논리를 그대로 되풀이했다. 경의의 표현으로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을 생각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이렇듯 한 편 한 편이 발표될 때마다 종종 세간의 논란거리가 되곤 했던 이 에세이집은 사실 여러 얼굴을 보여 준다.(미국에서는 ‘음악평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이 무엇보다도 쿤데라의 독특한 소설 미학(현대의 ‘최종 패러독스’를 탐구하는, 대단히 ‘반현대적인(antimoderne)’ 미학)을 잘 드러낸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소설 예술에 대한 이전 성찰(『소설의 기술』, 1986년)의 연장이지만, 성찰 폭이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넓고 풍요롭다. 이전 탐구가 세르반테스 이후 유럽 소설이 걸어온 길을 더듬으며 헤르만 브로흐와 더불어 주로 소설의 존재 이유를 천명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다면, 여기서는 16세기 프랑스 르네상스의 대표 작가인 라블레(『가르강티아와 팡타그뤼엘 이야기』)에서 비롯된 소설의 미덕과 소설 미학의 특성을 특히 카프카와 더불어 규명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책에서 특히 도드라지는 것은 소설을 국가적 틀이라는 소(小)맥락에서 떼어내 유럽이라는 대(大)맥락 속에 재배치하여, ‘예술로서의 소설’의 역사와 그 미덕과 그 미학적 원칙 들을 재정립하고자 하는 쿤데라의 강렬한 의지로서, 위에서 언급한 사르트르 관련 논란도 결국은 소설을 보는 사고 틀(소맥락/대맥락)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수 있다. 그의 그런 강렬한 의지에 수반되는 과격한 어조도 인상적이다. 원래 그의 어조가 대체로 ‘단호한’ 편임을 감안하더라도 이 책의 어조는 예사롭지 않다. 책 여기저기에서 격한 감정 표출까지 서슴지 않는 그의 강한 어조에는 어떤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왜 그럴까?
     잠시 그의 창작 도정을 되돌아보면서, 이 글들을 쓸 당시 쿤데라가 처한 상황을 살펴보자. 프랑수아 리카르는 그의 창작 도정을 세 ‘사이클’로 나눈다. 첫 번째는 『농담』(1967)에서 『삶은 다른 곳에』(1973)로 이어지는 ‘체코 사이클’이다. 작품 소재를 주로 체코라는 국가의 틀 안에서 찾은 시기다. 두 번째는 『웃음과 망각의 책』(1979),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 『불멸』(1990)로 이어지는 ‘중간 사이클’이다. 종래의 국가적 틀에서 벗어나 국제적 독자를 겨냥하여 작품을 쓴 시기다. 마지막 세 번째는 『느림』(1994), 『정체성』(1997), 『향수』(2000)로 이어지는 ‘프랑스 사이클’이다. 그가 애용해 온 7부 구성 형식을 버리고 전혀 다른 형식으로, 직접 프랑스어로 글을 쓴 시기다. 중간 사이클이 끝난 시기, 즉 『불멸』 이후 일정 시기가 그의 문학적 위기의 시기로 언급되곤 한다. 그러므로 이 에세이는 중간 사이클이 끝나고 프랑스 사이클이 시작되기 전, 이른바 “문학적 위기”의 시기에 이루어진 소설 예술에 대한 성찰의 총 결산이라 할 수 있다. 재충전이 필요한 시기에, 소설의 길이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살피면서 자신의 새로운 길을 찾고자 하는 그의 결연한 의지와 깊은 성찰의 결실인 것이다.

     그가 직접 프랑스어로 쓴 작품들이라는 점도 강조해 두자. 이 에세이들은 프랑스어를 그의 새로운 문학 언어로 만들기 위한 노고의 결실이자, 그가 프랑스어로 작품을 쓰는 ‘프랑스 작가’로 새 출발하는 데 밑거름이 된 글들이기도 하다. 쿤데라는 『불멸』 발표 이후 문학적 위기 상황에서, 프랑스어로 글을 써야겠다는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 세계의 정점으로도 평가되는 『불멸』과 더불어 지금까지 애용해 온 소설 형식(7부 구성)의 가능성을 소진해 버린 막막한 상황에서, 어쩌면 다시 그를 일으켜 세워 소설가의 길을 계속 걷게 해 준 것이 이 ‘새로운 문학 언어’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프랑스어가 그에게 그런 힘을 줄 수 있었을까? “프랑스어로 말을 할 때는 쉬운 게 하나도 없고, 언어의 자동성이 나를 도와주는 일도 없다. 문장 하나하나가 정복이요, 성취요, 발명이요, 모험이요, 발견이요, 경이이며, 어법 하나하나가 정신의 총체적인 참여를 요구한다. 프랑스어가 나의 모국어를 대체하게 되는 일은 없을 테지만, 이 언어는 나의 열정이다.”(《제네바 저널》, 1998년 17~16일자) 말하자면 언어의 장벽, 언어의 시련이 창작 활동에 장애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모국어의 자동성을 극복하고 자신의 모든 존재를 각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얘기다.
     새로운 형식, 새로운 언어, 새로운 길의 모색…… 문학적 위기의 시기에 서술된 이 책 곳곳에는 분명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길의 모색과 새로운 작가로 거듭나고자 하는 쿤데라의 절절한 의지가 배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을 그저 쿤데라가 자신이 아는 현대 예술(현대 소설, 현대 음악, 현대 미술)에 관한 지식을 나열하는, 그의 개인적 ‘현대 예술론’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 이 책은 현대 소설의 개척자들이 헤쳐 나간 길들 구석구석을 더듬으면서 자신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 한 소설가의 비장한 의지를 담은 책으로도 읽어야 하는 것이다.

 

     이 책 출간 당시 《르 몽드》 문예란 기사는 이 에세이집이 마치 한 편의 소설처럼 읽힌다고 지적했다. 옳은 말이다. 신기하게도, 적잖은 시차를 두고 따로 하나씩 발표된 에세이들이, 내용이 약간 첨삭되고 순서가 바뀌어 아홉 부로 구성된 책 한 권으로 간행되자 곧 한 편의 재미난 소설로 읽히는 것이다. 유럽 소설의 대서사시를 펼쳐 보이는 흥미진진한 소설 같은 에세이집. “소설이라는 나비가 번데기 잔해들을 짊어진 채 날아오르는” 행복한 라블레 시대에서부터 금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이라는 무대를 배경으로, 작품, 작가, 음악가, 번역가, 오케스트라 지휘자 들 등, 많은 등장 인물들이 등장했다간 사라지고, 사라졌다간 또다시 등장하여, 쿤데라의 번뜩이는 시선을 통해 다양한 관계들로 짜이면서 시종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전개되는 한 편의 소설. 유럽이라는 소설 대가족과, 소설 창작 세 시기의 주역들, 그들의 미학적 최종 의사, 그들의 유언, 그리고 그들의 배신자들, 그 배신자들의 배신 의지와 왜곡 행위, 그 결과 등이 이 소설을 가로로 짜 나가는 씨실이라면, 유언과 배신의 이 희비극 안에서, 그의 작품과 소설 미학이 위치하는 곳(“해 저문 하늘의 노을과 같은” 소설사의 제3기)에 대한 그의 애착과 그곳을 온전히 지키고 그 길을 계속 나아가고자 하는 그의 결연한 의지는 애초부터 이 소설에 세로로 걸쳐진 날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이 에세이는 쿤데라의 ‘인간적’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나는 책인 것 같다. 어쩌면 책 곳곳에서 접하게 되는 그의 비장한 어조 때문에 드는 느낌인지도 모른다. 살면서 뭔가 허전하거나 쓸쓸한 느낌이 들 때, 종종 이 책을 뒤적거리곤 한다. 소설 예술에 대한 빛나는 통찰들과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삶의 지혜로 가득한, 참으로 아름다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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