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에 대하여 _ 09 정체성

비평

09 정체성
자긍심,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발생하기 어려운 감정

강신주(철학자)

 


     이렇게 일이 커질 줄을 몰랐다. 장마르크는 자신의 작은 행동이 거대한 폭풍우를 낳게 되는 나비의 날갯짓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동거하는 연상의 여자 샹탈이 어느 날 애잔하게 자신에게 토로했던 슬픔이 사건의 시작이다.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더라.” 동거하는 남자에게는 너무나 무례한 이야기겠지만, 장마르크는 여전히 샹탈을 사랑하고 있었나 보다. 애써 치미는 질투의 감정을 삭이고 나서 그는 샹탈의 슬픔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모든 여자는 노화의 정도를 남자들이 그들에게 표출하는 관심, 혹은 무관심을 척도로 가늠한다.”라고 애써 짐작하고 나서 장마르크는 미지의 스토커가 되어 샹탈에게 편지를, 그러니까 그녀를 항상 주시하고 있다는 편지를 보내게 된다. “나는 당신을 스파이처럼 따라다닙니다. 당신은 너무, 너무 아름답습니다.” 그렇게 나비의 날갯짓이 시작된 것이다. 밀란 쿤데라가 1997년에 출간한 소설 『정체성』은 바로 이렇게 시작된다.

 

     다른 편지들도 속속 들이닥쳤고 그녀는 그것을 점점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편지는 지적이며 점잖았고 조롱기나 장난기도 전혀 없었다.(……) 유혹이 아닌 숭배의 편지였다. 혹시 거기에 유혹이 있었다면 장기적 안목으로 계획된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방금 받은 편지는 보다 대담했다. “사흘 동안 당신을 보지 못했습니다. 당신을 다시 보았을 때 너무도 가볍고 위로 떠오르고자 갈망하는 당신 모습에 나는 경탄하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존재하기 위해서는 춤을 추고 위로 솟구쳐야만 하는 불꽃을 닮았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늘씬한 몸매로 당신은 경쾌하고, 디오니소스적이고, 도취한 듯한 야만적인 불꽃, 그 불꽃에 둘러싸여 있더군요. 당신을 생각하며 나는 당신 알몸 위에 불꽃으로 엮은 외투를 던졌습니다. 당신의 하얀 육체를 추기경의 주홍색 외투로 가렸습니다. 이렇게 가리운 당신 몸, 빨간 방, 빨간 침대, 빨간 추기경 외투, 그리고 당신. 아름다운 빨간 당신이 눈에 선합니다!” 며칠 후 그녀는 빨간 잠옷을 샀다.


     장마르크는 당혹스럽기만 하다.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 혹은 누군가가 찬양하고 숭배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샹탈은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편지에 진주 목걸이가 아름답다고 하자 장마르크의 선물이지만 너무 화려하다며 자주 걸지 않았던 진주 목걸이를 자랑스럽게 걸고 외출하는 것이다. 빨간 옷을 이야기하면 샹탈은 빨간 잠옷을 입고 그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여자로 변신한다. 지금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마저 바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샹탈을 찬양하는 스토커의 편지 내용이 전적으로 그녀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찬양과 숭배의 편지를 쓰기 위해 장마르크는 과거보다 훨씬 더 치밀하게 그녀를 관찰했기 때문이다. 스토커의 편지, 그러니까 장마르크의 편지는 그녀가 망각하고 있었던 자신의 매력을 비춘 스포트라이트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스포트라이트가 그녀에게 엄청난 자기만족, 혹은 자긍심이란 감정을 부여한 것이다.


자긍심(acquiescentia in se ipso)이란 인간이 자기 자신과 자기의 활동 능력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기쁨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자신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확인할 때, 샹탈이 아닌 다른 누구라도 기쁨을 느끼기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자긍심이다. 자긍심은 얼마나 매력적인 감정인가. 길거리를 걸을 때도 우리의 걸음걸이는 레드 카펫을 걷는 여배우처럼 당당하고 아름다울 것이고, 낯선 사람과 대화할 때도 우리의 말과 행동은 거칠 것 없는 아우라를 뿜을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평범한 사람이 자신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자각한다는 것은, 그래서 자긍심이라는 감정에 사로잡히는 놀라운 경험을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사람들은 대개 어떤 피해 의식에 사로잡혀 위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샹탈이 받은 스토커 편지가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당신이 얼마나 많은 보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를 알려 주는 숭배자가 없다면, 자긍심을 갖기는 너무나 힘든 법이니까.
     그렇다. 장마르크는 제대로 오판한 것이다. 연상의 동거녀 샹탈이 자신의 노화를 걱정했던 것은 아니다. 샹탈의 우울과 슬픔은 사실 자신의 삶에 대한 자긍심이라는 감정이 연기처럼 빠져나가고 있다는 자각이었던 것이다. 하긴 자긍심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누구라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늙은이가 되는 것 아닐까. 그래서 장마르크가 보낸 스토커 편지가 중요한 것이다. 비록 동정심과 연민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스토커 편지는 샹탈에게 잃어버린 자긍심을 되찾아 주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연애편지는 샹탈만이 아니라 장마르크의 ‘정체성’도 변화시킨다는 점이다. 편지를 쓰기 위해서는 장마르크가 샹탈의 매력에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장마르크는 샹탈을 숭배했고 사랑했던 자신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여러 모로 많이 변모한 샹탈을 새롭게 사랑하게 된 남자로 변한 것이라고 말해도 좋다.
     스토커의 편지가 장마르크가 보낸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화를 참지 못한 샹탈은 순간적이나마 그를 떠나 버린다. 같이 있던 사람이 떠났을 때에만 우리는 떠난 사람이 자신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때늦게 자각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샹탈과 장마르크에게도 마찬가지다. 두 남녀는 자신들이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깨닫게 된다. 그러니 두 사람이 다시 런던에서 재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를 일이다. 우여곡절 끝에 화해를 한 두 사람은 잠자리를 함께할 때 마침내 알게 된다. 사랑은 서로를 주목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아가 서로를 숭배하면서 자긍심을 심어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소설 『정체성』의 마지막 장면은 우리에게 애잔하지만 깊은 감동을 준다. “그는 몸을 조금 일으켜 입술을 그녀에게 대려고 했다.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냥 당신을 보기만 할 거야.’ 그러더니 다시 말했다. ‘밤새도록 스탠드를 켜 놓을 거야. 매일 밤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