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에 대하여 _ 15 자크와 그의 주인

비평

15 자크와 그의 주인
디드로에서 쿤데라로, 쿤데라에서 디드로로

백선희(번역가, 덕성여대 강사)

 


     이 작품은 드니 디드로의 소설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에 바치는 오마주이자 변주다. 이 희곡을 쓰게 된 상황과 디드로의 작품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작가가 직접 자세히 밝히고 있다.(작품 서두의 「변주 서설」 참조) 쿤데라가 디드로에게 바치는 경의는 그의 글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그는 디드로를, 특히 소설가 디드로를 좋아한다고 거듭 말하고, 디드로를 “소설 예술 전반기를 구현한 소설가”로 생각한다. 그리고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을 “소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 중 하나”로 꼽고, “지성과 유머와 환상의 향연”이라 칭송하며, 이 작품이 빠진다면 “소설의 역사는 이해될 수 없고 불완전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소설의 규칙이 완전히 무시되고 자유와 즉흥이 검열 없이 한껏 발휘된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을 “세계 문학에서 결코 축약할 수 없는, 다시 쓰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한 소설 두 권 중 하나”(나머지 한 권으로는 『트리스트램 샌디』를 꼽는다.)로 꼽으면서 작가는 이 “천재적인 무질서”를 3막짜리 짧은 희곡으로 압축해 냈다. 그리고 훗날 덧붙인 「변주 서설」에서, 원작을 축약하는 온갖 종류의 ‘다시 쓰기’를 향한 적개심을 드러내며 자신의 작품이 결코 “각색”도 “다시 쓰기”도 아니라고 힘주어 말한다. 이 당당함의 근거는 어디에 있고, 이 작품에 디드로의 무엇이 남고, 쿤데라의 무엇이 담겼는지 궁금해진다.
     디드로의 작품에서 작가가 가져온 건 자크와 주인의 여행이라는 토대와 세 가지 사랑(자크의 사랑, 주인의 사랑, 포므레 부인의 사랑) 이야기다. 작가가 이 사랑 이야기들을 어떻게 엮고 어떤 성찰을 담아 변주해 내는지 따라가 보자.


     디드로 소설의 도발적인 도입부보다 “더 매혹적인 소설의 시작을 알지 못한다.”라고 쿤데라는 말한다. 배경 없는 인물을 등장시키는 데다 작가가 개입해 독자에게 시비 걸듯 말하는 이 도입부는 디드로 소설의 정수로, 이 작품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막이 오르면 “어디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고,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 속에 있으며 아무런 경계도 없는”(11, 18쪽) 길 위에 선 배경 없는 두 인물이 등장해 ‘우리는 우리가 어디를 가는지 아는가?’라는 철학적 물음을 던진다. 다만 디드로의 작품처럼 작가가 직접 개입해 독자를 도발하고 조롱하는 대신 작가는 희곡 장르에 맞게 관객을 끌어들여 두 주인공이 관객을 도발하는 것으로 변주한다.
     작품 내내 작가는 디드로의 작품에서 반복되는 핵심적인 말(“저 높은 곳에 씌어 있다” 등)을 후렴구처럼 반복하고, 작가를 찾아온 시인 일화와 ‘칼과 칼집’ 우화를 차용해 디드로의 유희를 이어받으면서 이 이야기가 디드로 작품에 대한 변주임을 환기한다. 그러나 이야기의 구성을 완전히 새롭게 짜고 인물들의 대사에 자신만의 성찰을 담아낸다.
     작가를 찾아온 시인 일화에 실린 두 작가의 생각은 확연하게 다르다. 디드로의 소설에서는 시인을 만난 작가가 시인에게 가난한지 묻고는 먼저 돈을 벌고 나서 시를 쓰라고 조언하는 반면, 쿤데라의 희곡에서는 오히려 “형편없는” 시인이 작가에게 일장연설을 토해 낸다. 대중이 “형편없는 시인들의 집합”이고, “인류가 형편없는 시를 미친 듯이 좋아하기 때문에” 형편없는 시인인 자신이야말로 언젠가는 인정받는 위대한 시인이될 거라고 말하는 것이다.

     칼과 칼집 우화를 끌어들이는 부분에서는 기발한 구성이 돋보인다. 디드로의 작품에서는 끼어든 여담에 불과한 이 우화를 작가는 아르시 후작이 신앙심 깊은 두 숙녀의 환심을 사려고 얘기하는 시메옹 성자 얘기와 대비한다.(2막 7장) 부도덕한 우화를 얘기하는 자크와 성스러운 성자 얘기를 하는 후작의 상반된 대사가 번갈아 배치되면서 두 이야기는 일화 차원을 넘어서고 디드로의 작품에 없는 희극적 효과를 창출한다.

 

     구성의 독창성이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네 인물의 교차대화에서다. 1막 5장에서 쥐스틴과 아들 비그르, 생투앙과 주인이 각자 나누는 대화 장면에서 작가는 대화 상대를 어긋나게 교차해 구성한다. 엇갈린 대사가 엇갈린 채로 이해되게 만든 구성의 유희가 작품에 재미를 부여하고, 주인과 아들 비그르의 어리숙함이 닮고 쥐스틴과 생투앙의 교활함이 닮았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인물들의 이중 연출도 쿤데라가 고안해 낸 독특한 구성이다. 쿤데라의 작품에서는 포므레 후작 부인 얘기를 들려주는 여인숙 여주인이 포므레 부인의 역할을 겸하고, 자크가 아르시 후작 역할을 떠맡기도 한다. 무대를 앞쪽과 뒤쪽으로 나누어 앞쪽(현재)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물(여주인)이 무대 뒤쪽(과거)으로 이동해 자기 이야기 속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다. 이 독특한 연출은 인물들의 사랑 이야기가 결국엔 같은 이야기의 변주임을 말해 준다.
     인물들도 닮고 인물들의 사랑 이야기도 모두 닮았으며, 인간사가 결국 반복의 역사라는 생각을 작가는 거듭 부각한다. 포므레 부인은 생투앙의 모사품에 지나지 않고, 주인은 아들 비그르의 다른 버전에 불과하고, 비그르는 잘 속아 넘어가는 후작과 비슷한 인간이고, 쥐스틴과 아가트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며, 이 생각은 반복과 다시쓰기에 대한 반감과 맞물린다.

 

주인 너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잖느냐!
자크 제가요? 반복을 해요? 나리, 자기 말을 반복한다는 말보다 더한 모욕은 없습니다.(15, 110쪽)

 

     변주 서설에서 작가가 “언젠가는 과거의 문화 전체가 완전히 다시 쓰일 테고, 그 다시 쓰기 뒤로 완전히 잊히고 말리라”는 말로써 이 시대의 ‘리더스 다이제스트’ 경향에 대해 표명하는 우려와 반감은 이 작품의 주된 메시지이기도 하다.(“이미 씌어 있는 것을 감히 다시 쓰는 자는 모조리 꺼져 버릴지다! 꼬챙이에 꿰어져 불태워져 버릴지다! 거세당하고 귀가 잘려 버릴지다!”(15, 106~107쪽)) 두 주인공이 그들 이야기를 다시 쓴 사람(쿤데라)까지 들먹이며 세상에 만연한 다시 쓰기에 대한 반감을 거듭 드러내게 만든 것도 쿤데라의 유머요 성찰이다.

 

자크 나리, 글을 다시 쓰는 사람들은 절대 불태워지지 않고, 모두가 그들을 믿습니다.
주인 우리 이야기를 다시 쓴 사람을 사람들이 믿는다고 생각하느냐?

       우리가 진짜 어떤 사람인지 보려고 원래 ‘텍스트’를 보지 않을거라고 생각하느냐?
자크 나리, 사람들은 우리 이야기 말고도 많은 것들을 다시 썼습니다.

       이 아래 세상에서 일어난 모든 것은 이미 수백 번 다시 씌었고,

       실제로 일어난 것을 확인할 생각은 누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들의 이야기가 너무 자주 쓰이는 바람에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더는 알지 못합니다.(15, 109쪽)


     작가가 끊임없이 끼어들어 독자에게 시비를 거는 디드로 소설의 파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쿤데라의 작품에서는 두 주인공이 자신들을 창조한 작가를 “적어도 글재주는 있는 사람”인지 의심하기도 하고, “바보”요 “형편없는 시인들의 왕”이라고 모독하기도 한다.

     “가벼운 형식과 무거운 주제의 결합”, “지극히 무거운 문제를 지극히 가벼운 형식과 결합하는 것”(11, 138쪽)은 쿤데라가 천착해 온 문제다. 특히 이 작품에서 그 결합이 돋보인다. 작가는 철학적 성찰을 줄곧 자유분방한 가벼운 이야기들과 뒤섞어 진지함의 무게를 덜어 낸다. 이를테면 엉덩이 큰 여자에 대한 주인의 집요한 성적 환상과 진실에 대한 반어적 담론을 엮어 웃음과 성찰을 결합시키고,(“쓸데없는 진실은 절대 이야기하지 말아야 한다.” “쓸데없는 진실보다 더 멍청한 걸 전 알지 못합니다.”) 자크가 친구의 여자를 가로챈 얘기를 하는 장면에서도 자크의 대사에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가볍게 담는다.(“감정을 제멋대로 아무렇게나 허비하는 사람들은 막상 필요할 때 쓰려고 보면 남아 있는 게 없죠.”)

     결말의 분위기는 뚜렷한 차이를 드러낸다. 디드로의 작품이 유쾌하게 끝맺는 반면 쿤데라의 결말은 쓸쓸하고 황량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두 인물은 여전히 길 위에 서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막대한 어둠을 향해” 앞으로 걸어 나간다. 이 결말에는 자신의 시대를 “덫이 되어 버린 세계”라고 진단하는 20세기 작가의 암울한 비전은 물론, 더 이상 작품을 출간하지 못할 처지에 놓였던 작가가 작가 인생에 대한 “작별 인사”처럼 이 작품을 썼을 당시의 참담했던 개인적 상황도 반영되어 있다.


     쿤데라는 소설의 무한한 유희적 가능성을 발견하고 소설의 진화에 새로운 길을 연 스턴의 ‘여행 초대’를 디드로만이 따랐다고 말한다. 그리고 디드로의 소설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의 천재성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보고 그 유희 초대에 응한 사람이 바로 쿤데라다. 디드로가 던진 유희에 작가는 이 작품으로 화답했다. 18세기 소설가의 거침없는 유희 정신과 테마를 이어받아 20세기 작가가 다른 장르의 새로운 유희 가능성을 모색하고 자신만의 성찰을 담아낸 것이 이 희곡이다. 디드로가 연 지평에 쿤데라는 새로운 차원을 부여했다. 쿤데라의 창조적 ‘읽기’에 의해 디드로의 소설이 새롭게 탄생한 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쿤데라의 이 작품을 읽고 나서는 디드로의 작품을 예전처럼 읽을 수 없으니 말이다. 보르헤스도 말하지 않았는가. “모든 작가는 자신의 선구자들을 창조
한다.”라고.